[요 21:1-2절]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the Sea of Galilee/Tiberias)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디베랴(Tiberius) 바다는 갈릴리(Galilee) 바다를 가리킨다. 사도 요한은 갈릴리를 디베랴로 사용하였다. 디베랴는 로마 황제 이름이고 도시 이름이다. 현재 Tiberias로 갈릴리 중심 도시이다. 구약 시대에는 납달리의 분깃이었다(수 19:35). AD 25년경 분봉왕 헤롯 안디바가 갈릴리와 베레아의 수도로 삼을 목적으로 도시를 건설했고, 도시 이름을 디베리우스(Tiberius) 황제의 이름으로 명명하였다. 디베랴는 팔레스타인 탈무드가 집대성된 장소이다(마이어, 893). 갈릴리는 디베랴, 게네사렛, 긴네렛(Kinnereth, 왕상 15:20) 등으로 불리웠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었다(마 28:10). 갈릴리로 돌아온 제자들은 어업을 계속하였다.


[요 21:3-6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부활하신 주께서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으나(요 20:21), 그들은 아직 전도의 일을 하지 못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고, 제자들도 동참하였다. 그들이 나간 일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날이 새도록 수확이 없었다. 그때 바닷가에 나타나신 예수께서 있었지만 그들은 알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상황을 물었고, 그들은 수확없는 것을 말하였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이 그물을 던졌는데,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이었다.

그것은 수년 전 예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처음 부르실 때의 사건과 비슷하였다(누가복음 5장). 그때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때 그는 “선생이여,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말하며 그물을 내렸는데,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질 정도이었다. 오늘 디베랴 바닷가의 사건은 수년 전 그때의 사건과 비슷하였다. 그것들은 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나타낸 사건들이었다. 사도 베드로는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를 상기했을 것이다.


[요 21:7-9절]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the disciple whom Jesus loved)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It is the Lord!)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a hundred yards, 200 규빗, 약 100m]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인 사도 요한은 주님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라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그 말을 듣자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내렸다. 그의 행동은 그가 주님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었는지를 잘 나타낸다. 다른 제자들은 육지와의 거리가 200규빗, 즉 약 91.44(100 yards)미터 정도밖에 안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왔다. 사도 베드로는 누가복음의 고기 수확 기적과 물위에 선 기적도 체험한 사도이다(마태복음 14장 26-32절). 부활한 뒤에는 헤엄쳐서 육지에 계신 주님께 나갔다. 베드로는 수확한 고기를 버려두고 예수께 쫓아갔고, 다른 제자들은 고기를 버리지 않고 이동해서 주님께 나왔다. 그들이 뭍에 올라와 보니 숯불 위에 생선과 떡이 있었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해 두셨다. 참고 갈릴리 주님의 식탁(Mensa Christi) 이라는 바위 위에 베드로 수위권 교회를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세웠다.


[요 21:10-1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朝飯)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오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이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셨다. 주님께서 먼저 식탁을 준비하고 계셨고(9절), 제자들이 잡은 생선도 함께하였다(10절). 물고기의 숫자가 153마리였다.

153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마이어 박사는 제롬의 의견을 답습한 벵겔의 견해를 제시하는데, 3×50=150에 3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제안한 것이다(마이어, 902). 또 다른 해석은 153이란 숫자(게마트리아)로 “교회와 사랑”으로 제안한다. 전체 공교회를 상징한다, 사도들의 활동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다(쉴라터), 사도들의 선교의 보편성(세계 선교)을 상징(쉬나이더)한다 등이 있지만, 153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사도 요한은 153 마리의 수확에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제시하였다(11절). 충만한 숫자에 안전한 그물이다. 아무리 많은 숫자를 포용한다 할지라도 주의 그물은 안전하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생선과 빵으로 아침을 공궤하였다(12절). 조반(朝飯)을 조식(朝食), 아침식사로 번역하지 않고 있다. 예수께서 제공하신 식탁 앞에서 식탁을 제공하는 주체에 대해서 누구도 묻지 않았다. 그것은 주 예수님을 너무나 확실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빵과 생선(生鮮)을 나누어 주셨다.

사도 요한은 이 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세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으로 제시하였다(14절).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함께한 내용을 가장 자세하게 제시한다. 누가복음에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요 21:15-17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요나](전통본문) 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Ὅτε οὖν ἠρίστησαν, λέγει τῷ Σίμωνι Πέτρῳ ὁ Ἰησοῦς Σίμων Ἰωάνου, ἀγαπᾷς με πλέον τούτων; λέγει αὐτῷ Ναί, Κύριε, σὺ οἶδας ὅτι φιλῶ σε. λέγει αὐτῷ Βόσκε τὰ ἀρνία μου.

λέγει αὐτῷ πάλιν δεύτερον Σίμων Ἰωάνου, ἀγαπᾷς με; λέγει αὐτῷ Ναί, Κύριε, σὺ οἶδας ὅτι φιλῶ σε. λέγει αὐτῷ Ποίμαινε τὰ προβάτιά μου.

λέγει αὐτῷ τὸ τρίτον Σίμων Ἰωάνου, φιλεῖς με; ἐλυπήθη ὁ Πέτρος ὅτι εἶπεν αὐτῷ τὸ τρίτον Φιλεῖς με; καὶ εἶπεν αὐτῷ Κύριε, πάντα σὺ οἶδας, σὺ γινώσκεις ὅτι φιλῶ σε. λέγει αὐτῷ Ἰησοῦς Βόσκε τὰ προβάτιά μου.

아침식사 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 예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었다(마 16:16). 또 그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도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고(마 26:33) 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했었다(마 26:35). 그러나 그는 그 밤에 주님을 세 번 부인했었다. 그것은 그의 수치스러운 실패의 경험이었다. 이렇게 연약했지만, 그는 주님을 믿고 사랑하였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의 고백은 그의 신앙고백이었고 그의 사랑의 고백이었다.

베드로의 대답을 들은 주께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Feed my lambs, ἀρνία μου)”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제자들에게 목양의 사명을 주시는 말씀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전도자로 부르셨고, 어린양을 먹이는 일로 부르셨다. 전도와 목양(牧羊)은 하나님의 일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스도께 연합된 지체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는 기관이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셔서 피 흘려 구속하시고, 교회를 이루셔서 자기 백성에게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신다. 주 예수께서 자기 몸된 교회에 사자를 보내셔서 성령으로 통치하신다(계 2-3장). 목사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의 양들을 먹이며 보살피라고 세움을 받은 자들이다(행 20:28; 벧전 5:1-4). 베드로는 이제 전도와 목양의 사명을 기억하고 그 일을 위해 자신을 바쳐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 하셨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을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주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대답을 듣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주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알지 못한 자이거나 믿지 않는 자일 것이다.

주께서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을 받으실 때마다 반복해서 “내 양을 치라(Take care of my sheep)”(16절), “내 양을 먹이라, Feed my sheep”(17절)로 말씀하셨다. lamp와 sheep이 구분되고, 먹이라(feed)와 치라(takes)가 구분된다. ἀγαπᾷς-φιλῶ, ἀγαπᾷς-φιλῶ, Φιλεῖς-φιλῶ로 ‘사랑’이란 어휘를 사용하였다. 예수께서 세 번째 질문에서 아가페가 아닌 필레인으로 물으셨고, 사도 베드로는 슬픔으로(근심하여) 주님께 대답하였다(17절). 주의 사역자들은 매우 단아하고 절제된 겸양을 가저야 한다.

감히 주님을 사랑(필레오)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감당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사도 베드로는 담대하게 주님 앞에서 자기 심경을 고백하였고, 주님께서 그 베드로의 고백을 기쁘게 용납하셨다. 사도 베드로의 마지막 대답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답변하였다(εἶπεν αὐτῷ Κύριε, πάντα σὺ οἶδας, σὺ γινώσκεις ὅτι φιλῶ σε, 17절).


[요 21:18-19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σοι)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Follow me!) 하시니.


주께서 베드로의 마지막에 대해서 말씀하셨다(18-19절).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말씀하셨다고 설명을 하였다. 사도 요한은 사도 중에서 마지막까지 생존한 최후의 목격자이다. 사도 요한은 사도 베드로께서 순교하신 뒤에 요한복음을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주께서는 이런 암시의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Follow me!)”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후에는 와보라(Come and See)라고 말씀하셨고, 부활하신 뒤에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초대교회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하였다고 한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그가 주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는 암시이었다. 고난을 각오하며 사는 것은 전도자에게만 해당된 말씀이 아니다. 주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하였다(빌 1:29).


[요 21:20-23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주께서는 베드로가 그를 따를 때 다른 이와 비교하거나 다른 이의 일에 관여치 말고 주님만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예수께서 사랑하는 자가 누구인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의 상태에 대해서 궁금하여 질문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러한 문제에 관심을 두지 말고 예수만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당시에 제자들의 의견은 분분하였다. 그러나 후일에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문제에 상관하지 말고 예수님만 따르라는 것으로 정확하게 이해하였다. 타인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 십자가를 지는 일에 힘쓰라고 권면하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 일, 가난한 자를 돕는 일,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는 일 등에 관심을 두기도 한다. 그러나 주의 백성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요 21:24-25절]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나는](원문) 아노라. [아멘](전통본문)


주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 만찬석에서 주의 품에 의지하였던 그 제자가 바로 이 책을 기록한 사람, 사도 요한이다. 그는 우리가 아는 대로 세베대의 아들이다. 교회는 사도 요한의 증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요한이 제시한데로 예수님을 믿도록 힘썼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내용들 중에서 극히 일부분을 선택하여 이 책에 기록하였다.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는 말씀은 사도 요한 당시의 교회의 공동적 증거이며 사도 요한의 글에 대한 초대교회의 확증이라고 보인다. 초대교회가 증거한 대로 이 책에 기록된 사도 요한의 증거들은 다 참된 증거들이다. 이것이 성경의 성격이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진실한 증인들의 진실한 증언들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기록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다 기록하였다면 너무도 방대해서 한 책에 담아 놓을 수 없었다. 사도 요한은 기록한 목적을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弟子들 앞에서 이 冊에 記錄되지 아니한 다른 標蹟도 많이 行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記錄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生命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마지막 문구에서 다시 확인하여 예수에 관한 여러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에 중점을 두도록 하였다. 그 지식이 구원을 이루는 지식이고 창조를 충만하고 풍성하게 하는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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