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6:1-2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성장해야 한다(be taken forward to maturity). 머물고 있는 것은 두 가지 형태이다. 첫째는 믿음에 사람이 아님과 둘째는 영적침제에 빠진 경우이다. 형태는 다르지만 교회는 동일한 처방으로 수행해야 한다.

첫째,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λόγον/the elementary/ doctrine/ teachings of Christ)를 버려야 한다. 버림이 오해를 유발할 수 있다. 버리라는 번역이 아니라 떠남으로(move, leave) 이해하면 된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변화해야 한다. 변하지 않는 믿음, 성숙하지 않는 믿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예수를 믿음에서 예수를 보다 깊이 아는 믿음으로 변화해야 한다.

둘째, 우리 번역에서는 부정형을 2절에 놓았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으로 떠나야 하는데, 회개하는 일은 쉬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죽은 행실이란 옛사람의 모습으로, 여전히 옛사람을 탈피하지 못한 것도 큰 문제인데, 옛사람의 질서를 탐하는 것은 더 큰 위험이다. 이러한 옛사람의 모습을 인지하고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하지 않는 것은 문제이다. 성령의 탄식에 불손종하는 것이다. 옛사람의 모습은 불경건, 우상숭배, 돈 사랑, 불의, 미움, 음란, 거짓, 탐욕 등이다. 죄를 인지하고 구체적으로 회개하는 것을 수행해야 한다. 막연한 회개를 부당하다.

둘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faith toward God)을 바꾸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하나님께 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수적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수적이다. 회개와 믿음은 신앙생활의 첫걸음이다(행 20:21). 칼빈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닌 지식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을 알면 회개할 수 밖에 없고, 회개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능력이 고양되면 회개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은 경홀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교회는 주 예수를 높이기 위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항상 인간의 가치를 말할 때에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신앙을 추구할 때에 형식적인 회개, 하나님을 이해하는 수준이 되고 인간을 평가하여 정죄하는 수준이 된다.

셋째는, 세례들을 폐하는 것을 금지시킨다. 교회는 세례들을 수행하여 믿음을 성장시켜야 한다. 세례들(2절) βαπτισμῶν διδαχὴν, instruction about cleansing rites(NIV), instruction about washings(ESV), the doctrine of baptisms(KJV), instruction about washings(NASB). 세례 어휘가 복수인 것은 난제이다. 루터는 한 세례라는 교리를 말하면서 교회가 반복해서 수행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로마교회의 세례형태 영세와 견신례가 부당하다고 밝혔다. 칼빈은 크리소스톰이 처음 세례를 폐기할 수 있다는 견해를 부정하며, 두 세례를 유아세례와 연결하여 이해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한 세례를 고백하였다. 

그런데 존 오웬은 세례들을 복수로 인정하며 “외적 세례와 성령 세례”를 제언했다. 로마교회는 영세와 견진례로 이중의 복수 세례를 구도화시켰다(참고 토마스 아퀴나스). 오순절주의의 기원은 오웬의 세례들 이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례를 이중 구도로 보는 근원은 로마 교회에 있다.

넷째는, 안수를 부정하지 않아야 한다. 안수는 직분자에게 주어지는 예식이다. 교회는 합당한 예전을 수행해야 한다. 직분자에 대한 합당한 안수를 수행하여 역사적 신앙을 구현해야 한다. 교회는 진리의 터와 기둥이다.

다섯째는, 죽은 자의 부활을 지켜야 한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요 5:29).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 그런데 1세기에 이미 부활에 대해서 믿지 않은 것이 교회에 나타난 것 같다(참고 고전 15장).

여섯째는, 영원한 심판이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하다. 천국이 영원하듯이, 지옥도 영원하다(막 9:43). 영원한 침판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부정되었고 지금은 명확하게 부정한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지옥을 만들었을까? 라는 주장을 교회에서 버젓이 말하고 있는 수준이다. 영원한 심판에 대한 지식은 반드시 지켜지고 선포되어야 한다.

[히 6:3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구원적 신앙의 시작이나 그 신앙의 성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시작자요 완성자이시다(히 12:2).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이 세상에서 그의 허락하심 없이 되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의 구원과 믿음도, 믿음의 성장도 그러하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라나게 하신다(고전 3:6-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신앙의 성숙함에 나아갈 것이다.

이것이 수동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엄중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한 것이다. 주 예수께서 너희가 구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된다고 말씀하셨다. 교회가 구하는 것은 주 예수의 영광이다.

[히 6:4-6절] [이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tasted of the heavenly gift)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partakers of the holy Ghost)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tasted of the good word of God and of the powers of the world to come) 타락(fall)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없음이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본문은 우리가 초보적 진리에 머물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할 이유를 보인다. ‘한번 비췸을 얻었다’는 말씀은 난제이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다’는 것은 성령의 은사들을 체험했다는 뜻이지만 ‘타락’이 등장하기 때문이다(6절).

하늘의 은사, 성령에 참여한 바 됨, 하나님의 말씀과 오는 세대의 능력을 맛보았으면서도 타락한 경우가 있다. 본래 성도의 견인 교리에서 배교라는 것은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배교(타락함)가 있는 것은 맛봄 때문이다. 맛은 실체는 아니지만 실체와 동일한 성격이 있다. “맛을 본다”와 “맛있다”가 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복음의 세계에 대해서 기뻐했고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러한 사람들이 타락(fall)하게 된 것일까? 구원은 사람의 능력으로 되지 않음이다. 사람으로 복음의 진수에 대해서 맛까지는 볼 수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실제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에게 맛본 뒤에 타락한 사람에게 더 심각한 선고를 하였다. 회개할 수 없다고 규정한 것이다. 마치 성령훼방죄와 유사한 규정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욕보이기 때문이다. 맛본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복음을 말하는데 결국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지신 가혹한 십자가를 욕보이고 만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세운 복음은 십자가를 현저하게 욕보이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가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 이해하지 말고 가상적인 경고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넘어질까 조심하면서 겸손과 두려움으로 깨어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 만일 어떤 이가 타락하여 믿음을 배반했다면 그는 참으로 중생한 자가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인간이 탐구하여 놓은 이해까지 갈 수 있지만 십자가의 도까지 이를 수 없다. 십자가의 도는 천사도 알기를 흠모하는 하나님 아들에게만 부여된 영생의 진리이다.

[히 6:7-8절] [이는]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단비, 은혜의 단비를 받아 성장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 복을 받지만, 영적으로 성장하기는커녕 가시와 엉겅퀴 같은 나쁜 열매를 맺으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를 받고 마침내 지옥 불에 던지울 것이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서는 십자가가 현격하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십자가의 도를 부정하는 사람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를 말하지만 십자가를 말하지 않는 부류는 19세기 자유주의에서 대표적으로 등장하였다. 예수를 말하면서 십자가가 아닌 사랑으로 연결시켰다. 우리시대에는 예수를 말하면서 십자가가 아닌 공공성, 정의를 말하는 부류가 증가하고 있다. 모든 것이 합당한 것이지만 십자가의 도와 견줄 수 있는 주제(item)가 아니다.

십자가의 도와 비교하면 다른 모든 것은 가시와 엉겅퀴가 될 것이다. 세상에서는 보배이고 진주이지만, 주 앞에서는 가시와 엉겅퀴가 된다.

[히 6:9-10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이는]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사랑의 수고로](전통사본)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하심이니라].

사랑하는 자(beloved)는 사도들이 교우들을 부르는 애칭이다. 사도가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자들이다. 사도는 우리이고, 사도의 권면을 듣는 사람은 너희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말하는 자와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다(계 1:3).

히브리서 저자는 배교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 편지 수신자들이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한다. ‘구원에 가까운 것’이라는 원어(에코메나 소테리아스)는 ‘구원에 수반하는 것들’이라는 뜻이다(KJV, NASB, NIV). 그것은 그들에게 구원에 수반하는 행위의 열매들이 있다는 뜻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의 영적 미성숙을 책망하며 배교를 경고했지만, 실상 그들 속에 좋은 것들과 선한 행위의 열매들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택함 받은 자는 배교하지 않을 것이지만 권면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이고 배교자에 대한 엄중하게 확증되는 심판이다.

그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않으셔서 그들의 행위와 그들이 성도들을 섬긴 것을 잊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행위’라는 말은 그들의 선한 행위를 가리킨다. 또 그들은 “그의 이름(예수)”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의 수고로 성도들을 섬겼고 또 섬기고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성도들을 섬기는 행위로 표현되었다. 사람들은 우리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고 또 알아도 곧 잊어버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롭고 선한 행위들을 다 기억하신다. 사도는 교회가 주를 위한 수고와 헌신을 기억하고 있음을 고지하였다. 그들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주께서 기억하심은 언제나 위로와 소망이 된다. 복음의 은혜와 위력은 계속들어도 결코 목마르지 않는 것이다. 바다물은 먹어도먹어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아 만족하지 못한 죽음이고, 생수는 먹으면 염분이 희석되고 만족이 있어 중지해야 한다. 그러나 보좌로부터 오는 생수인 복음은 들어도들어도 먹어도먹어도 결코 만족이 없는 생명이다.

[히 6:11-12절] [그러나]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저자가 교회에 보내는 간절한 소원은, 첫째, 이 서신을 받는 수신자들이 다 동일한 부지런이 나타나는 것이다. ‘너희 각 사람이’라는 말은 이 권면의 말씀이 교회의 일부 사람들에게가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기를 원함을 나타낸다. ‘동일한 부지런’이라는 말은 열심 있는 성도들과 비교하여 그들의 부지런과 동일한 부지런이라는 뜻이다. 모든 성도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일주일의 한 날을 지키기 위해서 6일을 힘써 일해야 한다.

둘째, 성도들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이다. ‘소망의 풍성함’이라는 원어는 ‘소망의 충만한 확신(the full assurance of hope)’이라는 뜻이다. 성도들의 소망은 예수 자체이며, 약속하신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 영생이다.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주의 이름이 풍성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후세들에게 본 받는자가 되게 할 수 있다(12절). 사도의 권면은 충격적이다. 우리를 본받으라가 아니고, 후세가 본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권면한 것이다. 매우 적극적인 권면이고, 후세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현재 자기 생활에서 후세를 위한 배려를 하는 인생이 적지 않다. 농부가 내년 농사를 위해서 종자는 아끼지만, 신자가 후세 양육을 위해서 종자를 남겨두지 않은 경우가 될 것이다.

[히 6:13-15절]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받았음이니라].

본문은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의 예로 아브라함을 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에 그의 나이는 75세이었다(창 12:4). 아브라함이 오래 참았다는 것은 이 75세부터 그가 이삭을 아들로 받았던 100세까지 약 25년 간의 세월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25년 간의 세월을 의심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고 기대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오래 참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약속을 주셨다. 그것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내용이었고, 이것은 메시아로 말미암은 구원의 복의 약속이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훈련은 믿음의 후손들이 가져야 할 인내의 기본이다. 아브라함이 많은 실수를 하였지만 자기 능력 범주에서 주의 말씀에 온전하게 순종하였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이삭’이라는 이름까지 주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자기의 이름으로 맹세하셨다.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이 지극한 유일한 이름이시기 때문이다.

[히 6:16-18절]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맹세는 언제나 큰 것을 두고 한다. 사람들은 보통 부모님의 이름이나 자식의 생명을 두고 맹세한다. 그 맹세가 인정되면 다툼이 정지될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향해서 다툼을 일으키는 자는 어떻게 될까?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어떤 것의 참됨을 엄숙히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모든 논쟁에서 진실을 호소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맹세하며 말씀하심으로 그 약속을 보증하셨다(창 22:16-18).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첫째로 그의 약속하심 자체이며, 둘째로 그의 맹세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확실한 약속을 주시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히 6:19-20절]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성도의 소망은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과 같다. ‘휘장’이라는 말(카타페타스마)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을 가리킨다(히 9:3). 휘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을 의미한다.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께서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셨으므로, 우리의 소망은 더욱 견고하다.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을 끌어 온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보다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분은 여호와이시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을 축복한 이는 멜기세덱이다. 그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대제사장이 예수이시다. 예수께서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것이 모리아에 있는 산도 되겠지만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을 때로도 가능하겠다.

혹자는 멜기세덱을 셈이나 욥으로 제시하는 것이 있는데 좋은 제시가 아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을 예수, 성육신 이전의 성자의 현현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6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들을 넘어서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들은 회개, 믿음, 세례, 죽은 자들의 부활, 심판 등이다. ‘완전한 데’라는 말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알고 믿고 실천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둘째, 우리는 배교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배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 사상의 변질이며 계명에 대한 불순종이다. 우리는 이런 불신앙과 불순종에 떨어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셋째, 우리는 동일한 부지런을 가지고 확실한 소망에 이르자.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친히 맹세로 주신 확실한 내용이다. 그것은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과 같다. 우리는 그 소망을 확실하게 붙들자.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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