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a절] 옛적에 선지자(先知者)들로 여러 부분(部分)과 여러 모양(模樣)으로 우리 조상(祖上)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히브리서 1:1 Πολυμερῶς καὶ πολυτρόπως)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모습이다. 루터는 예언의 은사로 평가하였고, 예언의 은사가 활용되는 부분으로 제시하였다. 루터는 여러가지 부분과 모양이지만 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모아진다고 제시하였다. 루터는 선지자들이 여러 부분과 모양에서 예언한 그 분은 우리의 주님이시고, 지금고 말씀하고 계시다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2-3장에서는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였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조(성령조)에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심”으로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의 삼중직 중 선지자 직분이 있는데, 삼위일체를 계시한 것(Wonderful Excange)이다. 하나님께서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를 비롯하여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그 내용은 오실 그 이(메시아)를 지시한 것이었다. 그 분이 오셔서 계시를 완성하셨다. 그리고 교회를 창립하셔서 자기 종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라는 말은 구약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여러 방식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양으로 직접 나타나셨고 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셨고 불과 구름으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셨고 음성으로 말씀하셨고 기적들을 행하셨다. 또 그는 성령의 특별한 감동 중에 자신의 뜻을 선지자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셨다. 선지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히 구별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이렇게 임하셨다,’ 혹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렘 1:2; 호 1:1).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라는 말은

구약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여러 방식들을 가리킨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모든 행위들을 기록하고 설명한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특별계시들을 성경책에만 기록되게 하셨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가 있고 이 책의 내용을 가감해서는 안 된다(신 4:2; 12:32; 계 22:18-19). 히브리서에서 여러 부분과 모양은 구약 계시이다. 구약의 선지자들,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과 그가 지시한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이 기록한 신약 성경이다. 신약 계시는 구약 계시보다 뛰어나다(김효성)는 견해는 여러 견해가 있다. norma normans에 대한 견해이고, 게르하르트 마이어 박사는 루터의 견해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자체에 모든 권위의 근거를 두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계시의 상징의 실체이시며 예언의 성취이시다. 구약시대에 감취어 계셨던 그는 때가 되어 나타나셨다. 그는 사람으로 오셨고 하나님의 뜻인 택자들의 속죄사역을 다 이루셨다. 신약성경은 예수의 태어나심과 고난과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교회 세움과 교회에 보낸 편지로 구성되었다. 하나님께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우리의 구원과 온전함을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만큼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계시하셨다.

[2b-3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後嗣)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榮光의 光彩)시요 그 본체의 형상(本體의 形像)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우리의] 죄(罪, τῶν ἁμαρτιῶν)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威嚴의 右便)에 앉으셨느니라. ※ ὃν ἔθηκεν κληρονόμον πάντων, δι’ οὗ καὶ ἐποίησεν τοὺς αἰῶνας· ὃς ὢν ἀπαύγασμα τῆς δόξης καὶ χαρακτὴρ τῆς ὑποστάσεως αὐτοῦ, φέρων τε τὰ πάντα τῷ ῥήματι τῆς δυνάμεως αὐτοῦ, καθαρισμὸν τῶν ἁμαρτιῶν ποιησάμενος ἐκάθισεν ἐν δεξιᾷ τῆς Μεγαλωσύνης ἐν ὑψηλοῖς,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 성경이 지시하는 실체가 “이 아들”(ἐν Υἱῷ)이라고 하였다(2절). 영어 성경에서는 his Son이라고 번역하여 이해에 난맥이 있다. 루터는 3인칭 소유대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번역하였다(durch den Sohn). 제네바성경은 his Son이라 번역한 뒤에, “Which one Son is God and man”라고 노트하였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사람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다.

“아들”은 만유의 후사이시다(the heir of all things, 2절). 후사(後嗣), heir는 상속자, 후계자라는 의미이다. 만유의 창조자이신데(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음, 요 1:3) 왜 후사일까? 그것은 아버지와 함께하신 아들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 후사를 그리스도의 인성에 부착시켰다. 그리고 만물을 창조하심을 그리스도의 신성에 부착시켰다. 루터는 히브리서 기자가 신성보다 인성을 앞에 둔 것을 주지시키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할 가능성을 준 것으로 제시하였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자기를 아는 지식에 이르도록 허락하시고 기뻐하신 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자기를 알아볼 수 있도록 자기를 낮추셨다. 칼빈은 이것을 “적응(accommodation)”이라고 하였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탁월하심을 증거한다.

첫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 예수께서는 피조물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참여하신 창조주이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해]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둘째, 아들은 만유의 후사이시다. ‘만유의 후사’라는 말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표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만물 창조의 방법이시며 목표이시다. 시편 2:8,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골로새서 1:16,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목표이며 목적이심을 보인다.

셋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넷째,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 이 표현들은 물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도 적용될 수 있지만(요 14:9; 고후 4:4, 6), 문맥적으로 볼 때(2, 3절) 그의 성육신 이전 상태를 가리키는 것 같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영원한 관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신비에 속한다.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골로새서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루터는 영광의 광체(the radiance of the glory of God)와 본체의 형상(the express image of his person)을 중복 표현으로 제시하였다. ὑποστάσεως(휘포스타시스, 본체, person, nature, being)는 이해가 쉽지 않은 개념이다. 휘포스타시스, hypostasis는 위격, persona로 번역된다. 인격은 실체로 이해한다. 실체로 이해하는 것은 합당한 대상이 됨이다. 현대시대에 대상을 세우는 것을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있다. 그 대상에 포함되기 때문일 것인데, 그것은 불교 사상의 삼법인(三法印, tilakkhaṇa)의 제법무아(諸法無我, Anatta)에 해당될 것이다.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자이시다. 이것은 천지만물을 보존하시는 섭리 사역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섭리주 하나님을 아들로 계시하고 있다. 골로새서 1:17,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루터는 “붙든다”는 어휘가 분사로 특별한 강조 의미가 있다고 밝히며, 히브리어 관용 표현을 헬라어나 라틴어가 충분하게 표현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적 표현을 한 것이다. “보존하다(sustains)”는 표현은 “붙든다(upholding)”는 표현이다. 우리가 통상 섭리(攝理)가 아니라 강조한 용법으로 “붙든다”이다. 구약성경에서 섭리에 대한 표현은 독수리가 새끼를 보호하는 것(신 32:11), 부성적 사랑(사 46:3-4), 잉태와 생산과 양육(수 11:12)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부성적 자비(fatherly favor and care)에 대해서 강조한다.

여섯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셨다(3절). 죄를 정결케 하신 일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다. 죄는 인간과 세상의 근본 문제이었고 죄 문제의 해결은 주 예수께서 하신 바로 그 일이었다. 마태복음 9:6,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마태복음 20:28,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죄를 정켤게 하셨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에서 인간의 모든 의와 회개의 행위를 전적으로 소용없이 만들었다고 밝혔다. 죄가 정켤케됨은 우리를 통하여 하신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이고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의 죄를 정결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와 죄의 정결에 대해서 갈망해야 한다. 이유는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우리의 죄는 이미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진실로 그리스도께서 청결케하심이 우리 안에서 먼저 회개를 산출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를 산출하는데, 우리가 그릇 행하였지만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구주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일곱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높은 곳에서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 이것은 죽으심 이후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6:19, “주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로마서 8:34,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심과 또 그가 온 세상과 교회를 통치하심을 계시한 것이다.

[4-5절] 저가 천사(天使)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基業)으로 얻으심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하셨는가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보다 뛰어나시다. 천사와 비교급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아들이 천사보다 뛰어남에 대한 내용,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the name he has inherited is superior to theirs)”으로 얻은 것이다(4절). 아들은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지목한 실체이며, 능력의 실체이다. 시편 2편은 메시아에 대해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예언하였다. 여호와께서 메시아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인성)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신성(神性)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인간이시고 하나님이시다.

루터는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두 가지 태생으로 밝혔다. 어거스틴은 “오늘날”을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난 것으로 간주하여, 오늘을 영원한 것으로 연결하였고, 피터 롬바르드가 계승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그들의 견해와 다르게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탄생하신 것으로 제한시켰다. 그리고 히브리어에서 “오늘날”에 대한 관용적 의미는 “정해진” 혹은 “특별한 사건”을 의미한다. 그래서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로 제한시켰다.

[6절]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70인역, 신 32:43을 인용).

‘맏아들’, πρωτότοκον(프로토토콘)는 ‘첫 번째로 나신 자’라는 뜻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마리아가 낳은 맏아들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고(마 1:25 전통본문; 눅 2:7), 또 예수님 믿는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으나(롬 8:29), 본절에서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뜻으로 보인다.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신다”라는 구절은 그의 탄생을 가리킨 것 같다(KJV, NIV). 주께서 탄생하셨을 때 그 밤에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송했다(눅 2:13-14).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천군 천사들에게 찬송을 받고 계신다(계 5:11-12). 그는 천사들과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한 분이시다.

하나님의 맏아들(롬 8:29)은 모든 천사에게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주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천사를 숭배하는 것은 전혀 부당하다. 사람은 천사가 경배하는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것이 합당하다. 기업을 받은 자녀들이나 기업이 없는 천사들은 동일한 하나님을 경배한다.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주 하나님이시다. 그 놀라운 진리가 이 땅 위에 드러났다(manifest).

[7절]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πνεύματα)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πυρὸς)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 KJV, niv에서는 πνεύματα를 spirit로 번역하였다. 제네바 번역(1599)에서는 He maketh the spirits his messengers, and his ministers a flame of fire.로 하여, “메신저의 영들”과 그의 사역자의 불꽃으로 번역하였다.

피터 롬바르드와 많은 학자들은 7절을 대환법으로 분석하여 이해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영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영들을 천사들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7절에서 천사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찬사가 무엇을 하는가를 설명한다고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서 루터는 “삼는다”는 것에 근거하여 천사 창조에 대해서 밝혔다.

천사라는 존재는 육체가 없는 영 혹은 바람과 같은 존재이다. (참고로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천사로 간주하여 성관계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천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특수한 존재(영체)이다. 그러나 천사가 인간의 어떤 상황에 개입하는 수호천사 개념까지 이끄는 것은 부당하다. 직업수호성인, 지역수호성인 개념은 부당하다. 주께서 천사들을 창조하셔서 찬양하도록 하시고, 그리고 주의 사역자들로 불꽃(flames of fire)을 삼으셨다. 이 장면은 호렙 광야에 있는 떨기나무를 생각나게 한다. 태어나셔서 천사에게 경배를 받으신 주님의 십자가는 그의 종들에게서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8-12절]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네가[주께서] 의(δικαιοσύνην)를 사랑하고[사랑하시고] 불법(ἀνομίαν)을 미워하였으니[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주께] 부어 네[주의] 동류(同類)들보다 승(勝)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 9절. 승하게 -> 뛰어나게,

아들에 관해서(about the Son) 다시 제시하고 있다(8절).

첫째,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천사와 달르게 친히 ‘하나님’으로 불리웠다(8절). 인용된 시편 45편은 메시아를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 그의 보좌는 영원하며 그의 나라의 홀(笏)은 공의로운 홀이라고 말한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1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요한일서 5:20은 ‘참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디도서 2:13은 ‘크신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히브리서 저자는 또한 시편 102:25-27을 인용한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피조 세계는 다 쇠하여지고 낡아지지만,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영존하시다. 본문은 메시아께서 이 피조 세계에 속하지 않는 신적 존재이심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둘째, 아들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보좌와 나라가 영원하며 공평하다. 우리 번역은 의미 이해가 좀 모호하다. 홀(笏)과 규(圭) 번역(ῥάβδος, scepter)은 모두 쉽지 않은 어휘이다(왕의 지휘봉). 홀과 규는 왕좌에 해당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scepter는 주권을 상징하는 막대기(지팡이)로 통치자가 휴대하는 공적 소품이다. 개역개정에서 홀에서 규로 개정하였고, 좀 더 의미에 적합하게 번역하였다. 다만 우리 드라마에서 임금이 규(圭)를 들고 다니는 모습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사단장들은 항상 지휘봉을 갖고 다녔다.

본문의 의미는 아들의 손에 들린 두 개의 규(圭)가 등장한다. 정의의 규(ῥάβδος τῆς εὐθύτητος)와 왕국의 규(ῥάβδος τῆς βασιλείας αὐτοῦ)이다. 애굽의 파라오는 두 개의 규를 갖고 있었다. 두 개의 규는 다른 역할을 한다. 잡아드리는 역할과 방향을 지시하는 역할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왕국(아들의 왕국)이 영원하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우리 번역은 의와 불법으로 대조시켰는데, 원어는 의와 악으로 대조시켰다(9절). 우리는 항상 두 주제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의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이다. 우리시대 정신은 어떤 혐오도 거부하는 세대인데, 악에 대한 혐오까지 거부하는 관용 정신을 갖고 있다. 악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악에 대한 판단을 거부하는 경향이다.

하나님의 사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즐거워한다(소요리문답 1문). 즐거움의 기름이 부어져(has anointed you with the oil of gladness) 어떤 동료( companion)보다 탁월하게 즐거워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들을 만유의 창조주로 고백한다(11-12절). 그러나 피조 세계는 연한이 존재한다. 주는 영존하지만 세상은 연한이 있다. 앞에서는 피조된 천사와 아들을 비교하였고, 여기에서는 피조된 세계와 비교하였다. 유물론 체계의 가장 맹점은 미래를 낙관으로 보는 변증법 체계이다. 기후 변화 등 상상할 수 없는 미래의 암운이 보이지만, 탄소 제로 등 다양한 방편과 과학으로 미래를 낙관으로 설계할 것이다. 환경의 무질서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인간의 마음의 부패이다. 성경 말씀처럼 세상은 빨라지고 사람은 급해지고 사랑이 식어가는 현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성경 말씀에 시대가 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영존하신다. 주님께서 영존하시기 때문에 주님과 연합된 주의 자녀들도 주 안에서 영생할 것이다.

[13-14절]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13-14절은 1장 전체를 요약하는 것 같다. 천사는 부리는 영으로 구원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냄을 받은 존재이다.

천사에게 결코 언제든지 우편에 앉아있으라는 허용이 없었다(13절). 천사숭배가 언제나 가능하지 않았음을 확정하고 있다. 유대인에게 천사숭배가 있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가 수행하는 천사숭배(만성절), 성자숭배 등은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것을 제정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천사숭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였다. 1세기 교회에서 이미 천사숭배를 우상숭배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천사는 부리는 영(섬기는 영, ministering spirits)으로 구원 얻을 후사(those who will inherit salvation)를 위하여 섬기도록 보냄을 받았다(14절). 천사들이 어떻게 구원받은 후사를 섬기는 방식에 대해서 명확한 이해는 없다. 우리는 물리적 도움이 아니라 영적 도움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시험받으실 때에 천사들이 수종하는 방식과 유사할 수 있겠다. 루터는 복음의 메시지가 선포될 때에 천사들이 함께 있는 것으로 제시하였다. 성령과 천사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맹점이 있다. 이러한 불명확한 이해에서는 간명한 전제를 확립하면서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첫째, 신자가 천사를 경험한다는 의식은 좋지 않다. 둘째, 천사는 보이는 존재가 아니다. 셋째, 천사를 메신저(maseenger)라고 한다면 주께서 세운 ‘사자’도 천사라고 할 수 있다(Τῷ ἀγγέλῳ τῆς ἐν Ἐφέσῳ, 계 2:1). 결론, 여러 모든 것이 있어도 오직 선포된 복음에 착념해야 한다. 모든 것을 아들께 집중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그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이 있으니, 그 이름을 힘써 증진해야 한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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