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죽음을 예고하신 뒤에 13장부터 17장까지 강화(講話, discourse) 내용이다. 18-19장에서는 잡히시고, 죽으심(다 이루었다)과 장사되심이다. 20장에서는 부활하신 주님, 21장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세우심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21:24에서 요한복음의 내용이 참(true)이라고 증거하였다. 요한복음의 내용을 축약하면 ”참빛을 믿으라“는 것이다. 보냄받은 이를 믿으면 보내신 이를 믿는다는 놀라운 교환(the wonderful exchange)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는 사람으로 죽음을 준비했고, 예수를 믿도록 마리아를 기념하도록 권면하셨다. 예수 죽음 이전의 믿음은 부끄러움과 침묵이지만, 예수 부활 이후 믿음은 담력과 권능으로 예수를 증거한다.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고백하였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막 1:1). 마틴 루터는 복음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종교개혁가들에게 나타난 현상은 현재 만유를 다스리는 왕을 교회의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믿고 세운 것이다. 칼빈도 루터와 유사한 개념이다(참고. 기독교강요 2권 9장 2절). 칼빈은 마가복음 1:1에서 시작된 현재까지 망라한 개념이다.

요 12:1-8절,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께 부음

[요 12:1-3절] 유월절(逾越節, the Passover)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Bethany)에 이르시니 이곳은 [죽었다가](전통본문)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Lazarus)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至極)히 비싼 향유 곧 순전(香油 곧 純全)한 나드 한 근(a pint of pure nard)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앉은 자 중.. 에를 영역에서는 reclining으로 번역하였다. Geneva(1599), KJV는 sat으로 번역하였다. reclining, ‘눕다’로 이해하는 것이 당시 문화적 배경에 합당하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의 식탁 모습는 자기 문화에 성경 문화를 채색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눕다는 뒤로 눕는 것인데, 성경에서 눕다는 방석을 놓고 ”옆으로 기대어 눕는 것“, 혹은 ”옆으로 기대어 앉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절. 한 근. λίτραν, a pint(0.57 L, 미 0.47 L), a pound(453g, 12 온스ounces, 1/16 pound), 327.5 grams

마이어 박사는 마리아 향유 도유 사건이 마태와 마가의 배치와 다름을 제시하였다(마이어, 531). 마이어 박사는 먼저 누가복음의 막달라 마리아의 도유 사건과 병행 기사가 아니라고 제시하였다. 마태와 마가는 예루살렘 입성 후에 한 것으로 말씀하는데, 요한은 입성 전에 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마이어 박사는 마태와 마가가 시간 순서가 아닌 내용으로 나열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요한이 유월전 6일 전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을 밝혔기 때문이다(마이어, 531).

엿세 전은 안식일에 베다니에 도착하였을 것이다(금요일 오후, 마이어 , 532). 예수는 베다니를 떠나 에브라임에 거하셨지만(요 11:54), 그곳에서 오신 것은 아니다. 베다니에 오시기 전 여리고에서 활동하신 모습이 있다(마 20:29, 눅 19:1).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전 베다니에서 유숙하셨다. 베다니는 예수께서 살리신 나사로가 거주하는 지역이다.

이 유월절은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네 번째 유월절이었다(김효성). 베다니에 오신 예수를 나사로의 남매가 영접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잔치하였다. 나사로가 사는 지역에서 잔치를 열었다. 마르다는 예수를 영접하는 잔치를 열었고, 마리아는 예수의 죽음을 준비하는 향유를 부었다. 마르다가 배푼 잔치는 예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신 일이 기쁘고 감사해서 연 잔치이었을 것이다.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고 상을 차리는 일을 보았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들기 위해 식탁에 앉은 자들 중에 있었다.

마리아는 값비싼 나드 향유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겼다. 누가복음 7:38은 한 동네에 죄인인 여자가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은 비슷한 사건을 기록하였다.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4장은 예루살렘 입성 후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곧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증거하였다(마 26:6-7; 막 14:3). 마이어 박사는 나병환자 시몬,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 네 명의 베다니 사람과 12명과 예수, 17명이 참석한 잔치로 제시하였다(마이어, 533). 마이어 박사는 마르다가 시몬의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에서 이미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마이어, 533).

마가복음 14:5는 향유의 가격을 약 300데나리온 이상이라고 소개하였다. 그 두 책에 기록된 사건은 본문의 사건과 같은 사건인 것 같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도, 발에도 부은 것 같다.

나드 향유는 목이 긴 향유 통에 보관하였는데, 그 통은 알라바스터나 유리로 만들었는데, 마태와 마가는 알라바스터라고 하였다(마 26:7, 막 14:3). 알라바스터는 딱딱한 대리석 비슷한 석회인데, 투명하고 부서지기 쉽게 제조한 것이다. 알라바스터 제조는 사울의 고향인 다소가 중심 생산지였다. 나드 향유는 라벤다와 비슷한 향기를 내며 몰약과 발삼과 함께 가장 비싼 향유에 속한다(마이어, 534).

마리아라는 여인이 예수의 머리와 발에 향유를 부은 사건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그 향유의 향기가 집안에 가득하였다(3절). 이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향기(복음)이 집(세상)에 가득하다고 해석하였다. 어떤 해석이든지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에 향유 부음을 기록한 것이다. 사람들이 백성들이 호산나, 호산나로 열광하기 전에 향유 부음을 남기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 12:4-6절]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자, 시몬의 아들/Simon's son, KJV] 가룟 유다(Judas Iscariot)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the money bag)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300백 데나리온, a year’s wages(NIV), three hundred denarii

그때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는 마리아를 향해서 “이 향유를 어찌하여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하였다. 그 향유는 약 300데나리온(1년치 급여)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300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가 300일 동안 번 돈과 같다. 하루 품을 대략 10만원으로 잡으면 3,000만원이 된다. 마리아는 오랫동안 돈을 저축하여 그 향유를 구입했을지 모른다. 그는 그렇게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렸다. 그녀의 행위에 대해서 모든 제자들이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즉각 질책하였다. 그 이유는 자기가 관리할 돈에서 빠져 나갔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선한 일이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일이다(신 15:7-8, 10). 그것은 성도에게 합당한 선한 삶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선한 구제의 삶에 대해 반드시 갚아 주실 것이다. 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꾸어드리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갈라디아서 2:10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바울에게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과 더불어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일을 부탁하였고 바울도 그 일을 본래부터 힘써 행하고 있다고 증거하였다.

사도 요한은 유다가 이렇게 말한 이유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쳤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보다 돈에 관심이 있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보다 세상에 대한 욕심이 마음에 가득하였다. 교회 직분자는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딤전 3:3 전통사본, 8). 목사와 장로들은 재정을 포함하여 교회의 모든 일들에 책임을 가진다. 교회 재정은 성경에 교훈된 대로 전도와 구제를 위하여 바르고 정직하게 또 절약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교회 재정을 잘못 관리하고 함부로 쓰면 하나님께 큰 벌을 받을 것이다.

[요 12:7-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葬事)할 날(τὴν ἡμέραν)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를 질책하는 가룟 유다를 향해서, 예수께서 가만 두라고 말씀하셨다(7절). 예수는 마리아의 행동을 장사할 날(the day of my burial)을 위한 것으로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를 위한 비용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예수께서 가난한 자와 자기를 비교하셨다. 마이어 박사는 독일 교회가 교회가 자선 단체로 전락되어 가는 것으로 분석하며 비판하였다고 마이어 주석을 번역한 송다니엘 목사가 평가하였다(마이어, 538).

세상에는 가난한 자들이 항상 있을 것이므로, 가난한 자들을 도울 기회는 항상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며칠 후 죽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그때까지 아마 마리아가 부은 것과 같은 그런 값비싼 향유를 발라보신 적이 없으셨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향유를 바를 만큼 귀한 분이 있으시다면, 예수님이 바로 그 분이시다! 예수님보다 더 귀한 분은 세상에 없다. 실상, 인간은 값비싼 향유를 바를 만큼 그렇게 고상한 존재가 아니다. 돈의 여유가 있으면 그런 것을 바를 수 있다. 그것이 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과분한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용해야 할 것이다. 마리아는 분명 예수께서 그의 값비싼 향유보다 더 귀한 분이심을 알았다. 예수께서는 그의 형제 나사로의 생명의 은인이셨다. 마리아는 또 예수께서 자기 자신의 생명의 구주이심을 믿었을 것이다. 아마 그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마리아는 예수님을 바로 알았고 그를 믿고 섬기며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났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의 죽음도 믿음으로 믿고 수용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선한 일,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까지는 관심을 둔다. 교회는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을 필수적으로 한다. 그러나 사도들도 구제를 자기 사역에서 빼고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도록 선택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를 믿는 것, 생명의 양식으로 사는 것이다.

둘째,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 구제하는 일을 부정하지 않으신다. 구제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뜻이며,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일은 선한 일이요 우리가 힘써야 할 의무이다. 우리는 이기적이게 살지 말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며 살아야 한다.

셋째, 돈은 정직하게 벌어야 한다. 우리는 정당하게 수고하지 않고 남의 것들을 훔치거나 불의하게 돈을 벌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잠언 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우리는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해 돈을 버는 자가 되어야 하며 또 번 돈을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절약적이게 써야 한다.

넷째, 우리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돈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향유를 바르시기에 합당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은 참된 교회와 복음을 위해 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돈을 쓰자. 또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가장 귀한 보화를 사용하자. 마리아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매우 귀한 향유를 주께 부어드린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몸과 재능, 시간, 물질,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참된 교회의 건립과 확장을 위해, 그리고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일을 위해 바치자.

요 12:9-19절, 나사로 까닭에

[요 12:9-11절] [그러므로](원문)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謀議)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ὅτι πολλοὶ δι’ αὐτὸν ὑπῆγον τῶν Ἰουδαίων καὶ ἐπίστευον εἰς τὸν Ἰησοῦν.).

유대인들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계신 곳에 모여왔다. 그것은 단지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고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었다. 나사로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큰 은혜 즉 죽었다가 살아난 은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도구가 되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증거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증거는 예수를 거부하는 무리에겐 동일한 원수가 되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려는 모의에서 나사로도 포함되었다.

왜냐하면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가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고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는 도구가 되었지만, 악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뿐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베들레헴에 태어난 메시아 소식을 듣고서 경배하지 않았고(마 2장), 나사로를 살린 표적을 보면서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를 믿는 자들을 떼어놓려고 예수와 나사로까지 제거하려고 하였다. 성령훼방죄는 자기만 믿지 않을뿐더러 믿으려는 자까지 미혹하며 떼어내는 자이다. 그것도 주의 이름을 앞세워서 한다. 성령훼방죄의 기본은 이단인데, 공식적으로 공언된 이단과 함께 정죄되지 않고 숨어서 활동하는 이단이다.

[요 12:12-13절] 그 이튿날에는 명절(the feast)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Hosanna!)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Blessed is the king of Israel!”).

그 이튿날에는 유월절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ἐν ὀνόματι Κυρίου)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다. 종려나무는 기쁨의 상징이다. 그들은 ‘호산나’를 외쳤다. ‘호산나’는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시편 118:22-25는 이렇게 말한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이것은 메시아 예언시이다. 무리들이 예수님에 대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말한 것은 시편의 말씀과 연결한 것이다. 시편 118편은 여호와께 구원을 구하였다. 이들은 예수께 향하여 ‘호산나(도우소서)’라고 외쳤는데, 그들은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 의미가 시편의 말씀임을 밝히고 있다.

사도 요한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흔들었다고 정확하게 기술하였다.

[요 12:14-16절]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사도 요한이 인용한 구약성경은 스가랴 9:9, 사 35:4, 40:9이었다. 다른 복음서들에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 둘을 보내어 한 나귀새끼를 빌려오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위해 나귀 한 마리도 없으셨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의 참 소유주이시다. 그는 지금 겸손하게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다. 제자들은 처음에 스가랴의 예언이 예수님께 대한 것임을 알지 못했으나 그가 영광을 얻으신 후에 즉 그가 부활하신 후에 그것이 예수님에 대해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다. 루터는 알렉산더와 어린 나귀를 비교하였다. 다윗은 예루살렘 입성할 때 노새를 타고 입성하였다(왕상 1:38). 예루살렘에 어린 나귀로 입성한 군주는 십자가에서 죽으며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시다. 알렉산더는 철갑의 위용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지만 그의 왕국은 찢기고 흔적이 없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정신은 유지되지만 그의 이름은 정복자들이 가로채어 자기 이름을 세운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구주의 이름을 높인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성령을 보낸 신 뒤)에 깨달았다(16절).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영광을 받으 신 후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모두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에 충족된 수준이다(참고 요 21장).

[요 12:17-18절] [그러므로](원문)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들은 계속 증거하였다. 그런 까닭에 무리들은 예수님을 맞았다(went out to meet him).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 즉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 행하셨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리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며 영접하였고 호산나 찬송을 불렀던 것이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했을 것이다. 또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을 본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그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증거하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가 예루살렘에 들어오심을 환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환영을 받으신 것은 그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추가적 증거이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소식을 듣고 예수 앞으로 나왔다. 그 사실을 본 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함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우리는 성경의 진실한 증언들을 통해 예수님을 확신하고 환영하고 그를 사랑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증거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성경은 죄인들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어 구원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죄인들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확신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누구든지 마음을 열고 성경을 연구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그들도 우리들처럼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도록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다만 우리는 표적을 근거로 증거하지 않고 인격과 온유와 절제로 증거한다. 표적을 내세워 증거하는 방식에는 소극적이어야 한다.

[요 12:19절] [그러므로](원문)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표적으로 예수를 믿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바리새인들은 서로 자포가지가 될 정도였다. 막아도 예수를 믿는 무리를 막을 수 없었다. 땅의 방법으로도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굴복된 상태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를 믿는 것과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성령으로 가능하다. 예수께 직접 교육을 받으며 경험한 제자들도 당시에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 믿음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복음과 성령의 역사이다. 우리는 그 증거를 성경에서 찾는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확신한다. 나사로 까닭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듯이, 성경은 많은 증인들의 증언들이다. 당시에는 예수에 대한 즉각적인 증거, 표적의 증거로 예수께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표적이 아닌 확실하고 합리적인 언어로 구성된 방식으로 전파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섬김과 사랑의 언어로 명확하게 예수를 증언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나사로의 기적을 본 자들은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증거했다. 성경을 깨닫고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구주 예수님을 소개하고 증거하자. 전도는 하나님의 뜻이며 죄인 구원의 방법이다.

요 12:20-27절,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심

[요 12:20-23절] 명절(the feast)에 예배하러(to worship)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some Greeks)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to Philip, who was from Bethsaida in Galilee)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Κύριε, Sir)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Andrew and Philip)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人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Ἐλήλυθεν ἡ ὥρα ἵνα δοξασθῇ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유월절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중에 헬라인 몇이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ὁ σεβόμενος, 경건한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φοβούμενοι τὸν θεόν, 행 13:26)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예수를 뵈옵기를 청하였다. 빌립(Pillip)은 알렉산더의 아버지 이름으로 헬라식 이름이다. 빌립은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말하였다(21-22절). 참고로 안드레는 터키와 러시아 지엮까지 선교 활동을 하였고, 러시아 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세워졌다. 빌립과 안드레는 터키 지역에서 함께 사역하였다. 마이어 박사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빌립과 안드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제시하였다(마이어, 555).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에 대해서 마이어 박사는 현대 독일 신학, 정치신학에서 십자가 앞에서 무력한 예수(Ohnmacht Jesu)의 초상에 대한 반대되는 문장으로 밝혔다. 그들은 예수께서 헬라인의 면담 신청을 거부하였다고 분석한다. 마이어 박사는 29절과 모순된다고 밝혔다(마이어, 555). 헬라인이 예수를 만난 것은 구약성경이 예언한 바대로 이방인들이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음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때가 왔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즉 헬라인들의 방문은 이방인들의 구원의 때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뜻이며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내용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후 성령의 강림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주 예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기까지 낮아지셨을 때 아버지께서는 그를 무덤에서 다시 살리셔서 그를 높이실 것이며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굴복하게 하실 것이다(빌 2:9-11).

인자는 단 7:13에 따른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이다. 그런데 종교사학파에서는 이 인자를 구름타고 오시는 이로 제시하며 초림이 아닌 재림에 위치시킨다. 그러나 마이어 박사는 초림 예수에 배치하고 있다. 예수께서 하늘에서 오신 인자이시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는 수동형으로 십자가에 못 박하심이며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심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인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고, 아들이 영광을 받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경이로운 교환(Great Exchange, Wondrous Exchange)이다. 참고로 ”놀라운 교환“이 언제부턴가 십자가의 고통과 우리의 고통의 교환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발생하였다.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II)도 wondrous exchange–admirabile commercium를 그의 15주년 기념식에서 그러한 취지로 발언하였다. 그러 최초 발언자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는 삼위일체 신비를 고백하는 어휘로 사용하였다.

[요 12:24-25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ἐὰν μὴ ὁ κόκκος τοῦ σίτου πεσὼν εἰς τὴν γῆν ἀποθάνῃ, αὐτὸς μόνος μένει· ἐὰν δὲ ἀποθάνῃ, πολὺν καρπὸν φέρει(24절). 생명, '조에'(zoe), '비오스'(bios), '프쉬케'(psyche);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조에와 비오스는 대립으로 나온다. 프쉬케는 생물학적 숨이고, 비오스는 생명보다는 생활, 삶, 세상 생활로 볼 수 있고, 조에는 프쉬케와 비오스와 다른 부여받은 생명이다. 하나님께서 부여받은 생명이 영생이다. 영생은 ζωὴν αἰώνιον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심기우지 않고 창고 속에 있으면 한 알 그대로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심기어 썩으면 거기에서 싹이 나고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이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인류 구원의 사역도 이와 같다. 그는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죽음의 길로 가신다. 예수께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으시고 버리심으로 영생을 가져오셨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33).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가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가치를 바로 알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고난과 핍박을 당하며 심지어 순교를 당하며 끝까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사람이 자기 생명을 미워하면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말씀하셨다(anyone who hates their life(ψυχὴν) in this world will keep it for eternal life(εἰς ζωὴν αἰώνιον), 25절). 사람이 자기 생명을 미워할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가치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자신의 인간적 조건과 환경적 조건을 초월하는 믿음이 참 믿음이다. 그런 믿음을 굳게 가지고 끝까지 견디는 자는 영생에 이를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는 확실히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6:25에서도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요 12: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Whoever serves me must follow me; and where I am, my servant also will be. My Father will honor the one who serves me. ἐὰν ἐμοί τις διακονῇ, ἐμοὶ ἀκολουθείτω, καὶ ὅπου εἰμὶ ἐγὼ, ἐκεῖ καὶ ὁ διάκονος ὁ ἐμὸς ἔσται· ἐάν τις ἐμοὶ διακονῇ, τιμήσει αὐτὸν ὁ Πατήρ.

예수께서 즉각적으로 자기를 드러내셨다. 예수를 섬기는 자는 예수를 따랐을 것이다. 그는 예수가 계신 곳에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한 편 강도에게 하신 말씀과 같다. 예수를 섬기는 자는 아버지께서 저를 귀하게 여기신다.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1세기 유대인들이 섬겼다면 예수를 따랐을 것이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할말을 잃었음에도 예수를 섬기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자기를 섬기고 따르라”고 주장하셨다.

예수께서는 또 자기를 진실히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두 가지 복된 약속을 하신다. 하나는 그를 섬기는 자들이 그가 계신 곳 즉 천국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자들은 장차 천국에 들어갈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런 확신을 가지고 고난도 즐거이 참았다(히 10:34-35; 벧후 1:10-11).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을 귀히 여기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고 우리를 불러 그를 믿고 섬기는 자가 되게 하셨지만, 우리가 그를 진실히 믿고 섬기며 따른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기뻐하시고 더 사랑하시고 더 귀히 여기실 것이다(요 14:21).

[요 12:27절] 지금 내 마음이 민망(憫惘)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예수께서 마음이 민망해 하셨다(Now my soul is troubled, 27절).

예수께서 아버지께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Father, save me from this hour’)”라는 문장은 매우 민감한 문장이다. 마이어 박사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와 연결하며, 주기도문의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와 연결하였다(마이어, 560).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꺼려하였다거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였다고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 죽음을 위해서 오신 분이 죽음 앞에서 죽음을 피하는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십자가 앞에 있는 우리를 위한 체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곧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증거하셨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 길로 즐거이 가려는 결심을 보이셨다. 그는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께서 한 알의 썩는 밀알로 자신을 가리켰다. 예수께서 한 알의 밀처럼 죽으시기 위해, 즉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그 죽음도 가장 비참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것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 많은 죄인들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셨다. 그는 한 알의 밀처럼 죽으셨고 많은 열매를 맺으셨다.

둘째,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자들은 그를 본받고 따라야 한다. 그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우리가 그를 알고 그를 믿고 그를 사랑하며 그를 섬긴다면, 우리는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적 목숨을 미워하고 영생과 천국을 얻기를 소원해야 한다. 세상의 삶과 천국의 삶은 비교할 수 없이 큰 가치의 차이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은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과 천국만을 바라며 따르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좋은 밭에 뿌려진 씨처럼, 좋은 포도나무 가지처럼,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셋째, 예수님의 길을 결코 쉽지 않지만, 예수를 믿는 자는 그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예수를 믿는 자가 그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 때문이다.

요 12:28-36절,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요 12:28-31절]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榮光)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雨雷)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天使)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예수께서 대답(對答)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이제 이 세상의 심판(世上의 審判)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다(28절). 아들은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 가장 합당한 기도이다.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왔다(참고 변화산의 음성은 세 제자만 들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하늘 소리는 무리에게 들렸다(28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영광스럽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I have glorified it, and will glorify it again, 28절).

하늘에서 들린 소리를 무리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소리의 목적에 대해서 예수께서 “너희를 위한(pro vobis)” 것이라고 하셨다(31절). 십자가 죽음에서 세상과 세상 임금이 심판받으며 쫓겨날 것이다(31절).

그때 하늘에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우뢰소리나 천사의 음성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은 무리들로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 즉 예수께서 장차 죽으실 일의 목적을 깨닫게 하기 위하심이었다. 하나님의 이름은 어떻게 영광스럽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자들을 구원하시고 죄인들을 심판하심으로써이다.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케 함으로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을 지옥 형벌로부터 건져내어 주심으로써 또 이제는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게 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를 미워하고 대적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벌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 특히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통해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원 사역을 통해 더욱 그렇게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31절)고 말씀하셨다. 세상은 어둠과 죽음이고, 세상 임금은 어둠의 정사이다. 구주 예수께서 택자들의 모든 죄를 대신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그들의 죄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실 때에 그는 사탄의 권세를 심판하시고 정복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마귀의 궤계는 실패하였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전도하고 돌아와 보고하는 70인 전도자들에게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말씀하셨고(눅 10:18), 또 요한계시록에도 “큰 용이 [하늘에서]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말했다(계 12:9).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천국에서 내어쫓길 것이고 마지막 날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마 25:41; 계 20:10).

[요 12:32-33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는 말씀은 자신이 어떤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신다. 그는 요한복음 3:14에서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人子)도 들려야 하리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8:28에서는 “너희는 인자(人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암시하심이었다.

또 예수께서는 “내가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셨다. 원문에서는 ‘내가’라는 말(카고)이 강조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려고 택하신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구원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남김 없이 다 구원하실 것이다. 그는 요한복음 6:39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사람은 자기에게로 이끄실 것이다. 그것은 죽음으로 세우신 언약이기 때문이다.

[요 12:34-36절]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人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人子)는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구약성경은 메시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시 110:4), ‘영존하시는 아버지’와 영원한 왕(사 9:6, 7)이라고도 말하였지만, 또 메시아께서 찔림과 상함을 당하시고 속건제물이 되실 것(사 53장), 곧 그가 사람으로서 속죄제물로 죽으실 것도 예언하였다.

그런데 1세기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계신다(시 89:36)고 하는데,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이해하지 못하였다(34절). 그들은 예수의 증거와 하늘의 음성에도 자기들의 율법 견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견해가 구약성경에 근거하지만, 구약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포괄할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에는 메시아의 영원한 다스림과 메시아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한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왕국의 영원성을 믿는다. 그러나 인자가 대속물로 죽으심도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35-36절)” 성경에서 빛은 지식과 의와 기쁨을 상징한다. 반면에, 어두움은 무지와 죄악과 슬픔을 상징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빛으로 오신 자기를 믿으라고 촉구하셨다(Believe in the light while you have the light, 36절). 신자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따르는 동안에는 어두움이 그를 붙잡지 못할 것이다. 혹 죄에 잠시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두움 가운데 다니는 자는 자신의 길을 알지 못하다가 결국 멸망하고 만다.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어야 한다.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빛을 믿지 않았을 뿐만 죽이려는 마음이 있었다. 예수께서 그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서 숨으셨다(36절). 예수께서 죽으시려고 오셨지만 숨으시며 죽음의 자리로 가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세상의 임금인 사탄에게 결정적 타격을 줄 것이다. 사탄은 하늘에서 쫓겨나고 장차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파하실 것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의 구원 사역이 실제로 시작되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택자들의 구속(救贖)을 다 이루셨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2천년 동안 온 세계에서 충만히 이루어졌다. 온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았다.

셋째, 죄인들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유대인들은 육신이 되신 하나님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말씀하셨다. 계시가 충죽된 이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는 없다. 복음전파를 막는 권세는 이 땅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 구원의 문은 열려 있기 때문에, 구원받으라는 부르심을 들었을 때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노아의 방주문이 닫히고 40일 간의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듯이, 구원의 문이 닫힐 때가 올 것이다. 더 이상 복음을 들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믿을 만한 때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요 12:37-50절, 이스라엘의 불신: 예수를 결코 믿지 않음

[요 12:37절] 이렇게 많은 표적(標蹟, signs)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예수께서는 유대인들 앞에서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다. 요한복음은 2장에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한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을, 4장에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쳐주신 것을, 5장에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을, 6장에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것과 그 밤에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을, 9장에 예루살렘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쳐주신 것을, 11장에 베다니에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것 등을 증거했다. 이 외에도 예수께서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고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20:30에서 그 사실을 증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기적들을 유대인들 가운데서 또 그들 앞에서 행하셨고 그들은 이 모든 일들을 잘 알고 있었고(행 2:22), 그들은 실상 그것들의 증인들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의 많은 표적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지 않았다. 유대인에게 표적은 참 선지자의 증거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선물을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표적 신앙은 완전하지 않다. 믿음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어떤 기적을 보거나 경험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기적을 인정하지만 기적주의는 아니다. 계몽철학과 자유주의는 기적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은사주의에서는 기적으로 신앙을 추구하는 기적주의이다. 기적이 구원의 동기가 될 수는 있으나 사람의 구원은 기적 경험 없이도 이루어진다. 기독교 2천년의 확장의 역사는 기적의 역사가 아니고 복음을 통한 구원의 역사이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기 때문에, 믿음은 단지 기적을 보거나 체험함으로 생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생긴다. 사람은 기적을 보거나 체험함이 없어도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그러하다(엡 2:8-9). 심지어 기적을 행해도 믿음이 없이 불법을 행하다가 심판 날에 멸망당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마 7:22-23).

믿음은 단지 기적을 보거나

체험함으로 생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생긴다.

[요 12:38-41절] 이는 선지자(先知者)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完固)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유대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은 성경에서 예언하였다(사 12:13-15). 사람들이 선지자의 전한 바를 믿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고 그들로 회개하지 못하게 하셨고 그들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하나님의 심판 중에 아주 무서운 심판의 하나는 버리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긍휼과 은혜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버려두시면 사람이 그에게로 돌아갈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 유대인들처럼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할 것이다.

[요 12:42-43절] 그러나 관원 중(官員 中, the authorities)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Pharisees)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黜會, 회당에서 쫓겨남, put out of the synagogue]를 당(當)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榮光, glory/praise, 칭찬(KJV, NIV)이나 인정(NASB)]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출회[회당에서 쫓겨나는 것] 곧 출교는 모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특권과 혜택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사람의 칭찬이나 인정을 하나님의 칭찬이나 인정보다 더 사랑하였다. 그들의 믿음은 비겁하고 비굴하며 불완전하였다. 그들이 참으로 구원받을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10:32-33). 참 신앙은 인간적, 세상적 조건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순종하는 믿음이다(눅 14:26-27, 33).

[요 12:44-46절]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를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자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εἶπεν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ἐμὲ οὐ πιστεύει εἰς ἐμὲ ἀλλὰ εἰς τὸν πέμψαντά με, Then Jesus cried out, “Whoever believes in me does not believe in me only, but in the one who sent me, 44절). 즉 예수를 보는 자는 예수를 보내신 자를 보는 것이다(45절). 또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 빛은 하나님을 아는 진리의 지식과 의(義)와 기쁨과 생명이다. 반면에 어둠은 무지와 죄와 슬픔과 죽음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고 또 하나님의 의와 기쁨과 생명을 얻는다.

[요 12:47-50절]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審判)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命令이 永生)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기를 믿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47절). 그러나 마지막 날, 곧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의 날에 예수께서 선언하신 그 진리의 말씀들이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다(48절).

예수께서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때에 자의로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말하신 것으로 심판하신다. 영생은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말씀, 아버지의 뜻은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사람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 참 믿음은 기적 체험을 통해 오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많은 기적을 직접 보았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되었고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인간이 예수님 믿고 구원 얻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사람은 기적이 없어도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오늘날도 사람은 기적을 보거나 체험함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

둘째,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뿐 아니라, 주님으로 믿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의 칭찬과 인정보다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이 세상의 부귀 영화와 권세와 명예는 참으로 헛되다. 우리는 세상의 헛된 것들을 버리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을 소망해야 한다. 참된 신앙은 자기를 부정하고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가장 귀한 보화보다 더 귀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 관원들처럼 세상의 것들 때문에 방해받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고 고백하고 시인하고 그를 사랑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교훈을 행하는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죄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을 믿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한다. 즉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식과 의와 기쁨 가운데 거하며 영생을 얻는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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