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2:1절]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懇切)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念慮)하노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분이시므로’라는 뜻이다. ‘모든 들은 것(to what we have heard)’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가리킨다. 히브리서 1장의 내용을 개략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그의 본체(실체)의 형상이시며 그를 통하여 모든 세계가 창조되었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셨으며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고 만유의 후사”이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하시는 일 곧 창조와 섭리의 일을 하시고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와 영광을 누리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들은 이 모든 진리들을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한다. 더욱 간절히 삼간다(the most careful attention)에서, ‘삼간다’는 원어(프로세코)는 ‘주의한다. 주목한다’는 뜻이다. ‘더욱 간절히’라는 말은 강조하는 말이다. 삼간다는 주의와 주목이 함께 있는 의미이다. 삼가는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긍정 의미이다.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는 말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이라는 뜻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들은 것에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배운 많은 성경 진리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주의하고 주목해야 한다. 영생을 결정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이다.

[히 2:2-4절] [이는]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堅固)하게 되어 모든 범죄(犯罪, παράβασις)함과 순종(順從)치 아니함이 공변된[公遍, 공의로운, ἔνδικον] 보응(報應)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救援을 等閑)히 여기면 어찌 피(避)하리요![피할까 함이라.]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標蹟)들과 기사(奇事)들과 여러 가지 능력(能力)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본문은 우리가 모든 들은 것을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할 이유를 말한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the message spoken by angels)’은 구약시대에 주신 율법들을 가리킨다(김효성). 견고한(βέβαιος, binding-구속력이 있는, stedfast-변함없는)은 관용적 표현으로 “성취된다”는 의미이다(루터). “천사들로 하신 말씀”에 대해서 벗어남(transgression)과 불순종(disobedience)함으로 공적으로 보응을 받았다(2절).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한 행태가 정당하다고 밝혔다. 유대인들에게는 분통을 줄만한 선언이다. 그러나 냉혹하게 수용해야 할 하나님의 계시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해석에 의해 가변적이나 상황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절대 가치를 갖는다.

유대의 멸망과 그리스도의 도래는 매우 독특한 배치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이같이 큰 구원’(3절)이라고 말한 것은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구원이며 죄사함과 영생을 주시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이스라엘의 근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왕국의 주권이 여호와께 있다. 그 주인이 오심으로 형식적 이스라엘의 기능은 종료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신 주 하나님을 경솔하게 여기는 것은 여호와의 백성으로 합당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으로 자기 뜻과 성령(through signs, wonders, various miracles, and gifts of the Holy Spirit)을 나눠주셨다(4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유효한 것은 성령의 사역이지만, 주께서 표적과 기사와 기적과 능력을 보여주셨다. 이 문장의 특징은 하나님(God)이 한 것인데, 나타나는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이다. 그리고 매우 짧지만 그의 의지(αὐτοῦ θέλησιν, his will)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협약(pactum salutis)와 관련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결코 잃어버리지 않은 선한목자로서 아들이시다. 루터는 “자기 뜻”에서 “우리의 뜻이 없다”는 것을 제시한다.

본문은 이 구원의 확실함에 대해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 이 구원은 처음에 주(主)로 말씀하신 바이다. 구원의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하신 내용이다.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둘째, 이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이다. ‘들은 자들’은 주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따랐던 제자들을 가리킨다. 히브리서 저자가 ‘들은 자들’과 ‘우리’를 구별한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제자들에게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 예수께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은 구원의 복음을 확증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직접 보았던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셋째, 하나님께서 기적들과 초자연적 은사들로 함께 증거하셨다.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기적을 표현하는 세 단어이다. 표적(sign)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어떤 진리를 확증하심을 보인다. 기사(奇事, wonder)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줌을 나타내고, 또 능력(power)은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보인다. 또 ‘성령의 나눠주신 것’이라는 말은 성령의 은사들, 특히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즉 방언, 예언, 병 고침, 기적 행함 등을 가리킨다. ‘자기 뜻을 따라’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눠주심을 의미한다. 기적들과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시는 수단들이었다.

[히 2:5-9: 천사가 아닌 예수께 복종하여 예수를 믿음]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人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간(暫間)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暫間)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χάριτι Θεοῦ)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휘페르 판토스)[각 사람을 위하여](관사가 없을 때)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 잠간(暫間)과 잠시(暫時). 잠시잠간(暫時暫間), 당분간(當分間)이다. 暫時(잠시) '잠깐의 때'(잠시간[暫時間])로 얼마 되지 않는 동안. 暫間(잠간) 매우 짧은 동안. 우리말에서는 '잠깐'으로 발음함. 정재도(한말글연구회)는 잠깐과 잠간으로 연결하는 것을 극구 부정하였다.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은 구약 시대가 종료되고(세례 요한) 새로운 시대(하나님의 나라의 도래, 그리스도 왕국의 실현)이다. 본문에 인용된 시편 8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존귀케 창조하셨음을 노래한 시이다. 본문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인해 잠시 천사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으나 결국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을 의미한다.

‘잠깐(a little while)’이라는 원어(브라퀴)는 ‘잠시’ 혹은 ‘조금’이라는 뜻이다(7절). 시편 8편 4-6절의 인자를 예수께 지목하며, 저(당신)를 천사보다 못하게 만드셨다(7절). 인자께서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 완성을 히브리서 기자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었다고 하였다(you crowned him with glory and honor, 7절).

본래 성자 하나님은 만유의 창조주로 통치자이셨지만, 고난을 통과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후(보좌 우편에 앉으심)에는 만유의 통치를 명확하게 현시하셨다(8절). 그러므로 누구도 변명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았다(he might taste death for everyone, 9절). ‘맛보다’는 ‘먹음(eat)’이 아니지만 그 가치를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가치를 몸소 하신다. 체휼(sympathize, 히 4:15), 위격적 감내인데, 신성에 고난이 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칼빈은 ‘달콤함(suavitas)’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였다. 예수께서는 고난과 죽음의 맛을 보았고, 그의 자녀들은 복음의 달콤함을 맛본다.

[히 2:10절] 만물이 인因하고(디 호 타 판타)[만물이 그 분 때문에 있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 만물이 인(因)하고 ->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라는 개역개정은 좋은 번역이 아니다. 인하여는 원인을 의미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있음이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라는 말씀은 인자, 성자 하나님께서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킨다. ‘많은 아들들(many sons to glory)’은 택함 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리킨다. 구원의 목표는 영광 곧 죄가 없는 상태로 그의 이름만 영광인 상태이다.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다(should make the founder of their salvation perfect through suffering.)”는 말은 구원의 주(ἀρχηγὸν)는 “구원의 창시자”(the author, the founder)로 개정하여 번역하였다(참고 히 12:2). 루터는 암브로시스가 “구원의 인도자”라는 것을 선호하는 것을 밝혔다. “구원의 원인”, “구원의 왕자와 우두머리” 등으로 이해된다. 구원의 창시자는 구원을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원으로 인도하며 완전케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의 구원은 주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서 완전함(perfect)을 가져왔다. 단순한 명령으로 구원을 실현시킨 것이 아니라 몸소 고난을 받으심으로 의를 충족시키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 어느 곳에서도 우리의 구원을 막을 수 없으며 꺾을 수 없다.

[히 2:11-13절] 거룩하게 하시는 자(the One)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those)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예수님이시며,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성도들이다(11절). ‘다 하나에서 났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우리와 같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셨다(마 28:10; 요 20:17: 롬 8:29). 메시아 예언시인 시편 22:22에서도 성도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또 ‘내가 그를[하나님을] 의지하리라’는 말씀도 그의 인성의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심을 보인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는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친구라고, 제자라고 부르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배반이다.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며 선포하였다.

12절은 시 22:22 LXX(70인경)을 글자 대로의 인용하였다. 다윗은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the congregation)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하였다. 히브리서 기자는 담대하게 다윗과 함께 “주의 이름(το όνομά σου, your name)”을 형제들에게 선포하였다. 사도는 주의 이름을 εκκλησίας에 찬송하겠다고 밝혔는데, ‘교회’가 아닌 ‘회중’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는 구약의 다윗과 신약의 사도들과 동일한 고백이며 계승이다.

13절은 사 8:17 LXX를 인용한 것이다. 루터는 시 22:22과 사 8:17-18절을 모호한 방법으로 인용하였다고 하였다. 그것은 크리소스톰도 그렇게 생각하였는데, 그 이유는 “성부의 입장”으로 해석한 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성자”께로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께서 다윗이 자기를 주라고 고백한 것을 밝히셨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마 22:45).

히브리서 기자는 이사야 선지자가 고백한 “내가 그를 의뢰하리라”를 반복하였다. 다윗의 고백과 이사야의 고백을 반복한 것이다. 이 본문에서 1인칭을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1인칭은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한 다윗과 이사야이다. 루터는 나(이사야)와 하나님의 자녀는 율법 시대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때를 기다림으로 제시하였다. 그런데 그 시대(혈육의 시대)가 종료된 것은 지시하신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히 2:14-16절] 자녀들은 혈육(flesh and blood)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the power of death)을 잡은 자 곧 마귀(the devil)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free)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the offspring of Abraham)을 붙들어(helps) 주려 하심이라.

자녀들은 혈육, 율법에 속하였다(14절). 그런데 그 혈육 이스라엘에서 한 모양으로 하나님께서 혈육, 유다인으로 오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거주하시며 죽음을 맞이하셨고,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궤멸시키셨다. 죽음의 세력 아래에서 종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천사가 아닌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드시는 것이다(16절).

죄의 삯인 죽음(사망)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에게 압박이고 두려움이다. 현대인은 탁월한 인간성으로 죽음을 담담하게 수용하는 생명의 가치를 낮게 하는 것으로 대체시키기도 한다. 죽음이 생명과 함께 혼재는 우리의 삶의 구조는 슬픔이고 부조리이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합당하게 벗어나는 것은 인간의 자구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방도뿐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독생자,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두려움에서 자유를 주신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된 자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구주께서 사망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구원하신다.

첫째, 구주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 곧 마귀를 잡으셨다. 마귀는 죄와 어두움의 권세자이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므로, 그는 또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이다.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지만 사망의 권세가 마귀에게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 동안 내어줌에 대한 제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자의 모든 죄와 그 형벌을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의 형체로 담당하여 죽으심으로 마귀의 권세를 파하셨다.

둘째, 구주의 죽으심은 죽음의 공포에서 일평생 종노릇하며 살던 모든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다.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일평생 죄와 돈과 마귀에게 종노릇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귀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주 예수를 믿는 것이며, 믿음으로 구원받아 죄에서 해방된다. 그의 이름은 주 예수의 전체이다.

[히 2:17-18절]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a merciful and faithful high priest)이 되어 백성의 죄(ἁμαρτίας)를 구속(救贖, ἱλάσκεσθαι, atonement)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담대하게 성자 하나님께서 형제들과 같이 되심을 고백하였다. 그것은 주께서 충성된 대제사장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구속하시는 길이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은 죽으실 뿐만 아니라 몸소 시험, 고난을 받으셔서, 시험과 고난에 있는 형제를 능히 도우신다(18절).

구약의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구속하지 않는다.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위하여 짐승 제물을 드려 속죄를 확증시키는 직무이다. 그러나 예수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직접 드려 속죄함으로(he might make atonement/propitiation-유화, 화목제물- for the sins of the people) 자기 백성이 은혜로 죄사함을 고백하며 확증하는 방식이다.

셋째, 구원을 위해서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救贖)하심이다. 예수님은 유다 지파이시지만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 대제사장이 되셨다. 예수를 대제사장이라고 부른 책은 히브리서가 유일하다. ‘구속(救贖)한다’고 번역된 원어(힐라스코마이)는 ‘유화(宥和)한다, 노를 누그러뜨린다’는 뜻이다. 성경적 속죄 개념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노를 누그러뜨린다는 뜻이 있다.

넷째, 주께서 구원을 이루실 때에 시험과 고난을 당하셨다. 주께서 많은 시험과 고난을 받으신 것은 택한 백성의 고난에서 도우심을 계시하신 것이다. 16절에 아브라함의 후손을 붙드심이라고 하였을 때, help라고 제시하였다. 18절에서 성도의 시험과 고난에서 도움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낮아지셔서 사람이 되셨고, 또 죄가 없으셨으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가난과 비천함, 모욕과 핍박과 비난, 고난과 죽음을 경험하셨고 특히 인간의 시험과 연약을 다 경험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우리를 도우시는 구주이심을 계시하셨다. 주께서 몸소 역사에서 현시하신 시험과 고난을 믿고 신자를 돕는 주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히브리서 2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이 크고 확실한 구원을 잘 보존해야 한다(1, 2절).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이루신 큰 구원이며 많은 증인들의 증거와 하나님 자신의 기적들과 은사들로 증거하신 확실한 구원이다. 우리가 아무리 귀한 보화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잘 보존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거나 도적을 맞는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귀한 보화일수록 보관을 잘해야 한다. 구원이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가치 있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귀에게 도적 맞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신앙생활은 사람편에서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고귀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주목하고 조심해야 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고난과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의 사역의 핵심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죄책과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대속의 죽음이었다. 그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하시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일평생 종노릇하며 살던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함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마귀의 권세는 파하여졌다. 우리의 모든 죄책과 죄의 형벌이 단번에 다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책과 죄의 형벌에서 해방되었다.

넷째, 우리의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친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많은 시험과 고난을 받는 그의 택한 백성들을 도우실 수 있다. 그는 친히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가난과 비천한 환경을 경험하셨고 사람들에게 모욕과 비난, 핍박과 고난을 받으셨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다. 그는 이 세상을 사는 우리를 친히 동정하시고 도우신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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