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선】 구원 이후, 이제 몸과의 싸움이다

  • 입력 2021.11.23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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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

이대희 목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Th. M).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성경학박사과정(D.Litt)을 졸업했다. 예장총회교육자원부 연구원과 서울장신대 교수와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그동안 성경학교와 신학교, 목회자와 교회교육 세미나와 강의등을 해오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에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평생말씀학교인 "예즈덤성경대학"을 20년째 교수하고 있으며 극동방송에서 "알기쉬운 기독교이해" "크리스천 가이드" "크리스천 습관과 인간관계" "재미있는 성경공부" "전도가 안된다구요"등 성경과 신앙생활 프로그램 담당했으며 다양한 직장 소그룹 성경공부 사역을 하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현장 사역 경험(소형.중형.대형교회,개척과 담임목회)과 연구를 토대로 300여권의 저서가 있으며 "이야기대화식 성경연구"와 "30분성경교재 시리즈"와 다양한 실천 프로그램을 제시한 저서(“유대인 밥상머리 자녀교육법” (2016년 세종도서 우수도서 ). “한국인을 위한 유대인공부법” (대만번역 출간), “유대인의 파르데스공부법“ 등 다수가 있다. 현재 꿈을주는교회 담임목사. 예즈덤성경교육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이대희 목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Th. M).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성경학박사과정(D.Litt)을 졸업했다. 예장총회교육자원부 연구원과 서울장신대 교수와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그동안 성경학교와 신학교, 목회자와 교회교육 세미나와 강의등을 해오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에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평생말씀학교인 "예즈덤성경대학"을 20년째 교수하고 있으며 극동방송에서 "알기쉬운 기독교이해" "크리스천 가이드" "크리스천 습관과 인간관계" "재미있는 성경공부" "전도가 안된다구요"등 성경과 신앙생활 프로그램 담당했으며 다양한 직장 소그룹 성경공부 사역을 하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현장 사역 경험(소형.중형.대형교회,개척과 담임목회)과 연구를 토대로 300여권의 저서가 있으며 "이야기대화식 성경연구"와 "30분성경교재 시리즈"와 다양한 실천 프로그램을 제시한 저서(“유대인 밥상머리 자녀교육법” (2016년 세종도서 우수도서 ). “한국인을 위한 유대인공부법” (대만번역 출간), “유대인의 파르데스공부법“ 등 다수가 있다. 현재 꿈을주는교회 담임목사. 예즈덤성경교육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는 그 다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다. 그것은 거저 받은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하며 남은 삶을 나를 위해 살지 말고 나를 구원 해주신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을 이미 죽은 우리는 이제 주님과 함께 새 사람으로서 사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향하는 삶의 목표다(6:8)

죄가 더 이상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그것은 몸의 사욕을 따르지 않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몸을 불의의 무기로 죄에 내어 주지 말고 하나님에게 우리의 몸을 드리며 적극적으로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헌신하는데 있다. 얼마나 나의 몸을 드리느냐에 믿음과 인생의 성패가 달려 있다. 이것을 위해 지금부터는 마음으로 순종에 머무는 것이 아닌 몸으로까지 순종이 이어지는 일이다. 이것은 육신대로 사는 것이 아닌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을 몸을 살리는 일에 시간과 물질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다. 영으로 구원 받았지만 육신은 아직도 온전하게 구원을 받지 않았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우리의 구원 받은 이후의 과제는 어떻게 하면 연약한 육신이 사망과 죄의 종으로 살게 하는 유혹을 이길 수 있느냐이다. 즉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느냐에 달려있다.(8:13)

 

구원 이후, 우리의 과제는?

이렇게 보면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간단하게 정리가 된다. 영으로서 사는 것이지만 실제는 몸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위해 사느냐에 삶의 핵심이 있다. 더 이상 죄에 우리의 몸이 지배를 당하지 않고 구원 받은 몸으로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하는데 사실 이것이 가장 힘들다. 죽음 앞에 까지 놓지 말아야 할 평생 과제다. 우리는 여전히 육신의 일을 생각하며 이전에 하던 옛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유혹에 넘어간다. 마음은 원하지 않는데 나도 모르게 육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몸이 움직인다. 마음과 몸이 따로 산다. 바울처럼 늘 마음속에는 원하지 않는 그것을 행하는 갈등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이 내가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가 아닌 죄가 하는 것이다. 우리 속에 어쩔 수 없는 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영적 싸움을 싸워야 승리할 수 있다.

나에게 변화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주범은 내안에 있는 죄다. 죄를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래서 힘들다. 죄에 미혹을 당하지 않으려면 먼저 죄를 영적으로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죄란 본질적으로 나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내 판단과 경험을 여전히 의존하고 그것을 나의 삶의 판단 기준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을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어야 죄를 이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죄악 된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을 말씀을 통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말이나 일에나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대부분 여기에서 넘어진다. 설사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해도 결정을 할 때는 몸의 유익을 쫒는다. 결국 몸에게 굴복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마음으로는 늘 원하지만 육신으로는 약하여 시험에 들게 된다. 세 명의 제자가 주님과 함께 기도하는 것을 마음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시험에 들었던 이유는 결국 육신과 몸을 이기지 못해서였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그렇게 살기로 다짐을 한다. 매주일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눈물도 흘리고 감격도 하고 다짐도 한다. 집회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고 인생의 새로운 결단을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세상에 돌아오면 여전히 예전처럼 육신의 삶을 산다. 마음은 하나님에게 향해 있지만 몸은 세상에 지배를 당하고 있다. 이렇게 양쪽을 오가면서 수십 년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 선데이 크리스천들의 삶이 이것을 반복한다. 그러다 보니 주일에 듣는 말씀은 위로와 축복과 구원의 확신과 중생과 심판과 부활 등 복음의 원리에 집중한다. 그것을 수백 번 반복한다.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초보 어린아이 신앙이라고 정의했다. (6:1-2)

매주일 예배 시간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는가? 설교자와 성도들은 모두 말씀을 듣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 다음은 거의 없다. 그 말씀대로 세상에서 지키고 행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그것까지 돌보는 목회자가 얼마나 될까?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구체적인 매뉴얼을 만들어 체크하고 서로 돌보고 권면하는 일을 성도들은 얼마하고 있는지?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힘써 기도하고 서로 돌아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에도 거의 교회는 예배당에 모여 설교 듣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것을 넘어서야 하는데 이것이 힘들다. 그것은 몸이 움직여야 하는 해산의 수고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편하게 신앙생활 하려는 게으름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이것에 빠지면 결국은 한순간에 신앙이 무너진다. 이것을 이기기 위해서는 몸의 훈련을 하고 말씀을 지켜 행하는 주체인 몸을 만들어야 한다. 말씀을 지키는 몸을 만드는 훈련을 해야 한다.

신앙 생활이란,

말씀을 지키는 몸을 만드는 훈련

결국 영보다 몸이 문제다. 영으로 몸을 어떻게 죽여서 그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영적 예배의 삶으로 나가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죽은 것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어떻게 행할 수 있는지, 몸이 말씀의 자리에 오고 예배당에 나오고 성도와 교제하고 모임에 적극 참여하고 세상에 나가서 이웃을 섬기는 행동에 우리의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프로그램과 매뉴얼이 필요하다. 소그룹도 이것을 위해서 운영되어야 한다. 실천을 위해서는 몸이 죽어야 하는데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고 각자에게 맞는 맞춤형 신앙실천 지침이 제시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성도 각각을 위한 가르침과 권면과 돌봄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은 세상으로 향하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몸을 드리기 어렵다. 구원 받은 자의 삶은 결국 어떻게 몸을 말씀과 일치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 점에서 구원 받은 이후의 삶은 좁은 길이다. 자기를 쳐서 몸을 복종하지 않고는 십자가를 질수 없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가짜 구원이다. 십자가를 포기하고 그것을 거부하는 구원과 복음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니다. 지금 내가 받은 구원과 복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자. 살아 있는 복음인지? 아니면 죽은 복음인지? 수십 년 지났음에도 여전히 마음으로만 있고 몸으로 드러나지 않는 복음은 구원을 줄 수 없는 내가 만든 복음일수 있다.

부활은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몸이 다시 산 것이다. 부활은 몸이 부활한 것이다. 몸이 없는 부활은 부활이 아니다. 지금 영만 있고 몸이 없는 신앙생활은 아닌지 점검해보자. 예배당에서 예배만 드리고 썰물처럼 빠져 세상으로 흘러가는 신앙은 영으로만 믿는 신앙일수 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서 몸으로 드리는 영적예배는 관심이 없다. 어떻게 나를 가정과 직장과 일터에서 산제물로 드려 하나님을 예배 할수 있는지 고민이 없다면, 그것을 도전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대로 살다가 다시 주일에 예배당에 모이는 신앙이라면 정말 부활을 믿는지도 점검해야 한다. 한 주간에 나는 얼마나 거룩한 몸으로 부활의 증인으로서 드려지는지를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이것이 정리 안 된 상태에서 오늘 죽음을 맞이한다면 어쩌면 주님 앞에 설 때 주님은 나를 도무지 모른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때 받을 충격을 생각해 본다면 오늘 하루는 엄청 중요한 하루다. 칠일 후에 방주의 문이 닫혀 심판이 임하면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의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somthing like this would happen)”처럼 하나님 앞에서 이런 비참한 한숨을 짓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몸이 없는 부활은

부활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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