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구목사, 아사셀 예수(레16:20-22)

  • 입력 2021.12.04 13:50
  • 수정 2021.12.04 14:01
글자 크기
프린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피흘림과 죄사함

최성구목사

인간의 불행은 죄와 연관성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죄를 짓고는 아무리 돈이 많고 행복한 조건 속에 산다고 할지라도 불행의 그림자가 항상 따라 다닙니다.

죄란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것입니다. 죄란 헬라어로 하말티아하나님의 과녁을 빗나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어긋난 길로 가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그 죄가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져오고 이웃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그리고 죄가 얼마나 끈질긴지 한번 붙으면 떨어지기 어렵습니다. 죄의 전염은 우리 모두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렇기에 죄는 덮어둘 것이 아니라, 청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일 년 중 하루를 자기들의 살아온 모습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청하는 날로 대속죄 일을 정했습니다. 유대교 달력으로 710일에 거행되는 이 의례는 유대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전례입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 중 단 하루, 바로 이 날에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아론이 대 속죄일 예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그 절차가 복잡하고 장엄합니다.

우선 이 제사를 집례할 대제사장과 대제사장을 도울 9명의 예식 위원인 일반 제사장은 일주일 전에 집을 떠나 제사를 지낼 성소로 이동을 합니다. 그리고 대 속죄일 전날은 대제사장과 예식 위원들은 잠을 자지 않고 철야를 합니다.

이때 혹시나 거룩한 일에 책임을 맡은 대제사장이 밤중에 졸지는 않을까 하여 9명의 젊은 제사장들이 옆에서 번갈아 가며 책을 읽어줍니다. 그래도 혹 졸기라도 하면 옆에서 소리를 내서 어떻게든 졸지 않도록 합니다. 드디어 대 속죄일 아침이 되면 목욕을 하고 세마포 흰 옷으로 갈아입고 속죄의 예식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제 첫 번째로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대제사장이 행하는 대 속죄일의 첫 업무는 자기와 예식 위원과 집안 사람들의 죄를 위해 두 마리의 수송아지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사죄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는 속죄제 염소이고 다른 하나는 아사셀 염소입니다.

이제 백성들의 속죄를 위한 예식을 위해 두 마리의 염소를 성소의 문 앞에 놓고 제비뽑기를 합니다. 항아리 속의 제비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라는 글과 아사셀을 위하여 라는 글이 새겨진 돌이 두 개 들어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 앞에서 항아리를 흔든 뒤, 두 손을 넣고 한 손에 하나씩 제비를 집어 두 마리의 염소 머리 위에 놓습니다. 이때 여호와를 위하여라는 제비가 뽑힌 염소는 그 목에 붉은 천을 매고, 아사셀을 위하여 라는 제비가 뽑힌 염소는 그 뿔에 붉은 천을 매어줍니다. 속죄제 염소는 그 목에 붉은 천을 둘러 표시해 두고, 아사셀 염소는 그 뿔에 붉은 천을 묶어 표시해 둡니다.

이제 제사 위원들이 수송아지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안수를 함으로 자기와 예식을 드리는 모든 백성들의 모든 죄를 그 숫염소에게 전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자손이 저지른 온갖 악행과 반역 행위와 모든 죄를 다 자백합니다.

그런 다음 그 염소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손에 맡겨 빈들로 데려 갑니다. 그 숫염소는 아사셀에게 바치는 제물입니다. ‘아사셀이란 염소를 뜻하는 에르제거하다, 없애다를 뜻하는 아젤이라는 말이 결합되어 죄를 없애는 염소입니다. 아사셀 양 희생은 유목민들이 거친 장소를 지날 때 위험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염소를 바치던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아사셀 숫염소는 산 채로 회막 앞에 두었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추방되어서 무인지경인 광야로 내어 보냅니다. 제사장이 그 염소를 끌고 광야로 멀리 나갑니다. 붉은 천이 눈에 잘 뜨이기 때문에 멀리 떠나가는 모습을 백성들이 볼 수 있습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먼 곳 즉 백성들이 사는 진영으로 도저히 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면 제사장은 그 염소를 그냥 내 버려두고 돌아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속죄일에 아사셀 염소를 광야에 내어 주고 사탄에게 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절벽에서 떨어트려 죽였다고 합니다.

그 염소가 시야에서 아주 멀어지면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가 사라졌도다!” 그러면 백성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가 사라졌도다!”라고 하는 일종의 시각적 설교(Visual Sermon)입니다. 아사셀 염소가 죄와 함께 사라지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자기 선민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죄를 제거하시고 거룩하고 성결한 백성이 되게 속죄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대속의 의미는 단순히 죄를 대신하는 게 아니고 백성들의 죄가 사해지고 죄가 아주 멀리 떠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늘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며 삽니다. 그래서 삶이 버겁습니다. 늘 비교하고 견주며 서로의 무게를 달아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화가 필요합니다. 이 염소에게 죄를 전가하는 의식은 그런 의미에서 삶을 갱신하는 집단적 정화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사셀에게 보내는 숫염소의 머리에 자기들의 죄를 전가함으로써 옛 삶과 단절하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식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같은 생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문제를 공적으로 해결할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숫염소의 머리에 죄를 전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들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 통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도 있어야 합니다. 이 대속죄일의 의식은 성찰과 통회와 결심, 이것이 바로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수송아지의 피를 뿌리기 위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속죄소 동쪽인 성소의 입구에 뿌리고, 속죄소 위에 일곱 번 뿌리고(14), 제단 귀퉁이 뿔들에 바릅니다(18). 속죄소 위와 앞쪽에 피를 뿌리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반드시 속죄의 피를 요구하신다는 사실과, 오직 피로써만 죄인의 속죄가 가능함을 상징합니다(09:22).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벧전1:2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하여서 성도는 피뿌림을 입은 자들임을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피를 뿌림으로 우리의 죄를 사함 받고 새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를 숫염소에게 전가하여 피뿌림을 받고도 옛날의 죄의 삶을 계속한다면 그처럼 무가치 일은 없을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죄를 전가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생존경쟁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 내면에 쌓이는 적대감, 분노, 미움을 처리하지 못할 때 우리는 병든 사람이 됩니다. 그런 감정을 해소할 능력이 없기에 우리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퍼붓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그 갈등은 사회적 분쟁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희생양 만들기문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전염병을 신의 저주라고 생각하여 신의 노여움을 풀어드리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곤 했습니다. 중세의 마녀 사냥이나 유대인 박해가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겪는 불행의 원인을 다른 누군가에게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대개 희생양으로 선택되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약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폭력을 가해자들에게 되돌려줄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향로를 들고 번제단으로 가지고 갈 불씨를 담는 동안 예식 위원들은 수송아지를 잡고 받아 놓은 피가 응고되지 않도록 그릇을 계속 흔들어 줍니다. 이제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서 향로를 기초석 위에 놓고 향을 얹어 그 향연(香煙)이 지성소를 채우게 합니다. 그리고 휘장 밖 성소로 나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립니다.


, 여호와 하나님, 나는 불의를 저지르고, 죄를 지었습니다. 나를 도우는 예식 위원들과 나의 집이 그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구하오니 나와, 예식 위원과, 나의 집이 지은 모든 불의와 죄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정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면 위원들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를 잡아서 그 피를 그릇에 받아 지성소에 들어가서 수송아지의 피를 뿌렸던 것처럼 동일하게 피를 뿌립니다. 이렇게 피를 뿌리는 이유를 레16:16에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들이 범한 모든 죄로 말미암아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 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와 자기 집안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의미에서 수소를 잡아 속죄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런 후에 제단에 피어 있는 숯을 향로에 가득 담고, 두 손 가득 향가루를 떠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 향가루를 숯에 뿌려 향 타는 연기가 증거궤 위의 덮개를 가리도록 했습니다.


다음은 수소의 피를 받아다가 덮개 주위에 뿌립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백성들이 바친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휘장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그것을 덮개 너머와 덮개 앞에 뿌렸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소를 성결하게 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은 회막과 제단까지 성결하게 하는 의식을 집행했습니다. 이런 조심스런 의례의 집행이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대제사장의 몸짓 하나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함에 얼마나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지, 그리고 죄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성경에는 거룩함을 잘못 다루었다가 죽은 사람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아론의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명하신 것과 다른 금지된 불을 담아 향을 피웠다가 죽었습니다(10:1-2).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신 수레를 몰던 웃사는 하나님의 언약궤에 손을 댔다가 죽었습니다(삼하6:6-7). 웃시야 왕은 분향단에 분향하려다가 문둥병자가 되었습니다(대하26:19).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성찬식을 잘못된 마음으로 행함으로 죽은 사람이 있다(고전11:27-30)고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과는 다른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23:27-29에 속죄일에는 하루 동안 어떤 일도 하지 못하며, 단식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속죄일은 이스라엘 민족들의 범죄(금송아지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모세가 첫 번째 받았던 십계명을 깨뜨려 버리고, 자복과 회개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된 이스라엘 민족들을 위해서, 두 번째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오던 날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대신하여 죽는다는 것, 그것이 비록 짐승이라 해도 그것을 보면서 우리 마음이 깊은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은 다양해서 그 일을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바라보면 신비 아닌 것이 없고, 그 신비 앞에서 경외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 의례는 우리를 그런 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자인 셈입니다.


정교회나 가톨릭교회의 의례는 우리와 다릅니다. 사제들이 입는 복장, 성만찬을 집전하는 모습, 향을 피워 흔드는 모습 등은 개신교인들에게 매우 낯선 광경입니다. 하지만 그 의례에 참여하는 이들은 그 시간을 매우 소중하게 경험합니다. 구경꾼들에게는 낯설지만, 참여자들에게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시간입니다.


개신교의 말씀과 카돌릭의 의식 속에서 우리는 생각할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문 밖으로 나가는 아사셀 숫염소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사셀 염소는 대속을 통해 죄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완전히 사라지시는 것과 같이 죽으셨습니다. 대속은 죄를 대신하는 것은 물론이고 동시에 죄를 제거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사셀 염소, 죄와 함께 사라지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는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1:29) 하고 증언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지워줘서가 아니라 스스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죄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을 사랑한 것 밖에 없습니다.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귀신을 내쫓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외톨이가 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스스로 더러운 사람이라는 생각에 안으로만 움츠러드는 사람들을 품어 준 것이 죄라면 예수님은 과연 큰 죄인입니다.

세상에 그보다 더 큰 죄인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실체가 폭로되고 기득권이 침해될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공모하여 그에게 죽음을 선고했습니다. 피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런 고통을 피하려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발적으로 세상의 모든 모순과 폭력을 짊어지심으로 그런 폭력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드러내셨습니다.

폭력은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만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심으로 폭력의 고리를 사랑으로 끊으셨습니다. 죽음조차도 증오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예수님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다 대속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고백 이후에도 삶이 달라지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신앙과 삶이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속의 은총을 경험한 분들은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죄나 허물이나 모순을 전가 시킬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을 짊어져야 합니다. 모든 잘못을 내 탓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대속을 믿는 성도에게 모든 죄를 사해 주십니다.

103:l2~13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동과 서는 절대로 만날 수 없게 서로 멀리 있습니다. 이 의식은 죄가 아사셀의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멀리 떠나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아사셀 염소는 죄와 함께 사라지는 십자가는 대속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죄를 대신 한 것으로 죄가 완전히 떠나버린 겁니다.

우리 모두가 아사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죄와, 사망과, 모든 고통과 결별하며 승리의 인생을 살다가 저 천국에 당당히 들어가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