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천일목사의 만나 사랑방


교회란 - 케이빌더 조 [교회를 알면 교회가 산다] -


초대교회의 모습은, 사람들이 모였던 장소를 말한다면 개인 집이나 핍박을 피한 지하 묘지 카타콤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교회는 건물 중심의 교회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이 교회요, 교회 된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가리켜 지역 명칭을 붙여서 교회라고 한 것뿐이다. 건물에 교회란 간판을 내걸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건물이 교회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 것이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된 교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회복은 건물이 아니라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구별하여 선택하신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온전한 교회가 될 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편지로 살아가는 자들이 교회입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로 -김영봉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설정되면 물질적인 복은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가 없다. 없어도 있는 것처럼, 있어도 없는 것처럼 살 수 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안에서 그분의 소명을 이루어 가는 사람에게 물질적인 문제는 부차적인 관심일 뿐이다.

그는 소비가 아니라 절제에서, ‘축제가 아니라 나눔에서, ‘풍요가 아니라 가난에서 기쁨을 찾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충분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주변 환경에 의해서 넘어짐이 적습니다. 물질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운 생활이 됩니다. 물질을 좇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물질 위에 서 있습니다. 소유를 따라 살아가면 자기 인생의 걸음이 분주해집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됨과 나의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늘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고 살핍니다.

 


송길원의 요즘생각 일사일언 - 돌봄의 선순환


어린 시절, 먼지를 휘날리며 버스가 신작로를 달린다. 내 아버지가 손을 든다. 엄청나게 큰 차가 멈춰 선다. 내 아버지가 그렇게 위대해 보일 수 없었다.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내 아버지는 손만 들면 차가 멈추어 선다.”

그런 내 믿음이 무너진 것은 오래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작은 차(택시)가 내 아버지를 무시하고 달리는 것을 보았다. 지금은 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내 아버지·어머니를 아예 피한다. 마음이 짠하다. 두 분 다 교통 약자(弱者). 어디 교통만 약자인가? 관광(觀光)이란 말 그대로 빛()을 보는() 것이다. 두 분은 스물여섯 평 아파트에 늘 갇혀 사시니 관광에도 약자다. 관광 약자!

이런 이가 한둘인가? 무려 765만 노인 인구가 잠재적 약자다. 25만 암 환우와 소아암을 앓는 16000여 아동이 있다. 온종일 사방의 하얀 벽과 똑똑 떨어지는 링거 주사액을 쳐다보고 있을 마음이 어떨까? 그들을 돌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앰뷸런스 소원재단이 만들어졌다. 생애 마지막 소원 나들이를 도와주는 봉사 단체다. 준비 작업만 1년 넘게 걸렸다. 상호 등록부터 제동이 걸렸다. 차량 구조 변경도 쉽지 않았다. 경광등은 아예 달 수 도 없었다. 그들을 싣고 달리다 생길 위급 상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드디어 지난해 11월 첫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소원은 거창하지 않았다. 노을을 보는 일, 단풍놀이, 커피 기행, 세족식(洗足式), 고궁 나들이, 미술관 관람, 서울 야경 구경. 대부분 가족 여행을 원했다. 개중에는 나훈아 공연 관람도 있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소원재단은 단순한 나들이에 그치지 않고 인생 샷도 찍어드린다. 인생 라스트신이다. 감동이 물결친다. 정작 더 감동하는 건 봉사대원들이다.

우리의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기적이다. 내일이 아닌 오늘을 더 좋은 날로 만들어야 할 이유를 배웠다고 한다. 무엇보다 가족의 소중함을 더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나는 이제야 세상 이치 하나를 터득했다.

모든 인생은 피보호자로 태어난다. 보호자의 보호와 돌봄으로 자란 내가 어느 날 보호자가 된다. 이번에는 피보호자가 나의 돌봄으로 새로운 삶으로 피어난다. ‘돌봄의 순환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규칙이다.

 


줄어드는 수한(壽限)의 의미 - 새길 만나 -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창세기 257-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창세기 3528-29)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야곱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창세기 4728-29)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 하였더라”(창세기 5026)

사람의 수한이 점진적으로 줄어드는 현상을 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의 외아들 이삭은 각각 백칠십오 세와 백팔십세를 살았습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이 백사십칠 세,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이 백십세를 살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생애를 성경을 통하여 살펴보면 아브라함과 이삭은 우유부단하고 유약하며 겁도 많고 그래서 실수도 잦았던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느리면서도 여유로운 성품으로 가능하면 다툼을 피하며 유화적인 생을 살았다고 봅니다.

이에 반하여 야곱은 얼마나 치열하고 고단하게 살았습니까. 아버지 이삭과 쌍둥이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은 후에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해 밧단 아람으로 도망가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이십 년을 죽을 고생을 하면서 네 명의 아내와 열두 아들과 딸 하나를 얻었고 이후에도 평탄한 날이 없다 할 만큼 그렇게 모질게 살았습니다. 야곱의 생은 그야말로 밤낮없이 모든 상황과 현실에 맞서 온몸으로 부딪치며 머리를 굴리고 짜내면서 지독하게 살지 않았습니까?

요셉은 또 어떻습니까? 나이 열일곱에 형들의 시기를 받아 노예로 팔리고 십삼 년 동안 애굽의 권력자의 집에서 종으로 살다 무고하게 옥살이도 하고 선을 베풀고도 기대를 저버린 자들에게 얼마나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살았습니까. 말이 총리지 이방 나라인 애굽 왕 바로에 버금가는 권력자로 탁월한 행정력을 앞세워 국가의 위기 상황을 반전시켜 태평성대를 유지하며 신임을 독차지하는 동안 요셉을 시기하는 주변 대적자들의 암투와 권모술수는 얼마나 많았을까요.

남들이 알 수 없는 외로움과 때로 엄습하는 두려움에, 그 고난과 고뇌의 세월을 과연 누가 헤아려 알아 저를 진정으로 위로하고 힘이 되어 주었겠습니까순간순간 처절하게 부르짖으며 의지하여 공급받는 하늘의 위로와 주의 능하신 손이 함께 하시는 은혜를 힘입지 않고서야 그런 삶을 살았으며, 생애의 정점에서 어찌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권속들까지 책임지겠다며 관용의 극치를 보일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이 형들 앞에서 수십 년을 마음에 품었던 회한의 눈물로 쏟으며 한 용서와 화해의 말을 과연 그 누가 쉽게 할 수 있을까요.

 


(창세기 5018-21)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겪는 희로애락을 온전히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신앙의 깊은 경지에 이르러, 이 환란의 시대를 지나며 날카롭게 모난 성질을 숨기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여유와 기품 있는 삶을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전도서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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