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획일적으로 읽지 말고, 이야기 중심으로 읽어야”

 

본헤럴드는 지난 30년간 오로지 성경교육에만 매진한 이대희 목사를 초청해 3일 되새김 성경통독 학교성경관통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3차에 걸친 세미나에서 이대희 목사의 세미나 내용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핵심을 소개해본다.

1차 세미나 : 창세기~열왕기 (51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깨어진 우리들을 다시 다듬고 빚어가는 시간이 성경통독이다. ‘성경통독이란 말에서 우리는 먼저 통()이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1. 어째서 통()인가?

()이라는 단어 중 대표적으로 대통령을 떠올릴 수 있다. 대통령(大統領)이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대통령은 크게 통치하는 사람이자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사람이고 통합을 이루는 사람이다.

소통을 지도자의 중요한 덕으로 본 조선시대 과거 시험 평가의 기준도 소통(小桶)이었다. 그래서 평가점수를 대통(大通), (), 약통(略通), 조통(粗通), 불통(不通)으로 나누었다.

성경에서도 통()은 중요했다. 왕은 누구보다 하나님과 소통할 줄 알아야 했다. 사울 왕과 다윗 왕 솔로몬 왕의 성패는 하나님과 소통에 있었다. 하나님과 맞는 사람이 결국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다. 인생에서 하나님과 통()하는 방법은 말씀을 통()하는 것이다. 교회 생활도 소통과 연관이 있다. 성도는 하나님과 소통도 중요하지만, 성도간의 소통도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성도가 세상과 소통이 되어야 전도도 이뤄진다.

 

2. 말씀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의 구조를 따라 읽지 않는다. 즉 우리는 너무 헬레니즘 방식의 성경읽기에 익숙해졌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러다보니 성경과 대화가 안 된다. 성경의 배경인 헤브라이즘 방식의 성경읽기가 중요하다. 헬라인은 깨닫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현대인은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성경을 읽는다. 하지만 히브리인은 행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다. 또한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자신이 필요한 부분만 보니까 잘못된 이단에 빠지기도 한다.

 

3. 성경을 전체(-)로 봐야한다.

그렇다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그 구조를 이해하면서 봐야 한다. 구약성경(크나크) 구조는 토라라고 불리는 모세오경은 핵심 원리이고, 그것을 감싸는 것이 느비임은 역사서와 예언서로서 해석이며, 시편과 같은 성문서는 삶에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을 일반 서적 읽듯이 쭉 읽어 가면 안 된다. 원리-해석-적용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예수님이 구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말씀이 시편인 것을 보면 예수님도 하나님 말씀을 적용하며 살아간 삶의 고백을 중요하게 여기신 것으로 알 수 있다.

한국교회는 성경의 흐름을 고려하지 않고 장수를 기준으로 획일적으로 끊어서 성경읽기를 했다. 하지만 바른 방법은 성경을 장면을 중심으로 읽는 것이다. 장면을 중심으로 성경을 읽다보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또한 실천을 목적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

 

4. 하나님 나라의 원형과 파괴

성경은 창세기부터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그것은 원역사와 족장이야기다. 원역사는 인류 역사의 이야기이고 족장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세상을 관리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사람을 만든 이야기는 3장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습과 부모를 떠나 가정을 세우는 과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간의 타락의 모습은 11장 바벨탑 사건까지 계속된다. 창세기 1~2장을 한 단락으로 3~11장까지를 또 하나의 단락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중심으로 성경을 읽어가야 한다.

 

5. 족장시대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족장시대는 아브라함의 신앙의 원리가 후손들로 이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계속 확장되어 요셉에게 이어지는 것이다.

 

6. 민족형성시대(하나님나라의 기초와 형성)

출애굽기 1장도 믿음의 족장 이야기의 연속이다. 출애굽기는 아브라함의 꿈을 만들어가는 민족의 이야기다. 아브라함을 갈대아에서 뽑아낸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끌어내는 것이다. 그들을 끌어내기 위한 10재앙은 유월절 사건을 통해 절정을 이룬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유월절과 홍해를 통해 구원받은 그들은 시내산까지 이르는 과정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한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죄성을 죽이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그들은 결국 가데스바네아에서 10명의 정탐꾼의 부정적인 보고를 들으면서 출애굽 1세대의 전멸을 맞게 된다. 출애굽 40년은 출애굽 1세대인 약 40만 명이 꾸준히 죽어가는 상황이었다. 하루에 1000명씩 죽는 꼴이다.

광야시대 2개의 기둥은 율법과 성막이다. 율법은 죄인된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고 성막은 스스로 할 수 없는 죄인이 용서를 받는 것이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아야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은 말씀과 교회를 주셨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죽이는 것이다.(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처럼 원리를 알면 그것을 적용해야하는데 그것이 바로 역사서이다.

역사서의 중심에 레위기가 있다. 중심에 있다는 것은 그것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레위기의 핵심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이다. 율법서는 우리를 돌아보는 거울이다.

 

7. 하나님 나라 모형의 실패(분열왕국시대~포로귀환)

이스라엘의 살아가는 방식은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그들이 출애굽하고 가나안에 정착까지 하나님은 나만 보고 따르라는 것을 요청하신다.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땅을 분배한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원리를 점점 잊게 되면서 사사기 시대를 맞이한다. 사사기는 하나님이 친히 지도자 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왕을 끊임없이 요청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왕을 주신다. 어떤 왕을 주시는가? 하나님만이 참 왕임을 인정하는 자를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신다는 것이다. 그 왕은 왕이지만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므로 역대기부터 사무엘서의 중심은 다윗이고 다윗과 같은 왕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온전히 모신 표상으로 다윗은 예수님의 계보로 이어지게 된다.

 

2차 세미나 : 이사야~아가서 (524)

어째서 되새김이라 표현했는가? 그것은 성경은 날마다 우리가 되새기면서 그 분의 말씀을 상고하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하나님 나라 모형의 실패 (분열왕국시대, 포로시대, 포로귀환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역사 속에서 잘 이해하지 못할 때 선지자가 나타나서 깨닫고 적용하도록 이끌어 준다. 성경야기의 동선은 약속()-사람()-시간()-공간() 으로 이뤄진다. 토라의 길은 가인의 길과 아벨의 길이 있다. 가인의 길은 불순종으로 사망과 저주로 이어지고 아벨의 길은 순종으로 생명과 축복으로 이어진다.

이스라엘의 역사서는 예언서다. 예언서는 전기예언서와 후기예언서로 나뉜다. 전기예언서가 역사서이고 후기예언서가 예언서다. 하나님이 이끄신 역사는 예언된 역사다. 역사서의 중심에도 여전히 하나님에 순종한 다윗이 중심이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역사서도 신명기역사와 역대기역사로 나눌 수 있다. 다윗은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언약의 사람이며, 역사의 중심이다. 그러나 다윗은 밧세바 사건을 통해 모든 것을 다 잃게 된다. 언약을 받았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분열왕국시대는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서 발생하게 된다. 북왕국의 오므리와 예후왕조는 악한 왕조였다. 남유다는 다윗의 길을 따랐지만, 북이스라엘은 언약을 버리게 된다. 우리도 이 시대 넘어지지만 다시 말씀을 붙잡고 가면 된다.

이사야를 통해서 선지서를 보면 쉽게 이해된다. 이사야 1~39장까지는 구약, 이사야 40~66장 까지가 신약이다. 이사야는 구약의 사람이지만 성경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이 후 모든 선지자들의 공통적인 메시지는 주의 날이다. 주의 날은 심판의 날을 의미하며, 이스라엘 백성도 심판하지만, 다른 모든 민족과 국가들도 심판한다. 이사야는 남은자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완성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서도 남은 자들이 나온다. 그들은 불순종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뜻을 붙잡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끝까지 한 사람을 찾고자 하셨다. 어째서 서기관, 제사장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들이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나? 그것은 그들이 자기 생각으로 성경을 읽었기 때문이다. 결국 예레미야는 말씀을 가지고 있지만, 자기 뜻대로 해석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다니엘에서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4명의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바벨론을 이기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기간을 통해 그들은 탈무드라는 위대한 유산을 만들었다. 이스라엘은 어디에 있든지 이스라엘이었다. 그들에게는 토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 한 곳에 매여있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매여 있는데 있다. 심판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찾는 계기가 된다.

말라기의 중요한 명령은 십일조의 명령이다. 십일조를 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말라기는 하나님의 경고장이다.

에스겔은 새성전이 나오는데, 여기서 회복된 성전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곳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모든 곳이 성소며, 성막이며 성전이 됨을 말하고 있다.

 

2. 하나님 나라를 소망(성문서 : 시와 찬양 기도, 그리고 묵상과 고백)

부흥은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본질로 돌아갈 때 부흥(Re.vival)이다. 그러므로 New가 아니라 Re가 중요하다. 포로 이후 돌아온 자들의 부흥을 일으킨 스룹바벨, 느헤미야, 에스라는 예배의 회복과 말씀 회복을 주도했다.

이스라엘은 가정에서 시작해서 가정으로 끝난다. 아담 이 후 세워진 가정은 깨어졌고 가정은 무너졌다. 그 후 느헤미야는 성경적 가정회복을 말한다. 가정에서 말씀이 파괴될 때 이스라엘이 무너졌다.

성문서는 지혜서와 시가서로 나눈다. 지혜서는 잠언, 욥기, 전도서이며 시가서는 시편과 아가이다. 성문서는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지 보여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사람을 모범삼아 따라가면 된다. 듣기만 하면 안 된다. 듣고 지키고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문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지키고 따른 사람들의 모범이다. 아가는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예수님으로 나온다.

지혜서의 잠언, 욥기, 전도서는 시간의 동선에 따라 각각 과거(잠언)-현재(욥기)-미래(전도서)로 볼 수 있다. 지혜서의 잠언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지혜를 주는 지침서다. 욥기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뜻 이해다. 그래서 욥기는 제3의 길이다. 욥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과정이다. 결국 하나님이 답이다. 전도서는 미래다. 미래는 우리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 뿐이다. 오늘을 사는 것이 미래를 사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최고의 만남이고 오늘 이 자리가 최고의 자리이며, 지금이 최고의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전도서다.

예수님이 가장 좋아했던 성경은 시편이다. 시편은 다윗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실천적인 삶의 모범이다. 성경을 암송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암송한 말씀을 소화해서 삶으로 나와야 한다.

 

3차 세미나 : 마태복음~요한계시록 (531)

1. 신구약 중간기에 대한 이해

사백 년의 침묵기간이 신구약의 중간기인데 그 중간기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약은 창세기1~2장의 되새김의 과정이다. 개혁은 새로운 것을 갖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회복하고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창조 이후 아브라함까지 400년의 공백이 있으며, 요셉 이후 또 다시 400년의 공백이 있고, 포로 이후 구약이 종료되고 신약이 세워지기까지 400년의 공백이 있다. 하나님의 부재속의 임재의 기간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어두운 400년 중간기가 지나고 있었다. 400년 중간기에는 또 다시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 거역한 자들을 흩어버리는 기간이었다. 이 때도 인간이 끊임없이 왕을 세우려는 시도가 있었다.

 

2. 하나님 나라 성취 (메시야의 도래, 복음서)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보면 성경전체가 예수그리스도가 이야기의 중심임을 알 수 있다. 구약은 약속이라면 신약은 성취다. 신약의 첫 시작은 예수님이 우리들의 왕으로 오셨음을 먼저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내려오시는 모습이 마태복음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세상의 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성경의 족보를 통해 우리들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며 사라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려면 예수님을 만나야하는데 하나님은 4명의 사람을 통해 만나 고백한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증언하게 하셨다.

마태는 유대인을 마가는 로마인을 누가는 헬라인을 요한은 세계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증언한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왕으로 말했고, 마가복음은 종으로 누가복음은 사람으로 요한복음은 하나님으로 말했다. 요한복음은 상당히 신학적이고 난해하며 마태복음은 신앙인들에게는 좀 쉬운 편이며, 마가복음은 비신자도 접근하기 쉽다. 누가복음이나 요한복음은 학문적인 이해도가 접근할 수 있다. 우리는 4복음의 균형 안에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의 팔복은 신명기 토라의 복으로 견줄 수 있다. 산상수훈의 명령은 예수님을 내가 받아들일 때 그 분이 내 안에서 이루어 가신다.

누가복음에서의 성령의 흐름은 사도행전으로 이어진다. 요한복음은 태초로 시작해서 종말로 끝난다. 4복음서를 읽으면서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가능하다.

 

3. 하나님 나라 적용 (사도행전, 서신서)

제자공동체(사복음서)에서 교회공동체로(사도행전-서신서)의 확장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복음서적인 제자를 세워야 한다. 제자가 잘 만들어질 때 전세계적으로 확장되는 교회가 될 수 있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교회라는 건물을 통해서 사람을 모으는 딜레마에 빠졌다. 성경적인 교회는 제자를 세우고 세상으로 확장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12명의 제자를 세우는데 집중해야 한다.

예루살렘교회의 확장은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핍박이후 이뤄진다. 하나님의 부흥은 하나님의 올곧은 제자를 통해서 전세계로 확장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복음은 제자들의 부활약속에서 이뤄진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를 만드는 것이 사도행전의 핵심이다.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제자로 만들 때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건물을 세우고 사람을 모으는 현대교회는 제자를 세우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왜 그런가? 제자로서의 삶보다는 지식으로만 알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준비된 사람을 제자로 세우는 과정이 바로 선교의 역사이고 과정이다.

각 지역에서 나타난 제자들의 활동이 바로 서신서다. 서신서는 각 지역과 교회 상황과 연관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내용이다. 여기서도 한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서 복음이 전파되는 내용이다.

 

4. 바울의 선교여행

1차 선교여행은 바울과 바나바가 구브로를 간다.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이다. 거기서 복음의 역사도 이루지만 어려움도 겪는다.

거기서 박수였던 바예수를 만나고 어려움을 당한다. 이 후 마가의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기도 한다. 이 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처음 복음을 전한다. 여기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다. 바울은 안식일날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다. 어째서 유대인이 모인 회당에 복음을 전했을까? 이것은 구약의 전통을 이어서 선교를 한다는 바울의 선교원칙이었다.

한국선교사들은 기존의 선교의 연속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새로 선교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지역에 대한 선교가 원활하지 못하다. 하지만 바울의 정신은 기존의 전통을 무시하지 않았다.

바울의 또 하나의 복음 전파의 원칙은 복음을 성경으로 설명했다는 것이다. 복음은 구약을 가지고 설명할 때 가장 옳다. 성경을 세상의 이야기로 푸는 것보다 성경으로 풀어가는 것이 맞다. 바울은 구약을 통해 복음을 설명했다.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위해 정리한 책이 갈라디아서이다. 갈라디아서를 볼 때 우리는 야고보서의 강조점을 같이 보며 균형을 맞추면 좋다. 갈라디아서는 믿음을 야고보서는 행위를 강조했다.

2차 선교여행은 1차 선교여행과 겹치는 동선이 발생한다. 이것은 선교는 확장이 아니라 기존에 복음이 전해진 곳에 제자들을 확실히 세우는데 있다. 또한 바울이 가고자 하는 곳이 아니라 성령께서 지시하는 곳으로 가는데 있다. 선교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선교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믿고 다른 문을 열어주시는 것을 보면 된다. 사도바울이 선교지를 돌아다니는 원리다. 바울은 철저히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동선에 순종했다.

로마서는 만나지 못한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쓴 편지다. 로마서는 대화방식으로 써졌다. 로마서는 교리서라고 이해하기 쉽지만, 사실은 양육서이다. 로마서는 묻고 답하는 구성으로 되어있다. 로마서는 이처럼 질문을 하고 더욱 깊이 들어가는 구조로 되어있다.

성경에서 교회를 향해 전후서가 있는 경우는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 교회인 경우다. 반면 개인에게 전후서를 쓴 경우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는 경우다. 고린도서는 눈물의 서신이다. 고린도서신을 공부하면 교회문제 해결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특히 복음의 핵심인 사랑이 나오는 고전13장은 교회문제 해결의 핵심이다. 또한 고린도후서에서는 바울이 자신이 고난일이 사도됨의 증거라고 말하고 있다. 서신서는 일종의 교회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이다.

 

5. 하나님 나라 완성 (요한계시록, 재림)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난 재앙은 애굽에 나타난 재앙을 모티브로 점점 확대되는 모습으로 보여진다. 인재앙-나팔재앙-대접재앙은 악을 행한 이방나라들을 향한 재앙을 의미한다. 또한 애굽의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보호가 임한 것처럼 재앙 속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된다.

요한계시록은 또한 이미 이긴 싸움에 서있는 성도들에게 비유와 은어로 담대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도 요한계시록으로 가정을 세울 때 자녀들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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