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목회자네트워크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는 한국교회는 코로나 이전 형태로 회복되기 위해 기독교의 본질, 교회의 본질을 깊이 묵상하고 성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세가지를 주목해야 한다. 첫째는 기독교 현상의 구조를 파악해야한다. 둘째는 ‘본질이다. 한국교회는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 많다, 재정 많으면 되고, 교회가 크면 된다는 식의 사고는 한국교회의 큰 짐이 된다. 셋째는 현안 문제만 가지고 씨름해서는 안된다. 기독교는 성서의 텍스트를 이해하는 종교이다.

강영안 교수는 먼저 팬데믹 상황에서 교회를 진단하고 그 대안적 방안을 제안했다

●진단


1)우리가 격고 있는 펜데믹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1)희랍비극의 작가들이 신을 설명하는 슬로건은 고통으로부터 배운다”(pathemata mathemata)는 관점이다. 끊임없는 고통을 통해서 학습의 과정을 배운다. 이것은 희랍 철학의 원천이 되었다. 고통은 끊임없이 한계를 인식하고 자기가 누구인지 깨달아가는 원천이다.

(2)희랍의 전통은 고통을 심판으로 본다.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기독교 우파는 이 상황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했다. 루터가 1527년 전염병 상황에서 지도자들이 도망을 가도 되는가?라는 설교에서 루터가 강조한 것은 전염병 상황에서 목사가 해야 할 것은 환자를 돌보며, 지키는 것이다. 자기보다 이웃사랑을 강조했다. 루터도 고통의 원인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기조를 깔고 있다.

(3)C.S. 루이스는 고통을 정화의 과정이며 완성의 과정으로 보았다. 고통은 우리를 하나님께 온전하게 받치도록 두 손 들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고통을 경험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고통은 일차적으로 자족하는 삶을 흔들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인식의 과정으로 생각했다고통은 치유의 과정이다. 고통을 통해 무엇인가 배우게 된다.


2)팬데믹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

우리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다시 던지는 계기가된다.


팬데믹의 특징은 이어짐이다. 모든 사회적(영적, 정신적, 관계적, 국가적, 경제적) 차원에서의 이어짐이다. 팬데믹의 고통은 한 사람이나 한국가나 한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적인 고통이다. 팬데믹은 세계화의 취약점이 들어났다. 미국이 하는 방역과 지도력을 보고 실망을 했다. 또한 부자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차이점, 세계질서속에서 불평등이 심각하다. 소상공, 자영업자들의 고통과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고통의 차이가 들어났다. 결국 공정과 정의의 문제가 들어났다.


3)교회와 신학이 다시 살아나려면 관심을 가져야할 지점이 무엇인지...


서양에서 패스트로 인해 죽어갈 때 중세 가톨릭 교황은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믿음으로 흑사병을 이기자고 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행진한다든지, 무조건 교회로 모이도록 했다. 이것은 집단 감염의 진원지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반면에 종교개혁자들은 사랑의 실천으로 종교개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이런 교회의 집단적 행동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교황도 바티칸에서 부활절 미사를 혼자 집전하는 것을 보았다.

팬데믹 상황에서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제도적 집단적 종교는 공적인 자리에서 종말을 고하고, 영적 갈증은 개인적 공간으로 남아있다.

찰스 테일러,,
찰스 테일러,,

찰스 테일러(C.M.Taylor, 1931.11.5.~)왜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는 것이 가능해졌는가?”를 두고, 신에서 벗어나게 된 인간의 세속화 과정을 탐구한다. 과거 중세에는 신을 믿지 않는 것이 상상하기 어려웠을 정도였지만, 현대인들은 신을 믿는 것을 하나의 선택으로 여긴다. 세속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종교개혁이 가장 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제도 종교에 종사하는 사제나 목사나 스님도 세속화의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 세속화된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종교를 인식할 때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종교로 보고 있다.

●팬데믹이후 엔데믹 상황에서 교회의 대안은

첫째는 이어짐에 대한 반성이다. 교회 공동체는 연결된 존재이다. 단순한 연결된 존재를 넘어서 타인과 연결하는 신학이 가능할까?

우리가 고백하는 신은 언약의 하나님이다.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란 홀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언제나 관계를 맺고, 언약을 맺는 하나님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함께 동행하는 하나님이다.

3:14이 교회가 지향해야할 신학적 모티브이다. 모세에게 자신을 보이신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이다. 우리가 지향해야할 신학은 이어짐과 연대의 신학이라고 본다. 배타적이고,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신학이나 신앙은 복음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도 없고, 삶의 방식이 다르다면 무조건 배타적으로 본다. 여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개인구원에서 한 발 더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우주적 구원으로 구원신학이 발전해야 한다.

신앙이란 한편에서는 침묵과 고독을 유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성도의 교제로 들어서야 한다. 나를 벗어나서 구원신학은 이웃과의 나눔, 정의. 환경, 책임의 문제 등을 고려해야 한다.

두 번째, 한국교회는 모이는데 열심히 한다. 주일날 모여서 예배드리는 교회이다. 팬데믹으로 인해 목회자들은 맨붕에 빠졌다. 모이는 데는 열심히 살았지만 흩어져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일상의 삶을 사는 것을 잘 하지 못했다.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강조했지만 흩어져서 타인과 관계를 통해서 희생과 섬김으로 살지 못한 것은 반성해야 한다.

세 번째, 한국교회가 사회 속에서 비춰진 모습은 해방이전과 이후가 크게 다르다. 해방이전에는 핍박받은 자의 모습에서 해방이후에는 이긴 자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때 이라크 파병에 대해 반대하는 모습에서 뚜렷한 현상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때부터 한국교회가 이긴 자의 모습으로 사회에 등장한다.

기계적인 종이 아닌 진짜 주님을 닮은 종의 신학이 자취를 감추고 군림하는 종의 모습으로 사회에 인식되고 있다. 서번트 리더십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과 동일하나, 종의 모습을 취했다. 이것이 서번트 리더십의 본질이다. 주님이 종의 모습으로 산 것은 오직 사랑이다.

예수그리스도가 보이신 종의 모습은 - 참된 지식, 능력, 통찰, 절대적 순종, 섬김 - 이다. 이것은 교회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종의 모습이다.

넷째, 팬데믹은 과학지식의 요구가 높아졌다. 과학지식과 영적 갈증 사이에 제도 교회는 놓여 있다. 영적갈증을 가진 분들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근본적인 질문앞에 답을 주어야 한다.

제도 교회는 공동체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기도회와 새로운 시야로 성경읽기,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섬길것인가? 세상으로 보냄 받은 교회로서 회복이 절실하다.

과학기술에 의존한 결과 세속문화에 나타난 현상은 포스트휴머니즘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은 기계나 약물에 의존하고 AI를 통한 인간 능력을 강화한다. 히틀러 시대 우생학이 강화된 것처럼, 더 강한 자, 더 효과적인 방식, 인간의 능력을 더 끌어 올리는 방법을 고안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공동체는 강한 자만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아니라 약한 자를 돌보고, 우는 자들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마지막 남기고 싶은 말씀이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는 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모든 슬픈자를 위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약한 자를 강하게 세워주고, 눈먼 자를 고치고, 죽을 자에게 생명을 주는 분이다.

이것이 가능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때 가능하다.

 

●질문/대답

지형은 목사: 기독교회사를 보면 교회다움을 실현하는 대안공동체운동이 일어났다. 사막공동체, 수도원공동체, 2차 세계대전이후 프란시스 쉐퍼(1912-1984) 박사가 이끌었던 라브리(불어, ‘피난처’) 공동체, 방선기 목사가 한국 교회에 소개한 프랑스 개신교 공동체인 미션 디모데운동, 미국 세이비어 교회, 가톨릭과 개신교를 아우르는 국제 떼제 공동체는 등은 기독교의 본질 회복 운동이다. 오늘이라는 자리에서 한국교회를 갱신할 대안적인 공동체의 사례가 있다면....

강영안 박사 대답: 한국교회에 대안적 공동체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어느 정도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교단신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윗세대보다 젊은 목회자들이 게토화 되고 있다. 저에게 비추어진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모습이다. 이 장벽을 깰 때 신학도 목회도 발전된다.

신학교수들과 교회지도자들은 교회쇄신을 위해서 몸부림쳐야 한다. 예수님처럼 삶으로 무브 먼트를 일으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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