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의 위기 현상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종교, 인종, 문화를 배경으로 한 극단적 민족주의의 대립이 무섭고 질기다. 지역의 정치 군사적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을 축으로 벌어지는 힘의 갈등과 군비 확장이 심히 위험하다. 하나뿐인 지구 행성의 환경 문제와 직결된 기후 변화는 생존을 위협하는 현재진행형 현실이다. 경제 및 군사 강대국을 중심으로 진행돼 온 신자유주의적 세계 경제 구조의 한계가 명확한데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류가 걸어갈 21세기 역사에 대한 윤리 도덕적 가치의 혼돈이 당혹스럽다.
1. 현실 속의 교회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문제는 점점 더 촘촘하게 짜여가는 이런 문제 상황과 뗄 수 없이 연결돼 있다. 여러 가지 갈등으로 얽힌 한국 사회의 상황도 이 안에서 몸부림하고 있다. 오늘날의 이런 세계 상황 안에서 이천 년을 걸어온 ‘거룩한 공교회’라는 명제는 무엇인가? 거룩한 공교회에 근거하여 사회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쳐야 할 ‘교회의 사회적 공공성’이란 명제는 무엇인가?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종종 자신이 믿는 신앙의 명제가 현실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자괴감을 느끼며 당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 한가운데서도 교회는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주님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대로 이 땅에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현존과 더 나은 전망을 확신해야 한다. 교회는 창조 이래 존재하는 모든 것과 역사를 이끌어온 하나님의 섭리적 동력이다. 한스 큉은 이렇게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힘으로 신앙인에게는 인간의 삶과 활동만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을 위해서도, 인류의 발전사만이 아니라 고난사를 위해서도 궁극 의미가 주어져 있다. 요컨대,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이 말씀과 행동과 운명으로써 ‘감히 해도 된다’Du darfst!고 초대하고 ‘마땅히 해야 한다’Du sollst!고 호출하며 ‘능히 할 수 있다’Du kannst!고 독려하는 새로운 인생행로, 생활양식, 실존 의미의 근본 귀감이시다.”(한스 큉, ‘왜 그리스도인인가’, 분도출판사, 1983, 329).
2. 그저 초월?
오늘날의 세계 현실과 한반도 및 동아시아의 현상에 관련하여 교회가 추구해야 할 답은 무엇인가? 먼저 무신론적인 사회 현실을 무시하고 그저 초월을 지향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일반 종교의 초자연적 기적 현상에 기대는 신비주의의 틀로는 오늘날의 문제를 풀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을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오늘날 세계 상황의 난제를 풀 수 없다. 어림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비주의적인 길을 거부하셨다. ‘메시아 비밀’에 관련된 성서신학의 논의는 예수가 자신이 메시아인 것을 치병과 축귀의 기적에 연결시키려는 당시 사람들의 시도를 엄하게 경계하며 거부한 것을 보여준다. 예수는 구약성경의 예언 성취 곧 말씀이 삶이 되는 것에 에 메시아 사역의 성패가 걸려 있다고 보았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에서 철저하게 말씀이 삶이 되는 일에 집중하셨다.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황에서 종교성에 관심이 많다. 초자연적이며 신비적인 현상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많다. 얼핏 보면 종교성이 높아지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성서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이런 현상은 오히려 더 삼위일체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든다. 하나님 없는 초자연주의는 숨겨진 무신론일 수 있다.
3. 그저 내재?
초월이 답이 아니지만, 그저 내재적인 데 몰입하는 것도 대안이 아니다. 비도덕적 사회 현실에 충분히 적응하는 것이 길일 수 없다. 현실적인 대립 세력 중에서 그 중 나은 것을 편들며 선택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적으로는 기독교가 어느 한쪽 편에 설 수밖에 없다고 핑계하고 싶을 때가 많지만 성경적인 대안이 아니다.
일반적인 윤리 도덕에 근거한 인문적 교양의 힘이나 어느 특정 문화의 고상한 우월성으로 직면한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검증이 끝났다. 교양이나 문화, 양심이나 도덕성으로 세상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이 사람 몸을 입고 세상에 오지 않으셨을 것이다.
고도의 기술 발전이나 이에 근거한 특정 문화나 국가의 강력한 힘의 헤게모니로써 잠정적 평화를 유지한다는 것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힘의 주도권에서 군사력이 핵심이다. 이미 확산된 원자력 무기의 양적 질적 파괴력은 터질 가능성을 안고 있다. 값싸게 만들어 광범위한 지역에 치명적인 살상을 가하는 화학무기의 제조 기술은 이미 일반화되었다. 군사적이고 물리적인 힘으로 세계의 질서를 지켜나가려는 것은 장기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4. 책임성과 가능성의 통합
오늘날의 세계 문제에 대한 답은 현실적으로 결코 쉽지 않은 두 항목, 책임성과 가능성의 통합에 있다.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먼저는 고도의 책임성이며 다음으로는 그 책임성이 현실 세계에서 작동될 수 있게 하는 힘 곧 가능성이다.
창조세계에 대한 책임성의 문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에 그 근거가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창조세계를 돌보는 청지기의 소임을 맡겼고 소임을 감당할 힘도 주셨다. 하나님의 형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힘이 처음 사람의 범죄로 상실되었다.
고도의 책임성이 현실적으로 작동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에 그 근거가 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려고 성자 하나님이 오셨고 이를 실존적으로 성취하게 하려고 성령 하나님이 오셨다.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믿음을 가지면 누구든지 성령의 임재 안에서 작동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에 참여할 수 있다. 초대교회 중의 초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선포한, 기록된 최초의 설교에서 결론이 이것이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사도행전 2:38-39).
창조는 구원의 여정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며 구원은 그 본질상 늘 새로워지는 창조의 작업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창조와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 안에서 하나다. 사람이 사는 시공의 한계 안에서 순차적으로 또는 구분되어 인식될 뿐이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일한다. 그에 근거하여 사람의 믿음이 응답한다. 은혜에서 가장 큰 은혜는 창조의 은혜다. 창조의 은혜 안에 구원의 은혜가 배태돼 있다. 창조와 구원에 연관된 이 은혜의 선물을 믿음으로써 받는다. 은혜와 믿음은 둘 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5. 교회가 사는 현실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충분히 성숙하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개인의 실존에서 그리스도인은 신앙적으로 고백하고 결단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이런 상황을 가정해 보자.
“어느 한 그리스도인 정치인이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마가복음 11장을 읽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산헤드린 의원들의 모습이 곧 내 모습 아닌가! 하나님께서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사안 자체의 옳고 그름을 따져서 행동하라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 지금 논의되는 돈세탁방지법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 이분은 성경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습니다. 고민이 시작됩니다. 정치적 소신과 신앙적 확신대로 행동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이 나라의 정치 현실이니까요. 출근하는 차 안에서 이분은 결단합니다.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 정치 자금이 돈세탁방지법에 포함되는 것이 당신의 뜻인 것을 제가 인정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겠습니다. 그쪽으로 표를 던지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 나라의 정치 현장을 아시지 않습니까! 제게 신앙의 소신대로 밀고 나갈 힘을 주십시오. 뜻을 같이 할 사람들을 주십시오!’”(지형은, ‘인용구’, 도서출판말씀삶, 2013, 114-115).
한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근거한 특별계시에 열정적이다. 기독교의 정체성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회적인 연관성에서는 상당히 심각한 약점을 보이고 있다. 일반계시 또는 자연계시적 측면 얘기다. 한국 교회에 복음의 정체성과 연관성이 조화롭게 정립돼야 한다.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각이 절실하다. 한반도를 중심한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 전체에 대한 건강한 성서적 신학적 인식이 시급하다.
복음의 사회적 연관성을 논할 때 구체적인 내용으로 다음의 네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1)인도적 인륜도덕, (2)생태적 환경윤리, (3)법치의 민주주의, (4)상생의 시장경제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성이 역동적으로 작동되는 성경적 구원론이 사회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영역들이다.
먼저는 인륜도덕이다. 인륜은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면 사람의 사람다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됨의 본디 뜻이 인륜이며 인도주의다.
지구환경과 연관된 신앙의 바른 시각이 오늘날처럼 절실한 때가 없었다.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삶의 생태 환경을 잘 보존하고 가꾸어가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 과제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다. 민주정치의 오늘날 현실이 조악하기도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민주주의 말고 다른 그 어떤 정치체제가 더 성경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에서 현실적인 중심이 법치다.
경제와 연관해서는 시장경제인데, 요점은 상생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사반세기 정도 강력하게 진행돼 온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은 기독교의 시각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못하다.
한국 교회는 성서적이며 복음적인 구원론에 근거하여 이 네 가지에 대한 명확한 신학적 인식을 세워가야 한다. 그런 인식을 삶의 고백으로 결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한국 교회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와 지구촌에서 복음적 가치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글은 2015. 6. 11 서울신학대학교 웨슬리신학연구소의 제1회 공개강좌에서 조종남 박사의 '웨슬리의 은총관과 그 의의'에 대하여 지형은이 논찬한 글의 일부인데, 2019. 6. 20 전체적으로 수정 보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