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노래로(쉬르 하다쉬) 여호와께 노래하라(쉬루) 온 땅이여(콜 하아레츠)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시96:1).
우리가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즐거움과 감사의 충만함이 가득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의 현실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을까? 이 팬데믹의 현실은 어둠과 혼돈, 무질서와 고통이 가중되는 상태가 계속되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 노래로 기뻐하며 찬송을 부를 수 있을까.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상황이다. 시편 96편은 야웨 즉위 시편으로 신년 축제 때에 야웨가 왕으로서 즉위하는 것을 축하하는 시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야웨가 오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노래부른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바라쿠(축복하다) 쉐모, 축복하다)) 그의 구원을 날마다(미욤 레욤) 전파할지어다(바세루)”(96:2).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며 이스라엘의 예배 중에 자신의 사역과 의지를 드러내서 찬양을 받으신다.
“존귀와 위엄이(호드 웨하다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오즈 웨티페에레트) 그의 성소에(베미크다쇼) 있도다”(96:6). 여호와 하나님의 존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나고 이스라엘 회중은 하나님의 현존(現存) 앞에 새로운 노래로 찬송하며 예배 처소로 나가고 있다. 신년에 새롭게 도착하는 왕의 도래와 왕의 즉위식 축제에 새 노래로 새롭게 마음과 정성을 다하며 성전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만이 부르는 찬송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불러야 할 찬양이었다. “만국의 족속들아(미쉬페호트 아밈) 영광과 권능(카보드 와오즈)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하부 라도나이)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케보드 쉐모)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세우 민하)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시96:7-8).
오늘 우리는 매일 새로운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께 새 노래를 불러 드리며 나가야 한다. 새롭게 변화 받지 못하면 죽은 것이며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하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와 생명의 이치가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는 변화된 새 존재, 새 실존으로 서지 않으면 도태되고 망하며 죽어가게 된다. 인체의 세포가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하듯, 조직과 기업도 성장과 발전, 쇠퇴의 순환을 거치는 것을 본다. 시편 96은 새 노래(쉬르 하다쉬)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바 리쉐포트 하아레츠)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이쉬포트 테벨 베체데크) 그의 진실하심으로(베에무나토)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96:13). 이 심판을 바로 하나님 신앙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점이 심판의 기준이다(96:4-6). “만국의 모든 신들은(콜 엘로헤 하아밈) 우상들이지만(엘리림) 여호와께서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아사)”(96:5).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냐 이 세상 맘몬 신이냐? 선택의 기로에 있다. 팬데믹의 재앙이 펼쳐지고 있는 일상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선택의 삶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선택의 삶이 초기 한국 선교 역사 속에도 있었는데 선교사들에게 믿음의 선택이 컸다.
로버트 그리어슨(Robert G. Grierson, 1868-1965, 구예선)선교사는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핼리팩스에서 태어나서 댈하우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98년 목사 안수를 받고 레나 베노잇과 결혼하고 1898년 아내와 함께 한국에 선교하러 온다. 그는 맥켄지 선교사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말미암아 계기가 되어 그의 유서에서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게 되어 선교부의 선택에 부응하여 한국에 오게 된다. 1897년 푸트와 매크레 선교사와 더불어 들어오게 된다. 그들은 1898년 9월 7일 들어오게 되었고 그리어슨은 원산, 성진, 함흥에서 선교 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성진에 정착하여 이순창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어학 선생 홍순국의 통역으로 전도를 하게 된다. 신자가 30명이 되어서 1901년 예배당을 건축하여 헌당식을 가진다. 그의 아버지 존 그리슨은 목수였는데 아들을 돕고자 한국에 와서 직접 예배당을 지어주었다. 그는 예배당을 크게 짓고 성경과 소책자를 판매하며 방 한쪽에서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이후 1902년 여러 선교 단체와 더불어 제동병원을 설립하였고, 간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여 한인 이주민들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1903년 여름에는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하여 한인촌을 순회하며 성경을 나눠주고 복음을 전하였다 1906년 홍순국 통역사와 함께 용정에 예배 처소를 마련한다. 1903년과 1904년 사이에 보신학교를 세워서 1935년 은퇴할 때까지 보신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의 아내 레나 베노잇도 보신여학교를 세워 여학생을 가르친다. 1909년 블라디보스톡에 방문하여 사경회 강사로 성경을 가르치기도 한다. 1908년 그리어슨은 함경남도 단천군 원덕리 교회 문성기 장로의 아들 결혼식 주례를 서기도 한다. 1909년 봄, 그리어슨은 이동휘를 교회 직분을 주며 성서 매서인으로 임명한다. 일본의 요시찰 인물이지만 그리어슨 선교사는 그를 후원하며 조사로 임명하여 나라를 찾는 일을 돕는다. 1914년 가을에 이동휘가 국외로 피신할 때 돕기도 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때는 자신이 집을 비밀 회합 장소로 제공한다. 성진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옥고를 치르는 성진교회 장로들과 신도들을 오랫동안 보살핀다. 그는 이렇게 선교하다가 1935년 정년퇴임하고 캐나다로 돌아가서 1965년 98세 나이로 소천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려 1968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한다. 선교의 역사는 이러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들에 의해 오늘도 쓰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