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사관으로 본 韓日近代史” , 박호용 교수의 한일근대사 강의 (42)

1. 한국의 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시나리오 두 번째 전략은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를 통한 러시아 끊어내기였다. <정한론>을 위한 일본의 마지막 승부수는 러시아와의 한판승부(러일전쟁)였다. 삼국간섭(1895.5.5.) 이후 일본은 절치부심하며 러시아와의 일전을 철저히 준비했다. 객관적 전력상 러일전쟁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비유된다.

러시아 인구는 일본보다 세 배 많았고, 철강 생산은 60, 국방비는 일본의 세 배가 많았다. 병력 수는 일본보다 6배나 많은 113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밖에도 예비군과 국민군이 350만 명이었다. 총체적 국력에서 일본은 러시아에 10분의 1에 불과한 약소국이었다. 그래서 전쟁이 시작되기 전 주중 영국대사를 포함한 대다수 관찰자들은 러시아의 승리를 믿었다. 고종도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일본은 기적같은 승리를 장식했다. 이제부터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 요인을 분석해 보자.

러일전쟁 당시 신문 삽화
러일전쟁 당시 신문 삽화

 

2. 첫째, 전쟁에서 외적인 전력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에 임하는 군인들의 정신자세와 애국심이다. 러일전쟁 당시 황제 니콜라이 2세 치하의 러시아는 혁명 전야와 같은 혼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전쟁에 임하는 러시아군은 우리가 왜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는 황제를 위해 충성해야 하는가라는 회의적 분위기가 팽배했고, 따라서 사기가 현저히 저하되어 있었다. 더욱이 러일전쟁 중이던 190519일에 있었던 피의 일요일사건은 국론 분열을 야기하여 전쟁에 올인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렸다. 반면에 일본은 전국민적 단결과 군부의 뛰어난 전략전술과 더불어 천황을 위해 한목숨 바치겠다는 전의에 불타는 군인정신과 애국심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둘째, 일본은 러시아와의 일전을 준비하면서 수많은 밀정을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에 파견하였다. 군국주의 단체 흑룡회(黑龍會)는 야쓰다(安田) 상사의 재정 지원을 받아 민주에서 후방 교란 및 스파이 활동을 전개했다. 일본은 연해주, 흑룡강, 동부 바이칼 지역에 수백 명의 첩보원을 파견하여 전쟁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 러시아 육해군을 연구하는 수백 명의 비밀결사 및 그들을 돕는 비밀공작원 조직들이 있었다. 반면에 러시아 참모본부에서 일본에 대한 군사정보 수집 임무를 담당한 소속 장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러일전쟁 상황도
러일전쟁 상황도

특히 훗날 한국 주차헌병대 초대사령관이 될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대좌의 뛰어난 공작활동이 승리의 한몫을 했다. 아카시는 일본 정부로부터 100만 엔의 공작금을 받았는데, 현재 한국 화폐단위로 환산하면 5,400억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이 거금으로 적국에서의 내란 유도 공작에 착수했다. 아카시는 제정 러시아 안팎의 거물 공산주의자, 좌익 운동가. 불평분자 등과 광범위하게 접촉했고, 그들에게 아낌없이 자금을 지원하여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그는 스위스에 망명한 레닌을 공작금을 주어 설득하여 러시아 공산혁명을 하도록 유도했으며,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된 피의 일요일사건에도 깊이 관여하여 후방에서 러시아를 교란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아카시 모토지로는 혼자서 일본군 10개 사단의 역할을 해냈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셋째, 가장 중요한 승리 요인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이다. 당시 영국은 러시아와 전지구적인 그레이트 게임을 하고 있었던 관계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방안으로 일본과의 동맹을 체결했다(1902). 이는 일본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는 효과를 가져왔다. 미국 또한 국익을 위해 일본의 승리에 베팅했다. 단적인 예로 러일전쟁 시 일본 측은 1984백만 엔의 군사비가 지출되었는데, 그중 60%에 해당하는 12억 엔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지원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일본에 편향적이었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서둘러 전쟁을 종결시켜 러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장식하도록 이끌었다(포츠머스 회담, 1905.9).

일본군의 러일전쟁 승전 기념 촬영(1904.5.6 창덕궁 후원 주합루)
일본군의 러일전쟁 승전 기념 촬영(1904.5.6 창덕궁 후원 주합루)

 

3. 1904211일에 시작하여 17개월 동안 지속된 러일전쟁은 청일전쟁과 달리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가져왔다. 일본군은 전사자가 약 84천 명, 부상자가 약 143천 명에 달했다. 이 숫자는 청일전쟁에서 총동원 병력 24만여 명 중 전사자가 13,309(이중 병사자가 11,894)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전쟁 비용은 총 174642만 엔으로 청일전쟁에 소요된 27천만 엔에 비하면 6배가 넘는 엄청난 액수였다.

이 같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얻은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본은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부터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1945년까지 50년간 만주 중국대륙 시베리아 동남아 태평양 군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태평양 일대를 누비며 정복 전쟁을 치렀다. 청일전쟁은 아시아에서 각축을 벌이던 황인종 사이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전통의 동아시아 맹주 지위가 중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러일전쟁은 근대사에서 아시아 국가(황인종)가 서양 열강(백인종)과 싸워 이긴 최초의 전쟁이었다. 러일전쟁은 또 승자와 패자의 역사와 운명을 극적으로 바꿔 놓았다.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1945년까지 동북아 일대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국가적 자긍심은 하늘을 찔렀다. 반면 패배한 러시아는 혁명을 불러와 공산주의라는 악성 종양을 전 세계에 퍼뜨리는 존재로 전락했다.

한편 러일전쟁은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러일 양국의 일전이었다. 일본의 패배에 베팅한 고종은 러시아를 맹신하다가 청일전쟁에 이어 또 한 번 망신을 당했다. 이제 조선은 일본의 먹잇감 신세로 전락했다. 그런데 러시아는 정교회의 나라이자 앞으로 공산주의 나라가 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결과적으로 러시아 끊어내기였다. 이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일본이 대신해 준 것이다. 섭리사관적 관점에서 보면 이 같은 결과는 한국복음화를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절묘한 시나리오였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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