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사관으로 본 韓日近代史” , 박호용 교수의 한일근대사 강의 (38)

1. 조선이 일본에 개항을 한 이후 고종 정권이 처음으로 맞은 시험은 임오군란(1882)이었다. 두 번째 시험은 2년여가 지난 후에 나타났는데, 갑신정변(1884)이 그것이다. 갑신정변은 아이러니하게도 개화를 통한 조선(한국)의 근대화를 꾀했으나 실패로 귀결되면서 오히려 근대화에 많은 부정적 결과를 야기했다. 반면에 이 사건에서 치명상을 입은 민영익(1860-1914)이 선교사 알렌(1858-1932)의 치료로 극적으로 살아남으로써 조선(한국)의 복음화를 위한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번 호에서는 갑신정변의 배경과 그 의의를 살펴보자.

임오군란 이후 조선은 청군 점령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친청파 세력(조영하, 김윤식, 어윤중 등)이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친청(親淸)으로의 귀의 현상은 일본을 발전 모델로 하고 일본의 힘을 이용해 개화를 추구하려던 세력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청나라를 모델로 개화를 추구하려고 한 민영익 일파를 청국당’(수구당)이라 불렀고, 일본을 모델로 개화를 추구하려고 한 김옥균 일파를 일본당’(개화당)이라 불렀다. 개혁 · 개방이라는 대의에도 불구하고 집권세력과 개화당은 그 목표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따라서 양 세력은 정적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개화당의 기원은 1871년 신미양요를 전후하여 역관 오경석(1831-1879)과 의업에 종사하던 유대치(유홍기, 1831-84?)가 김옥균(1851-94)을 포섭함으로써 결성되었다. 김옥균이 중심이 되어 박영효(1861-1939), 홍영식(1855-84), 서광범(1859-97), 유길준(1856-1914), 서재필(1864-1951) 등 북촌의 명문가 청년들이 결집하면서 북촌(北村) 5로 불리는 개화당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개화당
개화당

 

2. 개화당 인사들은 구미 각국을 비롯한 일본의 발전상을 목격하였다. 특히 김옥균은 여러 차례 일본을 다녀오면서 일본의 힘을 빌려서라도 정권을 잡고 이 땅을 개화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쿠데타 주력군 양성 계획을 수립했다. 구체적으로 임오군란 직후 200여명의 청년들을 일본에 3년 정도 군사 유학을 시킨 후 1888년 무렵에 거사를 일으킨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으로부터 차관 도입에 실패하면서 이 계획은 크게 틀어졌다.

당시 고종과 민 황후는 청으로부터 심한 내정 간섭에 시달린 데다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박영효와 김옥균은 고종과 민 황후에게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여 재정난을 타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차관 도입에 실패하자 양자 간의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고종과 개화당은 서로가 추구하는 목표와 노선이 다르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깨닫게 되었다. 고종은 국가가 아니라 왕권 유지 강화를 위해선 어떤 가치라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던 데 반해, 개화당은 일본에 의지한 개화와 부국강병이 주력 목표였고 왕권 강화 같은 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일본 유학을 통한 쿠데타군 양성 계획이 좌절되자 개화당은 박영효 · 윤웅렬을 중심으로 국내에서 양병하는 방식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이 무렵 박영효는 수도권 방어의 중요한 요직인 광주 유수에 임명되었다. 박영효는 병력 동원권을 보유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개화당은 쿠데타 양성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곳곳에 정보망을 깔아둔 민씨 일파의 귀에 들어갔다. 수구파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박영효는 광주 유수에서 쫓겨났다. 박영효가 광주 유수 직위에서 쫒겨 나면서 개화당은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이제 그들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 당하느냐, 아니면 먼저 일어나 저들을 제압하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때마침 안으로는 농민들이 수구파에 저항하고 있었고, 밖으로는 베트남 문제로 청불전쟁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조선 주둔군 1,500명을 안남(安南, 베트남 하노이 지역) 전선으로 이동시켜 서울에 주둔하는 청나라 군대가 축소되어 있었다. 청국이 조선의 문제에 관심을 쓸 겨를이 없다고 판단한 김옥균은 이 상황을 기회로 생각하고 개화파 정치인들을 모아 우정국 낙성식을 기해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또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를 만나 김옥균 일파의 향후 활동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3. 1884124(음력 1017) 오후 6, 정동에 새로 신축된 우정국 준공 축하연에는 홍영식의 초청을 받고 온 서울 주재 각국 외교관과 정부 요인으로 가득 찼다. 예정된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우정국 북쪽 창문 밖에서 불이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연회석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민씨 척족인 민영익이 몸에 칼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달려 들어왔다. ‘3일 천하’(정확히는 46시간)로 끝난 갑신정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변이 일어난 지 사흘째 되던 날에 청군과 일본군 사이에 교전이 일어났다. 여기에 개화파가 일본과 결탁하여 국왕을 연금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한 일반 백성들까지 합세해 엄청난 수의 부대가 궁궐을 공격했다. 청군은 궁궐에 들이닥쳐 단숨에 신정부(개화당 정부)를 무너뜨렸다. 청국군과 수구당의 반격으로 박영교, 홍영식, 신복모 등은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다케조에(竹添進一郞)를 비롯한 일본공사관의 모든 직원과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유혁노, 신응희, 이규완, 정란교 등 9명은 일본군의 호위 아래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로써 조선 개화당이 청국의 속방화정책을 타도하고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일으킨 갑신정변은 3일 만에 처참하게 실패로 끝났다. 결국 급진개화파에 의한 갑신정변은 오히려 조선의 근대화에 찬물을 끼었는 결정적 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실패한 갑신정변에서 주목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일본이 아직은 청나라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의 자각과 더불어 10년 후에 있을 청일전쟁을 철저히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하나는 민 황후의 친정 조카이자 수구당의 대표격인 민영익이 이 사건 때 칼에 맞아 죽을 뻔했는데, 선교사 알렌의 치료로 극적으로 살아났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국 복음화를 이루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호에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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