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사관으로 본 韓日近代史” , 박호용 교수의 한일근대사 강의 (36)

1. 아무 준비 없이 개항을 한 고종 정권에 첫 위기가 닥쳤다. 그것은 경제 파탄에서 온 위기였다. 개항을 전후해서 여러 주장들이 충돌하였다. 개화를 서둘러야 한다는 개화파와 개화는 국가적 위기를 초래하기에 개화를 반대한 위정척사파로 크게 대별된다. 위정척사파는 중세적 사고방식에 매여있다는 점에서 근대적 관점에서 보면 시대착오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기()에 대한 도()의 우위, ()에 대한 문()의 우위라는 전통적 상문천무(尙文賤武) 사상에 매여있었다. 이는 무()가 빠진 붓만의 양이(洋夷) 사상이다. 두 차례의 양요(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군사력’(軍事力)의 근대화 문제가 국가적인 최우선 과제라는 사실을 제기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서양의 충격에 대한 청이나 일본과 크게 달랐다.

그런데 위정척사파의 주장 가운데 귀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 있었다. 이항로(1792-1868)는 서양의 공산품은 하루의 생산으로도 남음이 있지만 우리의 농산품은 일 년 생산으로도 오히려 부족함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의 제자 최익현(1833-1906)도 서구의 수공업품은 그 양이 무한한 데, 우리의 물화(物化)는 토지생산품으로 그 양이 유한하여 둘 사이의 교역은 조선에 피해만을 가져오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우려는 개항과 더불어 현실화되었다. 외국에서 들어온 물품이 10건이라면 인조물품이 9건을 차지한 데 반해, 우리나라가 내놓은 물품은 10건 중 9건이 천연물산이었다.

특히 쌀이 문제가 되었다. 개항 이전부터 쌀은 일본과 청나라에 밀수출되고 있었지만, 그 양은 미미했다. 그러나 1876년 개항 이후 쌀의 수출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빠져나가는 쌀의 양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이는 조선의 쌀값이 일본의 3분의 1 가격인 데다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석유와 성냥, 화장품, 모피 등 각종 상품값을 현금이 아닌 쌀로 치르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일본 상인들은 조선 쌀을 일본에 가져가 몇 배의 이익을 남기고 팔았다. 이 차액을 노린 일본 상인들이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면서 조선의 쌀값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마침내 임오군란(壬午軍亂)이라는 국가적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2. 임오군란이 일어나던 1882년의 상황은 이러했다. 민 황후의 왕위 계승자가 된 아들 척()이 만 8세가 되어 왕세자의 관례식(冠禮式)과 이에 맞춘 민태호(閔台鎬)11살 되는 딸의 왕세자비 간택으로 왕궁은 축제 분위기였다. 1882년 정초의 일이었다. 궁중에서는 밤마다 가무음곡(歌舞音曲)의 소리가 들렸고, 고종 부부는 새벽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 해는 조선 왕조 말기 최악의 해였다. 극심한 가뭄으로 백성은 굶어 죽기 시작했고, 엎친 데 덮쳐 콜레라가 유행하여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갔다. 도처에서 도적들이 발호하고 국고와 정부미는 바닥이 났다. 그럼에도 왕궁에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밤마다 향연이 베풀어지고 있었다.

급기야 군인들에게 녹봉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군인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일이 일어났다. 신식 군대인 별기군은 특별대우를 받은 반면, 구식 군인들은 13개월 동안 녹봉도 받지 못해 차별대우에 따른 불만이 높았다.

1881년 군사제도 개편에 따라 설치된 신식군대이며 일본 교관에 의해 훈련된다고 해서 왜별기라고 부름
1881년 군사제도 개편에 따라 설치된 신식군대이며 일본 교관에 의해 훈련된다고 해서 왜별기라고 부름

1882719(음력 65), 때마침 전라도에서 미곡이 올라와 정부는 군인들에게 몇 달 치의 녹봉을 지급하려 했다. 그런데 척족 민겸호의 하인 창고지기가 나와서 쌀을 나눠주는 데 겨와 모래가 반이나 섞인 쌀이었다. 이에 격분한 구식 군졸들은 723, 창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堂上) 민겸호(閔謙鎬)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군졸들은 별기군 병영으로 몰려가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掘本禮造) 공병 소위를 죽이고, 민중과 합세하여 일본공사관(서대문 밖 청수관)을 포위하여 불을 지르고 일본 순사 등 13명의 일본인을 살해했다. 그러나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 등 공관원들은 모두 인천으로 도망친 후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더욱 강력해진 군민들은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영돈령부사 이최응(李崔應)을 살해하고, 궁궐에 도피해 있던 민겸호, 김보현 등을 즉사시키고 민 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 돈화문 안으로 난입했다. 이때 민 황후는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후 궁궐을 탈출하여 충주 장호원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사태가 위급함을 느낀 영악한 고종은 전권을 대원군에게 맡겨 반란을 수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대원군을 불러들였다.

임오군란과 진행도
임오군란과 진행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98)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98)

3. 재집권한 대원군(723)은 반란을 진정시키고, 군제를 개편하고 인사 개혁을 단행하여 민씨 세도 정권을 타파하는 조치를 과감하게 취해 나갔다. 그러나 민 황후의 책동으로 대원군은 청군에 납치되어(825) 톈진(天津)으로 압송되었고, 31개월간이나 유폐 생활을 해야 했다. 대원군의 재집권은 불과 33일 천하로 끝나고 잠시 피신했던 민 황후는 다시 돌아와 정권을 되찾았다.

일본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고, 공사관을 경비한다는 명목으로 일본군의 주둔을 허용하고 피해를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일본은 임오군란을 기회로 삼아 조선을 실질적인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내정간섭을 할 요량이었다. 임오군란은 결국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 주는 결과를 가져왔고, 대내적으로는 개혁 세력과 보수 세력의 갈등을 증폭시켜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 사실이 있다. 하나는 군란의 주모자들이 궁궐을 쳐들어가 국모인 민 황후를 찾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반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행위였는데, 그 까닭은 민씨 척족 세력들과 그 좌장인 민 황후의 타락과 부패 때문이었다. 이는 그들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이에 대해서는 다음호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자). 민 황후는 그때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겨우 살아남은 것은 아직 카이로스적 때가 차지 않았을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 백성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도록 잠시 그를 살려두었다가 일본인의 손에 더 비참하게 죽도록 때를 연장시켜 주었을 뿐이다.

또 하나는 고종 정권은 자신의 정권이 위태로우면 외세를 불러들이는 외세 의존적 사고방식이라는 아주 나쁜 선례를 남긴 것이다. 동학 농민들의 봉기를 막기 위해 청나라와 일본을 끌어들여 한반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간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고종과 민씨 척족들은 망국으로 가는 지름길을 스스로 택한 것이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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