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사관으로 본 韓日近代史” , 박호용 교수의 한일근대사 강의 (31)

1. 한국 역사에서 19세기 100년의 세월은 세속사적 관점에서 보면 망국으로 가는 최악의 불행한 역사였다. 하지만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면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대신할 새 언약 백성으로서의 한민족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써 가신 최선의 드라마틱한 역사였다. 19세기 조선의 역사가 세속사적으로 최악의 불행한 역사였는데 그 모습은 이러했다. 국제적으로는 한중일 및 미국이라는 네 나라가 한반도를 놓고 각축전을 벌였는데, 그 중심에 일본이 있었고, 국내적으로는 대원군, 고종, 민씨 척족 및 노론 세력이 권력쟁취와 권력유지를 위해 치열하게 다투었는데, 그 중심에 고종이 있었다. 두 주에 걸쳐 고종이 친정(1873.11.4.[음력])을 하기 전까지 19세기 조선의 상황과 대원군의 섭정에 대해 살펴보자.

1864116(음력 1863128), 조선왕조 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63)이 후계자 없이 승하하자 후계자 지명권을 가진 대왕대비 조씨는 흥선군 이하응(1821-98)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으로 지명했다. 이가 바로 고종(1852-1919, 재위 1864-1907)으로 당시 12세에 불과한 소년이었다. 조대비는 고종이 어린 관계로 흥선대원군에게 섭정을 맡겼다. 흥선대원군의 섭정 기간 10(1864-1873)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그의 집권 10년을 두 측면(국내정치와 국제외교)에서 살펴보자. 먼저 국내정치부터 살펴보자.

 

2. 대원군은 집권하자마자 작심한 듯 지난 60여 년 동안의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빚은 적폐를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를 갑자유신’(1864년 갑자년에 벌인 개혁) 또는 함여유신’(咸与維新, 함께 새로이 고친다)이라고 한다. 숙종 이후 철저히 노론이 독점한 권력구조를 당색 구별 없이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자 하였다. 그의 집권 10년 동안 세 정승과 각조 판서 취임자 139명 가운데 노론은 78, 소론 34, 남인 13, 북인 13, 종실 1, 분류 불명 1명 등 비율로 보면 노론 56.1%, 소론 24.5%, 남인 8.6%, 북인 9.4%이다. 이 비율은 200년 가까이 진행되어온 노론 중심의 기존 세력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군사력을 강화(강병책)하기 위해 그때까지 문신인 외척이 장악한 병권을 회수하고 무장(武將)들을 대거 요직에 등용했다. 그 동안 의정부를 무력화시키고 국가 최고 의사결정기관 행세를 한 비변사의 문신들은 고위직을 독차지했는데, 조선왕조 최초로 병조판서(국방부장관)에 무장 출신을 문신 출신과 대등하게 임명하였다. 그 후 대원군은 1865328일 비변사를 의정부 아래로 통합시켜 비변사를 없애버렸다. 그뿐 아니라 두 달 뒤인 526일에는 훈련도감과 금위영, 어영청을 통합한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하여 문관들의 의사결정기관인 의정부와 동급으로 만들었다. 이는 문()과 무()가 엄격하게 분리되고 동급이 된 혁명적 사건이었다.

한편 기존 권력집단을 긴장시킨 가장 상징적 조치는 만동묘(萬東廟)와 서원 철폐였다. 만동묘는 숙종 때인 1704년 노론 거두 송시열이 남긴 유언에 따라 충북 화양동계곡에 만든 사당이다. 만동묘는 명나라 황제 신종과 의종을 제사 지낸 사당으로 이미 사라진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극명하게 상징하는 사당이다. 또한 만동묘는 노론 권력의 정신적 지주요 고향이었다. 만동묘 철폐의 본질적 이유는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요 국왕도 제1사대부에 불과한 존재로서 노론은 마음만 먹으면 왕 하나쯤은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다는 오만한 반왕권적 양반들의 아지트라는 점에 있었다.

서원은 면세와 특혜를 누린 각종 폐해의 온상이었다. 1864년부터 1871년까지 대원군은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전국 6백여 개의 서원을 철폐시켰다. 1543년 경상도 풍기에 현감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운 이래 서원은 신흥 정치세력인 사림의 본거지로 변했고, 인조반정(1623) 이후 서인 아지트로, 숙종 이후 노론 아지트로 변신했다. 서인 영수인 송시열을 배향한 화양서원은 노론의 해방구였다. 화양세원이 발행한 문서 화양묵패(華陽墨牌)는 지방 수량도 거역 뭇하는 공인된 착취 도구였다. 이같은 노론의 오만방자함에 철퇴를 가하기 위해 만동묘와 서원철폐를 단행한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안동 도산서원
한국의 대표적인 안동 도산서원

또한 대원군은 당시 민란(1862년 진주민란 등)의 주요 원인이 된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당시 농민들에게 가장 큰 조세부담이었던 양역(良役)과 환곡의 폐단을 개혁했다. 양반들이 양역 부담에서 빠지면서 양인에게 편중되었던 군역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모든 호()에 부담을 지우는 호포제를 시행하여 양역의 폐단을 개혁했다. 그리고 환곡 역시 마을 단위로 공동 운영하는 사창제(社倉制)를 시행하여 지방에서 자율적으로 운영하도록 개혁하였다.

 

3. 대원군이 행한 일련의 개혁 조치의 궁극적 목적은 양반의 기득권을 혁파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그가 벌인 사업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다시 짓는 일이었다. 대규모 토목공사인 경복궁 중건 사업은 그의 최대의 실책이었다. 1865년에 시작하여 1868년에 완공된 경복궁은 중건 초기부터 원납전(願納錢)을 거두어 백성들에게 원성을 샀으며, 당백전(當百錢) 주조(1866)와 값싼 청나라 동전(청전)의 수입(1867)은 물가의 급등이라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발생시켰다. 그 밖에도 결두전(結頭錢)이라는 특별 토지세와 도성문 통행세도 물렸다. 무리하게 추진된 이 사업은 결국 그의 개혁정치에 불만을 품은 기존 세력들에게 정권을 빼앗기는 빌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좌측 원납전 자문(願納錢 尺文)과 우측 당백전대구에 거주하는 전(前) 현감 한은주가 원납전 5000냥을 납부하고 받은 자문으로 처음에는 자발적 기부금 형식이던 원납전은 이 후 강제 부과금 형식으로 변질됐다.
좌측 원납전 자문(願納錢 尺文)과 우측 당백전대구에 거주하는 전(前) 현감 한은주가 원납전 5000냥을 납부하고 받은 자문으로 처음에는 자발적 기부금 형식이던 원납전은 이 후 강제 부과금 형식으로 변질됐다.

대원군이 집권하던 그 시기는 서양 세력이 동아시아 역사에 커다란 위기를 몰고 오는 격동의 시기였다. 근세 백년사의 초장(初章)의 인물인 대원군의 집권 10년은 나머지 50년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차대한 시기였다. “지나침은 모자람보다 못하다”(過猶不及)라는 말이 있다. 대원군은 용장(勇將)이었으나 지혜가 부족했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날카롭게 분별하는 지혜가 부족했다.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그리하여 그가 그토록 어렵게 이루어놓은 개혁의 장성(長城)은 고종이 친정을 시작함과 동시에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 대원군의 집권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이었을까(다음호에 계속).

미 겟세마네신학교 개교 34주년 기념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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