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사관으로 본 韓日近代史” , 박호용 교수의 한일근대사 강의 (32)

1. 대원군의 국내정치에 이어 국제외교에 대해 살펴보자. 19세기는 전() 지구적 차원에 영국과 러시아가 패권 다툼을 벌인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의 시대였다. 그것이 현실화된 사건이 영국과 중국이 벌인 아편전쟁(1840-42)이었다. 이 전쟁은 동아시아 삼국의 역사에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밖에서 불어오는 강력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은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이 무려 60여 년(1800-63)을 세도정치 아래 있었다. 당시에 권력을 장악한 노론 세력들(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은 계속적인 권력유지(세도정치)를 위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를 골라 왕위에 앉혔다. 조선 후기 나이 어린 왕들의 연속적인 등장을 소년 왕(child kings)들의 시대라고 부른다.

정조 사후 등장한 순조(재위 1800-34)11세에 왕위에 올랐다.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를 두었으나 스물두 살에 요절하는 바람에 순조 사후(死後)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재위 1834-49)이 왕위에 올랐는데, 당시 8세였다. 후사 없이 죽은 헌종을 이어 왕이 된 사람은 철종(1849-63)이다. 철종은 당시 19세로서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농사꾼이었다. 철종 사후 등장한 고종(재위 1863-1907)은 당시 12세였다. ‘소년 왕들이 잇따라 등장한 이유는 세도 가문들이 국왕을 대신하여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세도정치를 물리치고 소년 왕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을 시작한 대원군 시절은 중국과 일본에 이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을 향해 문호 개방을 촉구하고 나섰다. 중국은 아편전쟁으로 강제로 서구에 문호를 개방한 상태였고, 일본은 미국의 압력으로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그런데 대원군은 기본적으로 위정척사적 세계관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래서 오직 쇄국으로만 일관하고자 하였다.

 

2. 대원군이 집권하기 이전 1832년과 1845년 영국의 통상 요구, 1846년 프랑스의 통상 요구가 있었고, 대원군이 집권을 시작하던 1864년 이후 서구 열강들의 계속된 통상 요구가 있었으나 대원군은 이를 모두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위기의식이 가중되었다. 18661월 청나라가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전해지자 국내의 반 대원군 세력들(강경파 유학자들)은 천주교를 사교로 단정하고 철저한 박해를 주장했다. 이는 거스르기 어려운 대세였다. 결국 대원군은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이라는 지시를 내렸으니, 이것이 1866년 병인박해다.

병인박해로 인해 천주교 신도 8천여 명이 학살당했고 포교 활동을 하던 프랑스 신부 12명 중 9명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때 탈출한 신부 3(페론, 리델, 칼레)은 북경으로 가서 천주교 박해 소식을 전했다. 이 소식에 접한 북경의 벨로네 공사와 로즈 제독은 조선을 징벌하기로 결심했다. 이것이 병인양요(丙寅洋擾)이다(18668-10)이다. 프랑스 군함이 물러간 후 대원군은 더욱 쇄국정책을 강화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인양요를 치른 후 5년이 되는 1871(고종 8)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서양 오랑캐들과는 상종하지 않는다하며 거절하였다. 그러자 미국 측은 대포를 쏘며 상륙해 민가를 습격하였다. 이에 성난 평양의 백성들은 제너럴 셔먼호에 불을 질러 침몰시키고 선원 24명을 모두 죽였다. 이에 미국 정부는 제너럴 셔먼호사건에 대한 문책과 아울러 통상조약을 맺고자 해군함대를 출동시켰다. 48시간의 전쟁 결과 미군은 전사자 3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조선군은 무려 450여 명이 무참하게 죽었다. 그런데 조선군의 장렬한 전사에 접한 미국 측은 더 이상 통상이 어렵다고 보고 자진해서 물러갔다. 이를 두고 대원군은 마치 조선이 미국도 물리친 것처럼 오판하였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한국개신교 최초 순교자 토마스 목사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한국개신교 최초 순교자 토마스 목사

두 차례의 양요를 치르면서 대원군은 쓸데없는 자만감을 갖게 되었다. “저 오랑캐 놈들하고는 손잡을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만 잘 보존하면 얼마든지 우리는 발전할 수 있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대원군이 어떤 존재이며, 얼마나 세계정세에 어두웠던가를 적나라하게 엿볼 수 있다.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도(洋夷侵犯)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非戰則和)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主和賣國).” 대원군의 쇄국 결의가 얼마나 단호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문호개방을 통한 근대화의 길을 막았고, 앞으로 전개될 개방에 대한 대책을 전혀 마련하지 못한 채 국제무대에서 완전히 고립을 자초했다.

 

3. 일본의 막부가 쇄국의 빗장을 풀고 개국을 하였을 때 존왕양이파들(조슈번과 사쓰마번)은 이를 반대하면서 두 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사쓰에이전쟁(1863)과 시모노세키 포격사건(1864)이 그것이다. 두 차례의 전쟁을 통해 서구 열강이 자기 나라보다 더 군사적으로 강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양이(洋夷)를 포기하고 서구를 배우고자 줄줄이 유학의 길에 올랐다. 반면에 대원군은 두 차례의 전쟁에서 조선이 군사력 면에서 서구 열강에 비교가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으면서도 허세를 부리고 척화비를 세우는 등 시대 조류에 역행하는 행보를 보였다.

대원군의 결정적인 한계는 다른 나라를 가본 적이 전혀 없다는 데 있다. 실은 모든 문제가 거기서 기인한다. 그래서 발상의 전환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사는 나라 이외의 다른 나라를 보게 되면 생각이 달라진다. 그런데 조선 이외에 다른 나라를 본 적이 없으니 객관적인 눈으로 조선의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세계가 어떻게 변해 가고 있는지를 전혀 몰랐다. 한마디로 그는 우물 안 개구리였고 시대착오적 정치가였다. 그래서 그는 세계정세에 무지했고 서구 열강의 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더욱이 무식한 자가 열심을 내거나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작가 서영은 씨는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산티아고 순례기)에서 방향의 중요성을 말했다. 대원군의 결정적 실패는 지도자로서 미래적 안목을 가지고 제대로 된 방향성을 잡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프랑스 혁명(1789) 이후 세계는 ()의 시대에서 ()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대원군이 야심차게 추진한 개혁정책은 궁극적으로 왕권강화에 있었다. 그 좋은 예가 왕권강화를 위해 무리하게 추진된 경복궁 중건사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홍익이념(弘益理念)에 따른 위민정치, 즉 백성을 위한 개혁이라기보다는 시대에 역행하는 빗나간 시대착오적 사업이었다. 또한 서구 열강에 대한 뚜렷한 대책 없는 무조건적 쇄국은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결정적 패착이었다. 방향성을 잃은 빗나간 열심!! 이것이 대원군의 섭정 10년이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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