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사관으로 본 韓日近代史” , 박호용 교수의 한일근대사 강의 (35)

1. 서구 열강의 아시아 진출은 침략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중국의 서구 인식은 영국과의 전쟁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그것은 서구 기독교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아편전쟁을 지켜본 일본은 서구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미국과 조약을 맺었다(1854). 그런데 일본은 최초로 조약을 맺은 미국에 망했다(1945). 마찬가지로 조선은 최초로 조약(1876)을 맺은 일본에 망했다(1910).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조선은 프랑스나 미국과 통상 조약을 맺을 기회가 있었으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불발되었다. 그 대신 고종에 의해 일본과 최초로 강화조약을 맺었다. 개항을 요구한 일본의 속셈에는 정한론(征韓論)이라는 조선 침략이 깔려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뒤늦게 들어온 서구 프로테스탄트의 조선 입국은 일본 침략에 맞서는 복음으로 작용했다. 즉 섭리사관에 따른 복음화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과 일본은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일본은 근대화, 조선은 복음화가 그것이다. 이는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한국민 최고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침략에 함께 맞선

서구 기독교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일본 신정부는 하나의 고민이 있었다. 1871년의 폐번치현(廢藩置縣)1872년의 국민 징집령으로 기왕의 무사(사무라이) 계급들은 하루아침에 실직하게 되었다. 이들이 이른바 불평사족(不平士族)인데, 그 수가 무려 40여만 명에 달했다. 이들의 처리 문제가 메이지 신정부로서는 큰 과제가 아닐 수 없었고, 이를 해결하고자 등장한 것이 정한론이라는 명분이었다. 1873년 들어오면서 유신 3중의 하나인 사이고 다카모리’(사쓰마번)가 사족들의 정한론을 적극 수용하면서 상황은 급진전하게 되었다. 이는 메이지 신정부에 대한 불만의 화살을 조선 침략에 돌리려는 속셈이 깔려 있었다.

정한의론도(1877년, 鈴木年基 作)
정한의론도(1877년, 鈴木年基 作)

그해 8월 사이고는 태정대신 산죠 사네토마에게 자신을 특명대사로 조선에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이 국교 수립을 거부할 경우 일본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조선과의 국교를 성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일본 국내의 움직임이 유럽에 체류 중인 이와쿠라 사절단의 오쿠보에게 전해졌다. 유럽의 선진 문물을 시찰하면서 일본이 근대화를 한층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갖게 된 사절단 일원들은 사이고의 정한론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였다. 결국 사이고의 정한론 주장은 정한론 반대파에 의해 무산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정한론 반대파도 조선 정벌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시기와 방법, 주도권 문제에서 견해를 달리했을 뿐이다.

 

2.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부딪친 문제는 외세의 개항요구였다. 그 가운데 일본은 적극적으로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였다. 1875920, 운양호(雲揚號)가 강화도 초지진에 나타났다. 이 일은 사흘 동안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졌다. 일본군의 포격과 영종도 상륙 후 살육행위로 조선인 서른다섯 명이 전사했고, 열여섯 명이 포로가 되었다. 운양호는 대포 36문과 화승포 130여 정을 노획하고 928일 나가사키(長崎)로 돌아갔다. 이것이 운양호 사건의 전말이다. 그런데 이 사건 속에는 정한론’(征韓論), 즉 조선 침략을 꾀하는 일본의 야심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조선 정부는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일본 측이 원한 것은 조선 정벌 곧 무력적 제압의 기회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1875년 국교 수립 마지막 절차에서 일본 측이 복제 문제로 협상을 결렬시킨 것은 조선의 개방주의로 협상이 그들이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상적 협상을 버리고, 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무력 위협으로서의 운양호(雲揚號) 사건이었다.

강화도 초지진에 나타난 운양호
강화도 초지진에 나타난 운양호

이 사건으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1876년 정월, 육군 중장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를 지휘관으로 한 6척의 함선을 파견하여 조선을 위협했는데, 이는 미국의 페리 함대의 일본판이었다. 일본은 이 수법을 조선을 상대로 실험했던 것이다. 결국 조선 정부는 아무런 준비 없이 187623일 마침내 연무당(현재의 서대문 옆)에서 12개 조항의 강화도조약(조일병자수호조규)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제1조는 이렇게 시작한다. “조선국은 자주국이니 일본국과 더불어 평등한 권한을 갖는다.” 얼핏 보면 조선의 자주를 인정하는 듯 보이나 이는 조선에서의 청국 세력을 의식한 문구에 불과했다. 일본은 이 조약에서 부산항 이외에 2개의 항구를 더 개방할 것과 치외법권과 해안측량권을 요구했다. 이 같은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조선은 쇄국을 깨고 개항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조약은 조선인이 일본에서 누릴 권리는 거의 없고, 일본인이 조선에서 누릴 권리만이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일본으로서는 1858년 영일조약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그동안 일본은 구미 각국과 불평등조약을 강요받았는데, 이번에는 자신들이 당한 것을 그대로 조선에 되갚은 것이다. 일본은 조선 진출의 교두보로서 부산, 원산 및 인천 3개 항구의 개항을 요구했다. 일본이 조약을 맺으려 했던 주된 목적은 무엇보다 조선에서 무역 활동을 하는 일본 상인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우월한 지위를 보장받으려는데 있었다. 아울러 일본은 조선에 진출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를 확보하려 했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속내를 전혀 알지 못하고 준비 없이 맺어진 불평등조약은 곧 그 피해가 나타났다.

 

3.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18768월 경기중영에서 조선의 대표 조인희(趙寅熙)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 사이에 1차 회담이 개최되었고, 3차에 걸친 회담 끝에 통상장정을 체결했다. 그런데 통상장정에는 관세에 관한 조항은 완전히 빠져 있었다. 824일 미야모토 고이치는 조인희에게 편지를 보내 무관세 무역에 대한 동의를 받아냈다. 일본과 조선이 모두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는 내용은 표면상 동등한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나 일본이 조선에 수출하는 상품은 기계를 통해 대량으로 생산되는 공산품이고, 조선이 수출하는 상품은 농산물인 미곡이었다.

양국의 경제 상황이 대등하지 않은 가운데 조인된 무관세 무역은 조선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개항 초기 정부 관료들은 이러한 관세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것이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당연히 몰랐다. 두모포(현재 부산 동구 수창동) 사건이 터지면서 조선 정부는 재정수입이라는 측면에서 관세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무관세 조항을 규정한 일본과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일본은 아편전쟁 이후 일본 내부 준비를 마치는 데 주력하였다. 이 일을 위해 내부적으로 치열하게 다투면서 일본을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고 나서 구미를 배우기 위해 해외에 유학생을 집중적으로 파견하여 구미를 견학하게 하였다. 자체 정비를 마치는 과정이 35(1840-75)의 기간이었다. 그 과정을 끝내자 이제 임진왜란 때 이루지 못한 정한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조선 침략의 일보가 운양호 사건이었다. 똑똑바보인 영악한 고종은 이 사건이 일본 정부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개항을 서둘렀다. 하나님의 절묘한 섭리 가운데 그도 모르는 망국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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