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사관으로 본 韓日近代史” , 박호용 교수의 한일근대사 강의 (34)

1. 친정을 시작한 고종에게 당면한 두 가지 중요한 고민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재정 고갈이고, 또 하나는 외세의 개항 요구였다. 고종은 등극 첫날 세 가지 보고를 받았다. 호조로부터 받은 첫 보고는 선왕 장례 비용의 부족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 죽었는데 그 상()을 치를 돈이 그 나라에 없었다. 그래서 수렴청정 중이던 조 대비는 왕실 예산에서 5만 냥을 각출해 그 근심을 덜도록 했다.

비변사로부터 받은 두 번째 보고는 철종이 죽고 새 왕이 등극한 사실을 청나라 황실에 알려야 하는데, 그 사신 파견 경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 대비는 왕실 금고를 열어 국가 금고인 호조에 보냈고, 다음날 호조에서 6,000냥을 꺼내 중국으로 보냈다. 국가 예산 부족은 차라리 나았다. 원래 있는 예산에서 이리저리 끼워 맞추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회 그 자체였다.

청나라 사신 예산을 어렵게 해결하고 닷새 뒤인 1221, 비변사로부터 날아온 세 번째 보고는 농민 반란 무리인 동학 집단이 경상도에 퍼져 있다는 소식이었다. 동학의 수괴(최제우)를 경상감영으로 따로 이송해 별도로 조사하도록 명했다. 경상도 1,000리에 사는 백성이 이 사실을 알면 시끄러워지니 조용히 처리하라는 특별한 지시였다.

그런데 새 왕의 아버지 대원군에게는 은 1,000냥짜리 부동산을 선물하고, 매년 곡식을 내리는 의법조치는 유예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종친부 예산은 크게 증액했다. 1864년부터 1907년까지, 앞으로 보게 될 44년 고종 치하는 정확하게 이 패턴으로 운영되었다. 국가 예산은 이리저리 변통해 해결하고, 급증하는 사회 모순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닫는 아주 일관된 패턴으로 고종 정부는 운영되었다.

 

부국강병 대신

자신의 배를 채우기 급급한

불통의 고종 정부

대원군과 고종
대원군과 고종

 

2. 한편, 1840년에 시작된 아편전쟁은 동아시아 삼국에 대한 서구 침탈의 신호였다. 중국은 직접 전쟁을 당하는 상황이었고, 이를 지켜보던 일본은 엄청난 충격 속에 나라를 지킬 방도가 무엇인지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하였다. 그런 중에 250년 동안 평온하던 일본 열도에 185363일 오후, 일본의 수도 에도(동경) 앞바다 우라가(浦賀) 항에 미국 동인도 함대 소속 페리 제독이 이끄는 4척의 흑선(黑船, 구로후네)이 나타나 개항을 요구하였다. 불과 4척의 증기선(조키센)이 가져온 충격에 일본은 개항은 서둘렀다. 일본 근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조선은 바깥세상이 얼마나 심각하게 돌아가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말처럼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세도정치의 부패는 급기야 진주민란(1862)이라는 민중봉기로 이어졌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창시된 동학(東學)에 빠져들어 갔다(1860).

 

급변하는 정세에도

깊이 잠든 조용한 아침의 나라

이런 즈음에 쇄국으로 일관하던 대원군은 두 차례의 전쟁, 즉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인한 병인양요를 맞았고(1866), 이어서 미국과의 통상 마찰로 인한 신미양요를 당했다(1871). 외세에 대한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무조건 쇄국으로 일관하던 조선 정부는 급기야 1875년 미국의 함포 외교를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는 일본에 아무 준비없이 불평등조약을 강요당했다(1876). 그것이 훗날 무엇(망국)을 의미하는지도 모른채 말이다.

 

3. 국가의 목표는 국민의 행복이고, 이를 위한 두 가지 수단은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이다. 고종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최고 지도자인 왕이었다. 그런 그가 국가를 어떤 방식으로 운영했는가? 부국을 하는 대신 자기 금고를 채웠고, 강병을 하는 대신 강병에 투입할 국가 자원을 개인 호기심과 탐욕을 채우는 데 소모했다. 고종의 행적을 말해주는 한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은 이상설을 비롯한 이준과 이위종을 밀사로 파견했다. 그들은 일본의 야만성을 고발하기 위해 헤이그에 갔다. 이때는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간 상태였고, 조선의 군대가 해체된 상태에 있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열사 (좌측부터 순서대로)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열사 (좌측부터 순서대로)

아버지 이범진을 따라 미국과 러시아, 프랑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위종은 스물 세 살의 청년이었지만 외국어에 능통했다. 기는 기자들 앞에서 준비한 연설문을 꺼내 읽었다. 연설문 제목은 한국을 위한 호소문’(A Plea for Korea)이다. “일본 정치가들은 늘 일본이 일본만이 아니라 모든 문명과 국가의 상업적 이익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략) 하지만 놀랍고 슬프게도 일본은 정의롭고 평등한 기회를 보장한다는 구호와 달리 추하고 불의하며 비인도적이고 이기적인 야만스러운 행동을 보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위 인용문 가운데 ‘(중략)’으로 가려진 부분을 열어보자.

잔인한 지난 정권의 학정과 부패에 질려 있던 우리 한국인은 일본인을 희망과 공감으로 맞이했다. 우리는 일본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만민에게 정의를 구현하며 정부에 솔직한 충고를 해주리라고 믿었다. 우리는 일본이 그 기회를 활용해 한국인에게 필요한 개혁을 하리라고 믿었다.” 황제 신임장을 소지한 외교관 이위종이 행한 연설문에 등장한 잔인한 정권은 바로 황제 고종이었다. 잔악한 일본을 성토로 채워도 모자랄 연설문에 지난 정권의 학정과 부패를 고발한 것이다. 고종 황제가 다스린 나라가 학정과 부패의 나라라고 고발한 것이다. 이 고발은 고종이 자주 독립을 염원하는 개혁군주였다는 고종 맹신자들의 허황된 신화를 깨뜨리기에 충분한 사실(fact)이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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