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사관으로 본 韓日近代史” , 박호용 교수의 한일근대사 강의 (33)

1. 고종! 그는 어떤 인물인가? 한마디로 조선을 망국으로 이끌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드라마 조선의 최후에서 고종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카이로스적 시간표에 따라 절묘할 정도로 기막힌 연기를 펼친 주연 배우였다. 1863128() 철종이 죽자 조 대비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12세의 명복(命福)을 왕으로 세우는 그가 고종이다. 등극 후 새 왕이 교서를 발표했는데, 그 첫머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인조(仁祖)의 직계 후손이다.” 등극 첫날 새 왕은 스스로를 인조의 적통이라고 선언했다. 예사롭지 않은 불길한 선언이었다.

인조가 누구인가? 필자가 언급했듯이 인조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망국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다. 그는 반군을 이끌고 광해군을 몰아낸 후 왕이 된 사람이다. 그는 반정 동지인 사대부들에 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오랑캐라고 업신여긴 여진족(만주족)의 나라()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르고, 청 황제에게 굴욕적인 수치를 당했던 자다. 그런데 고종이 자신을 그런 자의 직계 자손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고종 조선후기 제26대(재위: 1863~1907)
고종 조선후기 제26대(재위: 1863~1907)

그러니까 그때(인조) 망했어야 할 나라가 카이로스적 때가 차서 이때(고종)에 이르러 망하게 된 것이다. 고종을 비운의 개혁군주라고 변호하는 이들이 있으나 그것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고종은 나라를 말아먹은 매국노였다. 왜 그러한가를 이제부터 자세히 살펴보자.

 

2.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을 행한 대원군은 그동안의 적폐를 청산하고자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가운데 노론 사대부(위정척사파)들의 아지트인 만동묘와 서원을 일부만 남겨놓고 전부 철폐해 버렸다. 주자성리학을 신봉하는 노론 사대부(위정척사파)들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해서는 동조했지만, 자신들의 기득권의 근간인 만동묘를 비롯한 서원을 대부분 철폐한 것에 대해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때를 기다리던 노론 사대부들은 무리하게 추진된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에 따른 민생 파탄을 빌미로 그를 쫓아내고자 시도하였다. 이에 앞장선 자가 쇄국론자 면암(勉庵) 최익현(1833-1906)이었다.

최익현은 상소를 통해 고종의 친정을 강력히 요구했고, 때를 기다리던 고종도 자신의 뜻을 대신한 최익현의 상소를 받아들여 전격적으로 친정을 선포했다. 권력욕에 불타던 아들 고종은 노론 사대부들과 연합하여 마침내 아버지를 끌어내리고 스스로 권력을 차지했다. 그런데 최익현의 상소는 진정으로 고종을 위한 것도 아니고 나라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자파의 이익, 즉 노론(위정척사파) 해체를 일관되게 주장하는 대원군에 맞설 동맹군으로 고종을 선택한 것이다. 그 근저에는 숭명배청를 주장한 인조 시대의 사대부들처럼 조선 국왕은 명나라 천자를 섬기는 통로인 제후에 불과하다는 교조적인 사대주의가 깔려 있었다.

고종은 44(재위 1863-1907) 동안 왕위에 있었던 인물이다. 대원군 섭정 10년을 제외하더라도 무려 34년을 왕위에 있었다. 조선 왕 가운데 영조(52), 숙종(46), 선조(42), 중종(38)에 이은 다섯 번째로 긴 왕권을 행사한 인물이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왕이 성군(聖君)이 되느냐 암군(暗君)이 되느냐 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보다도 지도자의 정신과 태도’(덕목)이다. 고종은 암군에 딱 적합한 인물이었다.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고종은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생을 자기 일신의 안위와 왕권을 우선시한 사람이다. 나라는 망하더라도 자신의 왕위는 지켜야 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인물(egoist)이었고,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짓도 할 수 있는 무서울 정도로 영악한 인물이었다.

최익현과 그의 면암문집
최익현과 그의 면암문집

 

3. 고종의 재위 기간은 안으로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기초한 조선 왕조 500년 동안의 모든 모순이 분출하는 격동의 시대였고, 밖으로는 일본을 위시한 서양 세력이 문호를 개방할 것을 집요하게 요청한 시대였다. 이 같은 내우외환의 시대에 고종은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온 세계가 근대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진통을 겪던 시기에 왕권과 국권을 혼동했던 사람이 고종이다. 고종에게 자주와 독립은 왕권의 자주와 독립이었다.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설령 그들이 자국민이든 외국 군대이든 모두 적이었다. 반면 한순간이라도 흔들리는 왕권을 지킬 수 있다면 훗날 그들이 결국 왕권, 나아가 국가까지 무너뜨리는 위험한 존재일지라도 기꺼이 도움을 청했다.

고종은 절대군주로서의 왕의 자리와 권력이 가져다주는 각종 이익에 집착한 왕이었다. 따라서 왕권 유지에 방해가 되거나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가차 없는 철퇴를 가한 잔인하고 이기적인 군주였다. 고종과 관련된 이런 일화가 있다. 자신이 왕이 되어 만백성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었다는 것을 확인받는 순간 그가 내린 첫 어명은 이렇다. “우리 집 앞 골목의 군밤 장수를 죽여라. 그놈은 다른 애들 다 주면서 나한테는 공짜로 군밤을 준 적이 없다.” 왕이 되어 처음으로 생각한 것이 지난날 군밤 장수가 자신에게 행한 섭섭한 일에 대한 복수였다니, 고종은 참으로 옹졸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고종은 민 왕후에 둘러싸여 아무 생각이 없는 어리숙하기 그지없는 멍청한 인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고종은 잔머리 굴리기의 명수라 할만큼 영악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었다.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매사를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도 끝까지 관철하고자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며, 잘못의 책임은 타인에게 전가하는 데 노련한 소인배 군주였다. 고종은 영악했으나 영리하지 못했고, 교활했으나 정교하지 못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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