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사관으로 본 韓日近代史” , 박호용 교수의 한일근대사 강의 (37)
1. 흥선대원군은 며느리를 한미한 집안 출신에서 간택하고자 했다. 그 까닭은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택한 것이 부대부인 여흥 민씨 가문 중에서 친척뻘 되는 민치록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다. 그가 훗날 명성황후로 불린 민 황후(본명은 민자영)이다. 그는 1851년 태어났고, 16세 때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어 슬하에 4남 1녀를 낳았다. 그러나 대부분 건강이 좋지 않아서 다들 어린 나이일 때 잃었고 한 명만 살아남았는데, 그가 훗날 왕이 된 순종(1874-1926)이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자신이 선택한 민 황후가 평생의 정적이 될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 역사는 인간의 의지로 안 된다. ‘조선의 최후’는 정치 권력을 놓고 두 사람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싸우는 사이에 조선은 서서히 망해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1873년 이후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고종은 민씨 척족 세력에 놀아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후 9년 동안 민씨 척족 세력들은 이전의 세도정치 때 못지않은 부패 집단이 되었다. 그래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왕궁에 난입한 병사들은 민씨 척족들만이 아니라 모든 부패의 원흉이자 몸통인 민 황후를 죽이고자 혈안이 되었다.
2. 임오군란을 일으킨 구식 군인들은 고종의 친정 이후 권력을 장악한 민 황후와 그 일족을 철천지원수로 여겼는데, 그 까닭은 매관매직, 세도정치, 외세 끌어들이기, 그리고 궁중에서 푸닥거리와 연회로 흥청망청 국고 낭비를 일삼아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민씨 척족 세력들의 탐욕과 악행을 기록한 황현은 서울의 민영주, 관동의 민두호, 영남의 민형식을 ‘세 명의 큰 도둑’으로 꼽았다.
민영주는 민영준의 종형, 민두호는 민영준의 아버지, 민형식은 민응식(장호원의 충주목사)의 사촌 형제로서 임오군란 때 민 황후가 장호원으로 피난을 갔을 때 머물렀던 집주인이었다. 민영주는 서울의 부자와 거상들의 재물을 갈취할 때 갖은 악형을 가하여 돈을 뜯어냈다. 성질이 너무 거칠고 악독하여 사람들은 그를 ‘민 망나니’라고 불렀다. 사형집행인을 속된 말로 ‘망나니’라고 불렀는데, 대개 이루 말할 수 없이 악하고 천한 자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민영준의 아버지 민두호는 끝없는 탐욕으로 인해 백성들은 그를 ‘민 쇠갈고리’라고 불렀다. 황현은 민형식에 대해 “그런데 저 민형식 같은 놈은 고금에 처음 있을 정도였다. 백성들은 그를 ‘악귀(惡鬼)’라고 하였으며, 때로는 ‘광호(狂虎, 미친 호랑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그가 능히 산 채로 사람을 씹었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했다. 동학혁명 당시 국가 세입이 480만 양 정도였는데, 민형식 개인이 착복한 돈이 7분의 1이 넘는 70만 냥(약 350억원)이나 되었다.
민씨들이 벌인 부패행각은 끝이 없었다. 그 가운데 가장 심한 하나를 고르라면 민영휘(본명 민영준)다. 민영휘는 세금을 강제로 거두거나 뇌물을 긁어모으며 임금과 불가결한 관계를 유지하며 권력을 전횡한 지 오래되었다. 논밭에서 거둬들이는 소작료가 100만 석이나 되는데 조선, 중국, 일본 세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갑부로 중국 신문에까지 실렸다.
민영휘는 1894년 동학혁명이 터졌을 때 타도 대상 1호였다. 동학농민군이 전주를 함락할 무렵 고종과 함께 청나라 군사 청병을 주도한 사람도 바로 민영휘였다. 2년이 지난 1896년에도 조선 팔도 어린이나 하인까지 ‘조선의 말로를 기강이 문란한 경지로 몰고 간 자가 민영휘라고 입에 담을 정도였다.
황현은 전국의 큰 고을은 대부분 민씨들이 수령 자리를 차지했으며, 평양 감사와 통제사는 민씨가 아니면 할 수 없게 된 지가 10년 이상 되었다고 통탄했다. 한 마디로 왕비 민씨 척족 세력은 단군 이래 최악의 부패 정권으로 소문이 났다. 이들의 미친 듯한 부패 전횡을 타도하기 위해 젊은 개화파 혁명가들이 목숨을 걸고 항거한 것이 1884년 갑신정변이다.
3. 민 황후는 귀한 아들을 세자로 삼기 위해 청나라 서태후(西太后)와 리홍장에게 엄청난 뇌물을 갖다 바쳤다. 또한 갑신정변 때 칼에 맞아 사경을 헤매던 민영익을 살려준 대가로 알렌에게 10만냥을 건넸다(약 50억원). 당시 조선에서 재산이 2,500-3000냥이면 부유한 축에 속할 때의 일이다. 민 황후의 정체성은 공(公)과 사(私), 국가와 집안이 분리되지 않았다. 왕실이 이처럼 비상식적으로 재물을 낭비하는 바람에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국고는 완전 바닥이 났다.
민 황후는 미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독특한 여성이었다. 이런 여성이 왕비가 되었으니 내전은 역술가 · 박수 · 무당들의 소굴이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던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궁에서 푸닥거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민 황후는 병약하게 태어난 왕자의 무병장수를 빌기 위해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마다 쌀 한 섬, 비단 한 필, 동 1,000냥씩을 바쳤다. 또 매일같이 백미 500석으로 지은 쌀밥을 한강에다가 뿌렸다. 1880년에는 세자가 마마를 앓다가 회복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증광과(增廣科)라는 임시과거를 실시했다.
임오군란 때 민 황후는 간신히 궁궐을 탈출하여 장호원에서 은거하던 중 박창렬이란 신들린 무당을 만났다. 이 무당은 민 황후의 환궁 날짜를 예언했는데, 신통하게도 이것이 적중하여 왕비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민 황후는 이 무당을 진령군(眞靈君)으로 봉하고, 이 무당을 위해 혜화동에 관운장 사당인 북묘(北廟)를 지어주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고종은 이 북묘로 피신해 목숨을 건졌다. 이 요사한 무당은 아무 때나 궁궐에 들어가 고종과 민 황후를 만났고, 국왕 부부에게 금은보화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받았다.
진령군은 주술의 이름으로 인사에 개입했고, 무당의 수양아들은 벼슬아치와 어울렸다. 이른바 조선판 국정농단사건이 벌어졌다. 고종과 민 황후는 무당 진령군의 말이라면 들어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밤에 무당이 고종과 왕비에게 한 말은 다음 날 어김없이 어명으로 내려왔다. 한 나라의 국왕 부부가 주술에 기대어 왕조를 통치한 것이다. 참다못한 전 형조참의 지석영은 “사람들이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황현은 “부끄러운 줄 모르는 대신들이 앞다투어 무당에게 아부하니, 자매라 부르기도 했고, 혹은 수양아들이 되기를 원하기도 했다. 조병식, 윤영신, 정태호가 특히 심했다”고 기록했다. 결국 진령군은 갑오경장 때 사형을 선고받고 목이 잘렸다. 고종과 민 황후는 개혁이나 개방을 통한 국력 양성보다는 무당을 통한 요행에 국가의 장래를 걸었던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제정 러시아가 망할 때 요승 라스푸틴(1869-1916)이 있었던 것처럼, 조선이 망할 때 부패한 민씨 척족 세력들과 민 황후, 그리고 무당 진령군이 있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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