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사관으로 본 韓日近代史” , 박호용 교수의 한일근대사 강의 (39)

1. ‘한국의 근대화와 복음화라는 관점에서 갑신정변(1884)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의 배경과 결과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은 일본에 이어 1882522일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맺었다. 국교수립이 이루어진 지 1년 후인 18835, 미국에서 초대 전권공사 루시우스 푸트(L. Foote), 조선에서는 9월에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하는 견미사절단이 각각 조약비준서를 상대측에 전달하면서 양국 간의 외교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국과의 조약은 성사되었지만 아직까지 선교의 자유는 허락되지 않은 상태였다.

섭리적 관점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은 일본을 통한 근대화는 실패했지만,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과 박영효는 한국 복음화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에 개신교 선교가 허용되기 전 일본 주재 미국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1824-1907)는 이수정(1824-1885)과 자주 만나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수정의 소개로 박영효와 김옥균을 만나게 되었다. 맥클레이 선교사는 1884624일 한양에 들어왔고, 그는 김옥균을 만나 조선을 돕겠다는 서류를 내놓았다(630). 며칠이 지난 후에 김옥균은 병원 사업과 학교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임금의 윤허를 받았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미국 감리회 선교사 맥클레이는 조선에 머무는 동안 훗날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머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다. 그런데 한국에 선교사를 가장 먼저 상륙시킨 것은 미국 북장로회였다. 그들은 이미 헤론과 언더우드를 선교사로 파견할 것을 결정해 놓았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 먼저 부임한 사람은 의료선교사 알렌(1858-1932)이었다.

알렌의 조선 부임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라 아니할 수 없다. 본래 그는 중국 선교사로 가려고 준비 중에 있었는데, 사임을 하겠다던 전임 선교사 헌터가 사임을 미루며 중국에서 계속 일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외국인 의사가 필요한 서울로 옮겨 가도록 선교부가 설득하였고, 188498일 전격적인 결정에 의해 그는 한국행을 택하게 되었다. 922일 서울에 도착한 그는 미국공사관의 무급의사로 임명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로

조선에 부임한

알렌 선교사

2. 한편, 김옥균, 박영효와 함께 개화파의 일원이자 민 황후의 친정 조카인 민영익은 김옥균의 추천으로 보빙사로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고 왔다(1883).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 경험을 가진 자였다. 그런 그가 김옥균의 기대와는 달리 서구 세계를 순방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완고한 보수파로 변했다. 그는 선진 문명국이라 불리는 서구 국가들을 돌아보면서 부러움이 아닌 괴리감을 느꼈고, 조선에서 생각하는 개화의 모습과 개화에 성공한 나라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갑신정변의 주역들에 의해 칼에 맞았고, 의사 알렌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살아났다.

여기서 알렌과 민영익 치료사건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자. 1884124, 갑신정변 때 보수파의 핵심 인물인 민 황후의 조카 민영익은 개화파의 자객의 칼에 일곱 차례나 맞아 절명 상태에 있었다. 당연히 현장에서 죽었어야 할 그가 죽지 않고 부상을 입었다. 이것이 조선에서의 개신교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리는 계기가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랴. 이 엄청난 사건은 한국 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극적 드라마요 거대한 섭리가 아닐 수 없다.

민영익의 상처는 한의학으로 고칠 수 있는 상처가 아니라 수술을 해야 할 상처였다. 이때 고종의 고문인 독일인 묄렌도르프(1848-1901)가 알렌을 주선하였다. 알렌은 자기 앞에 보수당의 거두가 누워 있고, 그가 생사의 지척에서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그것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만약 이 수술이 실패한다면 그것은 자기 개인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가 대표하고 있는 교회, 자기가 속한 미국의 체면, 더구나 한국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김건배 화백이 세브란스(광혜원-제중원) 병원 개원 130주년을 맞아 그린 [호러스 N,알렌 박사의 민역익 자상(刺傷) 치료] 작품.
김건배 화백이 세브란스(광혜원-제중원) 병원 개원 130주년을 맞아 그린 [호러스 N,알렌 박사의 민역익 자상(刺傷) 치료] 작품.

알렌은 민영익 치료의 중요성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수술은 스물일곱 군데를 꿰매고 한군데는 혈관을 경색시켜 잡아매고 심을 넣어 반창고를 붙이고, 상처마다 가제와 붕대로 감았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어떤 한방(漢方) 치료와도 전혀 다른 의술이었다. 그 의술의 위력이 이 절박한 순간에 입증되었다. 민영익의 완쾌는 3개월이 걸렸다. 죽은 자를 살려낸 알렌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고종과 민 황후로부터 1천 냥의 하사금을 받았다. 그다음 해인 18852월에는 시내 계동에 있는 홍영식의 집을 하사받아 광혜원(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알렌은 자연히 민영익과 왕가의 주치의가 되었다.

출처 : 세브란스 병원 연혁
출처 : 세브란스 병원 연혁

 

민영익이 맞은 칼날을

조선 선교와 근대화의

도구로 삼으신 하나님

3. 세계 교회는 일제히 이 소식을 만방에 종을 쳐 알렸다. 한국이 옛 한국이 아니고, 이제 그리스도교 문명의 햇빛과 바람이 활짝 열린 대문으로 밀어닥칠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민경배(閔庚培)는 이렇게 말했다. “알렌의 공로와 그 역사적 위치에 대해서 우리는 더 이상의 말로 조리(調理)를 흐리게 할 필요가 없다. 대저 알렌 없이 오늘의 한국과 그 교회가 이만한 자리와 역사에 와 있다는 못하였을 것이다.”

민영익이 김옥균과 함께 근대화에 매진했다면 상당히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화를 위한 정변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 대신에 정변으로 인한 민영익의 치명상과 알렌의 치료는 미국을 통한 한국의 근대화는 물론 복음화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알렌의 민영익 치료를 계기로 미국 출신 선교사는 조정 차원에서 특별 후원을 받았다. 덕분에 미국 선교사들은 개신교 선교활동에서 매우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1세기 앞서 조선에 전파되었던 천주교보다 빠른 속도로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895년에 746년이었던 조선의 개신교도 수는 5년만에 18,081명으로 급증했다.

알렌의 민영익 치료사건은 일본을 의지하여 한국을 근대화시키고자 한 인간적 노력은 무참히 실패로 끝난 반면에 한국을 복음화시키고자 한 하나님의 전략은 멋지게 성공한 드라마틱한 사건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세속적 역사를 통해서 그의 나라를 확장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접하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을 통해서 그의 목표를 이루어 가신다(다음호에 계속).

관련기사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