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희 목사 】어렵게 고차원적으로 공부할 때 삶이 변화된다.

  • 입력 2023.02.01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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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설교가 아니라 거룩을 위한 노력과 고난이 축적되어야

이대희 목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Th. M).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성경학박사과정(D.Litt)을 졸업했다. 예장총회교육자원부 연구원과 서울장신대 교수와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그동안 성경학교와 신학교, 목회자와 교회교육 세미나와 강의등을 해오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에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평생말씀학교인 "예즈덤성경대학"을 20년째 교수하고 있으며 극동방송에서 "알기쉬운 기독교이해" "크리스천 가이드" "크리스천 습관과 인간관계" "재미있는 성경공부" "전도가 안된다구요"등 성경과 신앙생활 프로그램 담당했으며 다양한 직장 소그룹 성경공부 사역을 하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현장 사역 경험(소형.중형.대형교회,개척과 담임목회)과 연구를 토대로 300여권의 저서가 있으며 "이야기대화식 성경연구"와 "30분성경교재 시리즈"와 다양한 실천 프로그램을 제시한 저서(“유대인 밥상머리 자녀교육법” (2016년 세종도서 우수도서 ). “한국인을 위한 유대인공부법” (대만번역 출간), “유대인의 파르데스공부법“ "되새김 120일 쉬운 통독" 등 다수가 있다. 현재 꿈을주는교회 담임목사. 예즈덤성경교육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이대희 목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Th. M).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성경학박사과정(D.Litt)을 졸업했다. 예장총회교육자원부 연구원과 서울장신대 교수와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그동안 성경학교와 신학교, 목회자와 교회교육 세미나와 강의등을 해오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에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평생말씀학교인 "예즈덤성경대학"을 20년째 교수하고 있으며 극동방송에서 "알기쉬운 기독교이해" "크리스천 가이드" "크리스천 습관과 인간관계" "재미있는 성경공부" "전도가 안된다구요"등 성경과 신앙생활 프로그램 담당했으며 다양한 직장 소그룹 성경공부 사역을 하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현장 사역 경험(소형.중형.대형교회,개척과 담임목회)과 연구를 토대로 300여권의 저서가 있으며 "이야기대화식 성경연구"와 "30분성경교재 시리즈"와 다양한 실천 프로그램을 제시한 저서(“유대인 밥상머리 자녀교육법” (2016년 세종도서 우수도서 ). “한국인을 위한 유대인공부법” (대만번역 출간), “유대인의 파르데스공부법“ "되새김 120일 쉬운 통독" 등 다수가 있다. 현재 꿈을주는교회 담임목사. 예즈덤성경교육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삶의 변화를 이루는 일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말씀을 듣고 공부해도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다. 수십 년 설교를 들어도 변화가 잘 안 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쉽게 접근했기 때문이다.

설교를 하든지 말씀을 공부한 내용이 너무 쉽고 단순하면 변화하기 어렵다. 삶의 변화는 어렵게 고차원적으로 해야 가능하다. 저차원적인 쉬운 것을 하면 삶의 변화를 이루기 어렵다. 어려운 고난 없이는 변화도 없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함이라” (1: 29)

성경은 구원 이후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을 필수적으로 통과해야 함을 말한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부름에 합당한 사람으로 세워져 간다. 왜 구원을 받았는데 고난이 필요한가? 그것은 계속 자기를 죽이는 길은 고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난의 과정을 통해 내가 할 수 없음을 고백하면서 주님을 신뢰하여 의인의 삶을 살게 된다.

변화는 고난 속에서 일어난다. 평안한 가운데서는 사람의 변화는 힘들다. 바보상자인 티브이나 영상을 보면서 평안하게 들으면 삶이 달라지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설교나 강의는 변화가 미미하다. 설교자나 강사가 설명을 잘 가르치면 우리는 변화가 잘 될 것이라고 착각을 한다.

학생들은 공부를 잘 알려주는 명강사를 찾아 이러 저리 이동한다. 이것은 성도들이 명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러 교회를 순례하는 것도 같은 현상이다. 이렇게 해서는 진짜 실력을 키울 수 없다. 삶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타인이 해주는 것으로 변화를 이룰 수 없다. 자발적인 실천과 노력을 통해서만 변화가 이루어진다.

교회마다, 목회자들을 보면 대부분 설교에 목숨을 건다. 필자도 30-50대 초반까지도 설교에 중점을 두었다, 신학교 등에서 설교학을 교수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예수님이 우리처럼 설교에 목숨을 걸었을까? 질문을 갖고 성경을 깊게 살펴보았다. 성경을 볼수록 우리와 같은 설교는 아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처럼 설교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시간을 가르침에 집중했다, 바울도 어떠했을까? 역시 바울 서신서등을 살펴보아도 우리처럼 짧은 단순한 설교보다는 깊은 가르침에 목숨을 걸었다. 마지막에 이를수록 제자 삼는데 초점을 두었다, 대중설교로는 제자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설교에 너도 나도 올인한다, 과연 그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훈인지 솔직한 점검이 필요하다. 단번에 효과를 보려고 하면 설교가 강력하다. 일시적인 도전과 깨달음을 주는 강점이 있다. 하지만 그 뒤를 가르침이 이어지지 않고 계속 설교만 듣는다면 삶의 변하로 이어지기 어렵다, 그럼에도 설교를 계속 고집한다면 설교자와 청중은 모두 의도가 무엇인지 점검이 필요하다. 혹시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설득과 도전을 주는 15분짜리 세바시나 테드 강연과 같은 감동 받는 설교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사단의 속임수에 속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그렇게 나가면 교회의 위기는 더 가속화 될 것이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설교를 듣고 명설교를 들으면 변화가 강력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막상 듣는 당시에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지만 조금 지나면 휘발성이 강해서 금방 사라진다. 설교를 들었는데 예배당 밖에 나오면 아무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은 너무 당연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뇌는 편하게 듣고 보는 것은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의 뇌는 힘든 것을 하지 않으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사람들은 편하게 듣고 편하게 신앙생활 하려고 한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가진 죄인된 특징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해주는 것을 좋아 한다. 교회에서 예배하는 모습을 보면 금방 이해 할수 있다. 갈수록 모든 것을 다 해결하고 그저 편안하게 눈만 뜨고 손조차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설교를 듣는다. 이제는 찬송가도 없고 성경책도 없다. 심지어 찬송도 다른 사람과 찬양대가 다 해준다.

모든 것을 화면에 보여주고 성경의 내용도 모두 해설해주고 정답까지 다 반복하여 알려준다. 그렇게 되면 듣는 사람은 편하고 좋다. 그리고 다 이해를 한다고 착각하며 만족한다. 그러나 막상 생활에서 실천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목사님이 다 해주었기에 자신이 스스로 하는 것은 힘들어 한다. 문제가 닥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다시 설교를 찾는다. 이런 일을 수십 년 반복한다. 그러면 나중에는 교회에 성인 아이 신앙인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고난과 환란이 닥치면 예수님 제자들처럼 모두 흩어질 것이다. 설교의 목적은 삶의 변화에 있다. 그런데 우리의 설교는 변화가 힘든 구조로 점점 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래도 계속 이런 방식의 설교를 고집할 것인가?

변화는 스스로 노력하는 수고를 할 때 일어난다. 자신을 버리는 수고와 고난을 감당 할 때 변화는 잘 일어난다. 다만 내가 노력하는 것이 아닌 내속에 있는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행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닌 외적인 압력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그런 행동이다. 진정한 행함이 아닌 속고 있는 행동이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삶이다.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은 내가 죽고 포기하고 수고하는 것을 전제한다. 수고와 고난을 통해 나는 죽고 그것으로 내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것이 자기 죽음이다. 날마다 죽는 수고가 있지 않으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을 드리지 않는 상황에서 성령은 임하지 않는다. 수고와 대가를 지불하고 자기 포기가 있을 때 성령이 역사한다.

제자 삼는 영역에서 주의 종과 훈련 받는 사람들을 보면 크게 두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빨리 시간을 단축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학교를 졸업하고 단기전으로 사역을 하는 사람들과 느려도 장기전으로 축적하여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그 비율은 10:1정도 된다.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은 아주 적다. 이런 사람은 자격증과 졸업증과 기간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 깊은 내공에 시간을 바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 제자가 나올 소지가 많다. 그런데 빨리 무언가를 얻어서 급하게 사역을 하고 자격증이나 학위증으로 실력을 보이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자격을 얻고 공부를 한 사람은 오래가지 못하고 방법도 늘 자기가 경험한 것을 넘어 서지 못한다. 자격증으로 증명하는 사람은 사역도 자격증을 주는 일을 주로 하고 사역이 방향도 그렇게 한다.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본다. 자기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은 억지로 안 된다.

목회자가 목회와 양육에 전심으로 수고했던 한국교회 초기는 목회자들이 능력이 있고 목자의 본이 많았다. 그래서 교회가 부흥하고 좋은 목회자가 많다. 그들은 많은 배움은 없었지만 복음의 열정과 전도와 기도에 열심이었고 원색적인 복음 전파를 했다. 죽기를 갖고 전도하며 교회를 섬김으로 순교하는 일도 많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필자가 가르치는 예즈덤성경대학을 다녀간 분들만 해도 약 5,000명 정도는 된다. 하지만 꾸준하게 말씀을 따라 오는 사람은 아주 적다. 많은 수가 와서 졸업증을 받았느냐 보다 제자의 길을 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단 한 사람이라도... 결국은 그 길을 끝까지 가는 사람이 제자로 남는다. 거기에서 믿음이 결정된다. 그래서 제자의 길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는 길이다. 주님의 제자들을 보아도 이것은 진리다.

왜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고 이리저리 표류하는 사람이 많을까? 거기에 제자사역의 비밀이 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3년의 축적 시간이 있었다. 예수님 같이 능력 있는 분도 그렇게 하셨는데 우리는 그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어디엔가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무언가 목표와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아브라함과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등을 보아도 단기간 승부로 이룬 사람은 하나도 없다. 성경의 인물 중에 그런 제자가 있는가? 적어도 20년 이상은 된다. 그 시간은 자기가 죽는 시간이다. 말씀을 붙잡고 꾸준히 공부하고 그 앞에서 자기를 죽이는 사람만이 나중에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그런데 자칫 착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주의 길을 간다고 생각하면서 합리화 할 수 있다. 많은 분들이 예배드리고 주일성수하고 말씀 읽고 살면 이 정도는 준수한 것 아닌가 더 어떻게 시간을 낼 수 있는가 하면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 만해도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설교에 목숨을 건다면 그것은 말씀에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다. 그런 설교는 제자의 십자가를 따르는 설교는 점점 힘들어진다. 안 되는 일을 된다고 말하는 거짓된 설교로 나갈 가능성이 많다. 이렇게 되면 교회의 위험 수위에 거의 이른 것이다.

특히 사역자와 설교자는 기억하자. 사람들이 편안함을 추구하며 고난과 멀어질수록 변화는 더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지금 인도하고 설교하는 방식이 제자를 만들기 위함인가? 아니면 오천 명이 모인 팬들을 위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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