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환호하며 따랐던 5천명의 무리가 어느 날 더 이상 표적이 없자 모두 떠났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와 함께 다니던 제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 그때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때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 가오리까?”하고 대답했다(요6:68). 코로나19는 많은 명목상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앞으로 다가올 멸망을 앞둔 예루살렘 성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주님의 마음으로 한국교회와 목회현장을 보면 더 안타깝다. 지금은 “오직 성경”을 모토로 시작된 처음 종교개혁은 다시 개혁을 시작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 신학교육은 그동안 간과했던 “오직 성경”의 본질을 재조명하여 신학교육에 생명을 불어 넣는 실천 방안을 제시하고 이것을 온택트 시대속에서 위기를 맞이한 한국교회와 다음세대를 보면서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다시 부흥(Re-vival)을 이룰 수 있는지 실제적 방안을 찾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한국교회 속에 가장 시급한 것은 교회 모판인 신학교가 마른 뼈처럼 점차 화석화 되는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신학교는 갈수록 모집이 힘들고 어느 날 서구 신학교처럼 사라질 수 있는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지금 신학교가 개혁을 머뭇거리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서로 함께 갱신에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이것이 신학교와 교회 모두가 사는 길이다. 이런 점에서 먼저 신학의 점검이 필요하다. 이것이 신학교와 교회가 사는 길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선지자 에스겔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먹고 살아난 것처럼 신학교육에 말씀을 통째로 받아먹는 생명 체험이 일어나는 일이다. *1)
그동안 이성과 철학과 학문의 방법으로. 성경을 골라서 개념과 이론과 지식으로 습득했던 신학을 이제는 말씀을 영과 생명으로 보고 오직 성경의 정신을 바르게 해석하고 원리를 적용하는 신학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화석신학에 생기를 불어 넣는 생명신학으로 개혁
신학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뿌리와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의 “신학”은 주로 “서구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구신학은 헬레니즘 문화의 토양 속에서 이루어졌고 신학방법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고를 토대로 세워졌다. 그것이 오늘 한국의 신학에 전해졌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서구세계관은 영적인 것을 버리고 인간의 이성과 판단을 중시하고 신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인간의 보이는 현상과 물질세계의 가치를 우선으로 두는 세계관이다. 이것을 우리는 헬레니즘철학 방식이라 부른다. 개인적인 독립을 강조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 신학교가 이런 신학방법에 기초하다 보니 “오직 성경”의 본래 정신을 잊고 명제로만 이해하게 되었다.
헬레니즘의 토양 위에 세워진 신학
오직 성경을 이루기 위해 구약부터 내려오는 거대한 성경의 유산의 역사를 배제하고 결과와 개념만 강조하게 되었다. 삶과 과정이 없는 열매와 개념으로서 “오직 성경”이 강조 된 것이다. 초대 교부들이 성경의 정신인 오직 성경을 강조한 것은 좋았지만 반면에 히브리적 기독교적 유산을 정직하게 시험하지도 않고 무가치한 것이라도 쉽게 내던진 오류는 깊게 반성해야 한다.*2)
지금 한국 신학교육의 긴급한 과제는 이렇게 서구세계관으로 형성된 인본주의 신학에서 성경을 중심한 헤브라이즘 신학과 성경으로 다시 신학을 시작하는 일이다. 신학이 성경보다 이론적인 신학으로 자리 잡게 된 역사적 배경은 아주 오래전이다. 이것은 초대 교회가 이단과의 많은 논쟁을 거치면서 교회 안에서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변증하는 것이 교회를 보호하는데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신학방법론으로 사용된데 기인했다. 그때 당시 유행했던 그리스 철학과 수사학의 방법으로 헬라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교회는 설교와 교육의 방법에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이교도 스타일의 교육 방법이 도입되었으며 헬라 철학의 뿌리 속에서 기독교로 전환한 저스틴, 오리겐. 어거스틴 등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런 헬레니즘 방식은 계속 이어져 3-4세기를 주도했고 초기 기독교 방식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렇게 헬라 철학적 방법이 자리 잡으면서 교회는 점차 복음이 변질되었다.
이단에 맞서 교회를 보호하기위해 생겨난 신학
이것은 중세 로마교회 1,000년의 동안에도 계속 진행되었다.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고 이야기 했지만 정작 살아가는 방식은 세상적인 방법과 인본주의를 사용함으로 교회가 세상을 닮아가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사도들로 세워진 1세기 초대교회를 이어가기 보다는 이방의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내용은 복음이었지만 방식은 철학이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로마교회는 본질에서 벗어나 점점 세속화 되었다. 헬라 철학이 기독교를 잠식한 것이다.*2) 그동안 헬라철학이 로마교회를 지배했듯이 개신교도 철학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했다. 성경을 배우는 방법에서도 성경자체를 배우기보다는 성경에 관한 주변학문에 관심을 더 갖게 되었다.
성경 자체보다 주변 학문에 관심 두는 신학
히브리인들이 토라를 공부하는 중요한 헤브라이즘 정신은 리쉬마(Lishmah)이다. 이것은 성경을 도구로 삼으면서 공부하지 말고 말씀 그 자체를 즐긴다는 뜻이다.*3) 우리 신학교육의 한계는 신학과 성경을 세상 학문방식으로 공부한다는 점이다. 절대적인 성경을 공부하는데 성경을 나의 도구로 삼는 세상방식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사랑하는 방식과 공부하는 방법에서 벗어난 것이다. 성경은 다른 책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데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신분과 자격증을 얻고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얻는 목적처럼 성경을 목회자 자격증과 신학교 졸업증을 얻기 위한 방식으로 공부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사람에게 성령과 성경은 더 이상 계시하지 않는다. 아브라함 헤셀은 성경을 배우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헬라인은 이해하기 위해 배웠다. 히브리인은 경외하기 위해 배웠다. 현대인은 사용하기 위해 배운다“*4) 이것은 지금 우리 신학교에서 신학과 성경을 공부하는 방법을 새롭게 점검해야 함을 보여준다. 헬레니즘 공부방식은 주로 깨달음이나 도구로서 공부한다.
학습하기 위한 신학인가? 경외하기 위한 신학인가?
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지식적인 깨달음이나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면 그것은 인본주의 신학이다. 성경을 교회 부흥의 도구로 삼으면 금방 부흥이 일어나지 않고 성도들의 변화가 즉시 보이지 않으면 쉽게 성경을 버리고 세상의 다른 도구를 찾게 된다. 이것은 성경을 나의 도구로 생각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말씀자체를 사랑하는 성경공부가 진정한 하나님 공부다. 말씀을 도구화하는 순간 하나님은 우상이 되고 삶의 변화가 없다. 신학교에서부터 본문을 자체를 사랑하며 “성경 자체”를 배우는 법을 체험한다면 거기서부터 힘을 얻어 신학과정이 즐겁고 이후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목회 속에서 십자가의 길을 감당할 수 있다.
<미주>-----------------------
1) 에스겔 3:1-3, 36:26-27, 37:1-14
2) 존 P, 밀톤, 『히브리식 사고와 기독교』, (서울: 컨콜디아사, 1980), 217-218.
3) 로이드 존스, 『시대의 표적』,서문강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1993), 281. 참조
4)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토라 리쉬마(Torah Lishma)의 목표다. 우리는 자신의 무지를 위하여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연구하는 것이다. 변순복,『 탈무드 속으로』. (서울: 대서,2006), 238. 신명기 11:22. 30:20
5) 로이스 티어베르그, 『랍비예수, 제자도를 말한다』,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9), 2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