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영원한 주제는 사랑이다

예술의 영원한 주제는 사랑이다. 영화나 음악에서 주된 이야기는 슬픔과 환희의 표현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 론에서 가장 완벽한 문학 장르는 비극이라고 단언했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연민과 회한을 통해 격정을 덜어내는 진솔한 스토리야 말로 예술의 절정을 말해 준다. 우리들의 삶속에서 비극은 슬픔 그 자체로 각인되어 남지만 예술이 보여주는 비극의 장르는 가슴을 적셔주는 아픔과 눈물로 이어지다 결국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감정의 분출을 통해 슬픔보다 오히려 후련함과 비움으로 상쾌함을 느끼게 한다는 것을 외로움을 맑은 고독으로 승화한 경험자라면 금방 이해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흔히 우울하거나 외로울 때 경쾌한 음악을 듣고 한바탕 춤사위를 돌고나면 기분전환이 된다고 생각한다. 일순간의 기분전환일 수 있으나 진정한 마음의 평화와 스스로 다독이며 얻는 그 안식의 휴식은 오히려 슬픔이 묻어나는 음악이 최고의 명약일 수 있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으로 정평이 나 있는 사콘느를 듣다보면 금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점점 그 심연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을 많은 이들은 느꼈을 것이다. 

가난이 자연스럽고 숙명처럼 버티어 내던 내 소년기는 책과 음악이 전부였고 그 예술을 창조한 그들의 영혼은 흠모와 영원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황혼이 짙어가는 늦은 하오, 무심코 길을 가다 전파상에서 흘러나온 선율에 발길을 멈추던 시간들이 잦았다. 맨 처음 들었던 폴모리아의 이사도라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면 멘델스존의 무언가는 또 다른 감성의 충만 이었다. 온 세상이 막 싹을 틔우던 3월 초순의 저녁 들었던 그 곡을 몰라 전파상으로 들어가 돌리던 신문을 건네며 곡명을 알았던 것은 멘델스존의 “베네치아의 뱃노래”였다. 나는 그렇게 서양음악의 이름들은 전파상을 통해 하나씩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깊은 감정은 언제나 침묵 속에 있다”_토마스 모어

철학가인 토마스 모어는 “가장 깊은 감정은 언제나 침묵 속에 있다”라고 말했다. 예술은 표현이 그 모태이긴 하지만 음악 속에서도 침묵으로 대변되는 “무언가” 즉, 가사가 없는 곡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멘델스존을 금방 좋아하게 되었다. 그가 쓴 곡에는 가사가 없기에 이 곡을 듣는 이는 자신만의 이야기로 가사를 쓸 수 있고 그 감정에 충실해 질 수 있다. 옛 여인을 그리는 가사일 수 있고 차마 할 수 없었던 가슴에 이야기를 이 선율에 얹어 자기의 음악으로 승화할 수도 있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단악장을 대표하는 야상곡 즉흥곡들이 널리 알려져 인기를 얻었다. 그 중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멘델스존의 무언가 작품들이 서정적 낭만의 끝자락을 장식했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터. 가사 없는 곡이기에 이 음악의 뚜렷함은 멜로디라 할 수 있고 그 선율을 따라 듣는 이가 곧 주인공이 된다는 점이다. 단순하고 간결하게 흐르는 연주 속에 느끼는 감성은 듣는 이에 따라 오만 감정이 이입되고 그 은율이 자신의 노래를 불러주는 느낌이 무언가의 대표적인 카타르시스가 아닐지.

멘델스존은 약관의 21살에 첫 무언가를 쓰기 시작해 15년 간 총 49곡을 썼다. 한 곡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곡을 제외한 모든 곡들이 모두 피아노곡으로 쓰여 졌다는 점도 남다르다. 그는 수채화를 연상케 하는 색채감과 간결함속에 숨겨진 깊은 심연을 우아한 낭만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베토벤·브람스의 곡과 함께 3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손꼽힌다. 그의 유명한 작품은 바흐의 고전 음악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썼다고 한다. 바흐를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계기도 멘델스존이 적극적으로 바흐를 소개하고 넉넉한 재정을 바탕으로 바흐를 홍보하므로 더 유명해진 것이다.

“영원으로의 끝없는 비상”_바흐_샤콘노

가장 슬픈음악을 얘기할 때 샤콘느(Chaconne)를 먼저 떠 올리게 되는데, 이 곡은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에서 유행한 춤곡에서 유래하여 이태리와 독일에서 기악 형식으로 발전한 바로크 시대의 3박자 계열 음악 양식이다. 비탈리의 샤콘느 8단조는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과 함께 이 음악 양식을 대표하는 곡으로 비교하는 사람들도 많다. 바흐의 샤콘느는 슬픔을 절제된 표현으로 승화하여 “영원으로의 끝없는 비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비탈리의 샤콘느는 슬픔의 감정을 극적이고 애절하게 표현하여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으로 불린 것으로 알려진 계기가 슬픔을 대변하는 곡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그러함에도 알 수 없는 고독과 슬픔이 내제된 감정으로 인입된 처음 곡에 익숙해 진 탓일지 모르지만 멘델스존의 무언가를 들을 때면 격정에 스며드는 무언가의 선율에 늘 몽환적 가슴앓이가 되고 말았다. 예술은 표현이자 언어로 귀결되는 행위이다. 하지만 침묵을 통한 감정의 전달은 영혼의 교감이 있었을 때만 가능하다. 참신한 새로운 장르의 예술을 승화한 멘델스존의 “무언가”의 곡들은 음악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시적 사상의 주관을 통해 스스로 서정적 감성의 해답을 찾게 해주는 예술의 경지라 할 수 있다.

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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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애플자산운용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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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 CIO(투자총책임자)
M&A 전문가(기업인수 합병 및 기업평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작가.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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