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과의 만남_내 문학의 서정적 바탕

꽃 샘 추의가 기승을 부리던 2월 끝자락의 어느 날 길을 가다 담벼락에 섰다. 가슴을 덥혀주는 햇살의 온기가 좋아 하염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시간들이 잦았다. 유일한 휴식시간이었던 일요일 하오 길을 가다 보랏빛을 보고 탄성을 지르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내 열다섯 2월에 서울 가난한 동네에서 보았던 제비꽃은 보라의 상징이 되었고 초록바다의 밀물 소식이기도 했다. 돌아보면 초등학교 5학년까지 살았던 남도 순천근교의 시골은 내 문학의 서정적 바탕이 되어주었고 보라는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도라지꽃에 개미를 넣고 꽃잎을 닫으면 마법처럼 금방 빨갛게 색칠하는 것도 신기했다. 햇살이 가득한 담장 아래 어디든 제비꽃들로 가득했던 2월은 우리가 꿈꾸는 신세계였는지 모른다.

색의 대표적인 빨강과 파랑의 중간 두 색을 합쳐야 보라가 되는 퍼플은 여성운동의 색채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관용과 배려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의로운 길을 가다 투옥된 민주투사들의 재판이 열리는 날 서초동 법원 앞은 보라색 물결이 끝없이 이어졌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로 담담히 보라색 저고리를 입고 법정에 앉아있던 친구의 엄마는 성자 그 모습이었다.

관용과 배려로 의로운 자의 편에서 재판을 하던지 아님 떳떳하게 감방으로 되돌아가게 판결하라는 의미로 학생들의 가족들은 모두다 보라색 옷으로 입고 나왔다. 그토록 오묘하고 섬세한 자태로 겨울을 이겨내고 맨 먼저 고갤 내민 작디작은 제비꽃의 내면은 이토록 의연함과 자신만의 분명한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

얼마 전 서울에 머무는 동안 남대문 시장엘 지인들과 함께 갔다. 늘 그렇듯 시장엘 간 목적은 바지 단을 줄이러 갔지만 할 일은 제처 두고 구경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라색 조끼를 보고 지갑부터 열었다. 아내는 보라색을 유난히 좋아한다. 보라 패션을 소화하기는 여간 쉽지 않음에도 내 눈에는 보라를 입은 아내는 다 어울려 보이고 예뻐 보이기만 해 보라색만 있음 무조건 사고 보는 습관이 있다. 고슴도치도 제 가족이면 다 예뻐 보인다하듯 내 눈엔 그렇지만 남들이 보기엔 참 촌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여의도 금융가에서 근무할 당시 일주일이면 매일이다시피 술집엘 갔다. 몸에 맞지 않은 술을 마신다는 게 여간 큰 고통이 아니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늦게 귀가한 어느 날 소파에서 기다리던 아내는 성급히 나를 데리고 방으로가 와이셔츠부터 벗으라고 재촉했다. 하얀 셔츠에 묻은 루즈를 발견하고 행여 어머니가 볼까봐 놀라서 나를 방으로 데려간 것이다. 말없이 와이셔츠를 감춘 아내는 차 한 잔을 내오며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던 그는 차실에서 조용히 말했다. 아이들이 볼 수도 있으니 접대가 있는 날은 꼭 거울을 한 번 보고 집에 들어오라고 부탁을 했다. 

리조트를 경영하는 동안 사업장 정원에는 늘 보라 꽃들로 가득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 정원에도 보라는 대표적인 꽃들이다. 한 겨울임에도 꿋꿋하게 잘 자라는 겨울 팬지도 대부분 보라색이다. 보라는 관용이고 스스로 깨우침을 주는 색이기도 하다.

오랜 해외출장을 다녀오니 혹한은 언제인 듯 봄기운이 만연하다. 가시덤불 속에 뾰족 고갤 내민 크로커스는 온통 보라 빛 동네들이다. 북미에는 없는 제비꽃 대신 크로커스가 봄소식을 알리는 전령사다. 유난히 눈이 많이 왔고 한파가 극심했던 올 겨울 우리가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었던 그 기간에도 저들은 봄을 준비하고 있었고 주어진 삶을 게을러하지 않았다. 작고 눈에 잘 띄지 않은 섬세한 것들이 위대하고 원대한 꿈을 실천하고 있음을 우리는 잊고 산다. 우선 보여 지는 화려함과 거대함에 찬사를 보내고 관심을 보낸다, 강렬한 빨강 원색보단 중간 그 중용의 색채를 지닌 꽃들은 대부분 작고 연약하다. 가장 혹독한 절기를 이기고 맨 먼저 희망의 봄 메시지를 보내는 것 또한 보라색들이다. 서양의 철학자들은 보라를 성찰의 색으로 묘사하고 있다. 가장 맑은 정신의 세계로 인도하고 고독의 진정한 본질은 성찰에서 시작된다는 나의 이론은 보라와 오버랩 되는 겨울 끝자락의 이른 아침이다. 보라는 관용과 배려의 상징이지만 성찰을 통해 다시 꿈을 갖게 하는 색채이기도 하다.


글: 자명
한국문인협회 회원. 칼럼리스트. 작가
블루애플자산운용주식회사
불루애플리츠펀드운용주식회사 
CEO & CIO(투자총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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