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따라 걷는 인생길 순례길_유근희목사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12:29-32).


●말씀 묵상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12:22~34).


 

어제는(14) (어리석은) 부자에 관한 말씀이었고, 오늘은 가난한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19:27) 예수님을 따라서 신앙 순례길에 오른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누가는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라고 밝힌다. 그러나 그 제자들이 특선된 “12(사도들)만을 뜻하는지, 전도 여행을 보내셨던 “70(10:1) 까지 포함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떻든,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예수님을 따라 순례길에 오른 제자(신도)들에게 주신 말씀이니, 이미 신앙을 결단하고 예수님을 따라 순례길에 오른,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마땅하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22)

그러므로는 접속부사로서 앞에서(어제) 탐심과 이기적 삶의 해악에 대한 예수의 경고를 들었고, 오늘은 그 탐욕에 연루된 인생의 고질병 염려worry(걱정)에 관한 교훈을 소개한다. 탐욕이 그렇듯 걱정·염려 역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절제하고 조절해야 한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던, 그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학정 아래 온갖 착취를 당해 생명 부지를 염려해야만 하는 신세였다. 생명 유지의 기본적 요소인 의식주 해결을 걱정해야 하는 가련한 상황이었다. 그런 빈민들에게 예수의 말씀은 위로와 격려가 아닌 자극과 도전으로 들렸을 것이다. 빈민들이 끼니를 걱정하고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었을까?

모든 것을 버리고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역시 먹을 것, 입을 것걱정을 했던 것 같다. 그러한 심정을 감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하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공중의 새들, 들녘의 화초들을 비유로 교훈하신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24)

왜 하필 까마귀를 예로 들었을까? 까마귀는 이스라엘 지역에 매우 흔한 조류이지만, 유대교 율법에 부정한 새(11:15, 14:14)로 분류되어 먹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불길한 예감을 주는 새로 여겼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까치는 길조요 까마귀는 흉조로 여겼다.) 흔하디 흔하고 부정한조류인 까마귀까지도 먹이시고 기르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된 제자들이야 얼마나 더 잘 거두시며 보살피시겠는가를 강조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까마귀에 관한 내용은 과학적 연구 발표가 아닌 시적詩的, poetic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사실 까마귀는 나름대로 먹이를 모으고 저장하고 집을 짓는행위를 한다. 사람들의 방식대로 하지 않을 뿐이다. 앞에서 말한 어리석은 부자처럼 욕심껏 긁어모으고, 곳간(창고)을 늘리는 등의 이기적 탐욕에 반하여 조물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자연 질서에 순응하는 생물들의 삶을 묘사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1:27) 고귀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토록 고귀한 신분을 악용하여 인간 우월성을 주장하게 되고, 급기야 인간 스스로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하기에 이른다. 이런 오만무도한 사상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성경 말씀에 역행하는 처사이다. 태초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질서는 이렇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7-28).

만물을 다스리는” ‘관리자청지기의 임무를 맡은 우리 인간이 폭군으로 변한 것이다.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자연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파괴하고, 멸종시키는 등 폭력을 휘둘렀다. 그 결과 지구 온난화로 인한 각종 자연재해를 불러왔고, 2019년 말 (중국 우한에서)발생하여 온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 코로나바이러스(Covid-19 pandemic) 같은 괴질까지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인간이란 생태계의 일원으로 상호 의존적이요, 더불어 살아가는 상생과 공생을 도모할 때에만 생존 가능함을 큰 희생을 치르고 나서 뒤늦게서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하찮은 새 한 마리, 들녘의 풀 한 포기도 조물주 하나님께서 기르시고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인간이 감히 그것들을 훼손할쏘냐! 생태계 훼손은 결국 인류의 자멸을 부르는 어리석은 경거망동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까마귀까지 먹이시고 보살피시는 조물주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들풀, 백합화를 비유로 소개한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27)

다시 말하지만, 백합화에 대한 말씀도 과학적 설명이 아닌, 시적 표현으로 받아야 한다. ‘백합화역시 인간의 방식대로 하지 않을뿐, 나름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하여 식물학자들이 놀라고 감탄할 정도로 매우 섬세하고 정교한 공예작업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대 임금 중 가장 호화스럽게 영화를 누린 인물이다. 인조품이 제아무리 호화찬란해도 천연품의 아름다움에 비할 수 있겠는가! 교훈의 요지는 이것이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28)

내 어린 시절 시골에서 땔감이 모자라 들풀을 베어다가 말려서 불을 지펴 밥을 짓곤 했다. “할아버지 지고 가는 나무지게에 활짝 핀 진달래가 꽂혔습니다. 어디서 나왔는지 노랑나비가 지게를 따라서 날아갑니다.” 어릴때 부르던 동요가 생각난다. 이 동요가 들꽃까지 베어다가 땔감으로 쓰던 옛 상황을 잘 말해 준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너희는 왜 그렇게도 믿음이 적으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에게야 얼마나 더 잘 입혀 주시겠느냐?”(공동).

인간의 근심, 걱정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문제요 신뢰의 문제다. 주님의 말씀처럼, 걱정, 염려는 믿음이 적은 자들이 가지는 불안증일 뿐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된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29-30)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를 거듭 강조하신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런 것들을 걱정하고 안달하는 것은 세상 백성들곧 야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못하는 불신자들이나 하는 어리석은일이다. 염려의 유무가 세상 백성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분한다.

걱정, 근심 없는 사람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주님께서 걱정·염려를 하지 말라 하시니, 걱정과 염려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 방법을 생각해 보자. 사실 우리는 걱정과 근심이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염려는 영어로 Worry인데 고대영어 wyrgan, ‘목조르다또는 choke·strangle, ‘질식시키다가 그 어원이다. 사자가 노루를 공격하여 그 목을 물어 숨통을 막아 죽이는 것처럼 염려는 심하면 그 사람의 목을 조여 (심신의 기능을)마비시키고, 종당은 질식시킨다.

영어권에서, 보통 사람은 두 강도 사이에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고 있다crucifies himself between two thieves는 말이 있는데 두 강도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내일(미래)에 대한 염려를 말한다. 걱정, 염려는 미래에 어떤 나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비롯된다. 만일 하면 어떻게 하지what if?를 걱정한다. 그런데, 한 연구조사에 의하면 내가 염려한 것들 중의 92%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는 일어나지도 않을 것들을 미리 앞당겨서 (가불해서)괴로움을 당하는 격이다.

어제(14) 언급한 어리석은 부자(12:20)의 경우처럼 내가 그렇게도 염려, 걱정하는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걱정꾼들은 보장되지도 않은 내일(미래) 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허비하고 망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29) 명하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능하고, 낭비하고, 무모하고, 생각 없는 삶, 규모 없는(살후3:6) 생활을 시사하는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성경본문(12:22-34)을 자세히 보라. 염려하지 말라와 동시에 생각하라(24, 27)를 강조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가르치신 주기도문에도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1:3)가 있지 않은가? 일용할 양식(생필품)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주께서 자가당착에 빠지는 말씀을 하실리가 없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살펴보자. 어떤 것()걱정, 염려하는 것과 생각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염려와 관심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동아) 국어 대사전(1982)에 걱정을 1. 근심으로 마음을 태우는 일과 2. 남을 위하여 마음 씀 두 가지로 정의한다. (과도한) 걱정과 염려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심신의 기능까지 마비시키지만 (“마음이 즐거우면 앓던 병도 낫고, 속에 걱정이 있으면 뼈도 마른다.” 17:22, 공동), 진정한 관심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설렘과 희망을 품고 해결책을 궁리하게 만든다. 또한 창의력을 발휘해 내일(미래) 일을 예측하고 준비하게 된다. 우리의 근심, 걱정은 건전한 관심으로 바꿔야 한다. 근심거리가 관심거리로 변해야 한다. 건전한 관심은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은 (기도로)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30).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벧전5:7, 표준).

예수의 제자된 우리의 관심은 좀 더 고상하고 궁극적인데 두어야 한다.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31-32)

그의 나라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바라며, 그 나라를 오늘, 여기에이루어 나가는 삶을 강조하신다. 지금껏 거듭 강조했듯이, 누가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지역적인 개념이나, 사후에 들어갈 저 천국 이전에, 예수님의 강림으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리심을 뜻한다(10:9, 11:20, 17:21).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지금 여기에 실현되고 있지만, 완성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성취되기 때문에, 아직은 과도기로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걷는 인생길이 곧 순례길이다.

우선순위를 확실히 해야 한다.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생필품)을 추구하는 삶은 걱정, 근심, 염려에 휩싸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자에게는 생필품까지 곁들여 받게(32, 공동)된다. 마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는 말씀으로 우선순위를 제시한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14:17, 표준)로 잘 표현한다. 예수의 제자된우리는 걱정과 근심과 염려대신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삶을 누리게 된다.

인생 순례길의 우선순위를 정했으면 다음은 검증단계이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33-34)

본 단원(12:22-34) 직전에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12:15) 말씀하신 주님께서, 결론적으로, 탐욕의 대상이요 걱정 근심의 근원인 소유물을 버릴 각오와 결단을 촉구하신다. “하나님과 재물”,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리니(16:13, 6:24)경고하신 것을 기억하자. 지금껏 내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의지하고 걱정, 염려하며 매달리던 그것(소유욕)들을 내려놓을 때비로소 보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는 명령은 누가복음 특유의 말씀이다.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고 구제하는 것은 그 누구보다 누가의 큰 관심사다. 하나님께로서 받은 재물에 대한 청지기정신으로 가난한이웃과 나누는 삶을 강조한다. 구제에 관한 현인의 교훈이 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lend to the Lord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19:17).

구제는 여호와께 빚을 주는 셈(공동 역)이니 하늘나라에 투자하는 격이다.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33, 공동)라고 하나님께서 보증이시니, 이 얼마나 확실한 투자인가!

그러나 제자들에게모든 소유(재산)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신 말씀은 아닌 것 같다. 열두 사도는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19:27) 주님을 따랐으니 해당 사항이 아니겠고, “70제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순례길에 오른 모든 신도(제자)를 향한 명령이다.

부자 청년에게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18:22)라고 말씀하셨지만, 삭개오의 경우는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19:8)를 수긍하셨다. 바나바의 경우는 전 재산이 아니고 밭 하나a field(4:37)를 팔아서 바쳤다. 그 외에 누가의 기록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집과 소유물을 많이 가진 부자로서 주님의 제자로 섬긴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예수님의 요지는, 주님과 함께 걷는 인생 순례길에 장애물(“땅의 것”, 3:2)무거운 짐들을 벗어 버리고 가볍고 단순하게 위의 것(3:2),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9:25)을 사모하며 달려갈 길(딤후4:7)을 완주하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 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 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 갑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12:1-2a, 공동).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1. 분주한 일손을 잠깐 멈추고, 천천히 주위, 특히 공중 나는 새들과, 들의 꽃들을둘러보자. 조물주 하나님의 신비와 사랑의 섭리를 느껴 보라.

2.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3. 내 삶의 우선순위를 자주 점검하는가?

 

●기도

주께서는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분부하셨지만 우리는 온갖 근심 걱정 염려로 심한 스트레스에 눌린 삶을 살고 있음을 고백하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도록 다시 서원하는 기도를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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