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12:42-43).


말씀 묵상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너희도 아는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12:35~48).


종말론적 교훈이다. ‘인자로 지칭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으로 맞게 되는 세상의 종말, 그리고 개인적인 인생의 종말을 예비하는 성실하고 슬기로운제자의 삶을 촉구하는 말씀이다. 인류의 종말이든 개인의 종말이든 전혀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맞게 될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인생 삶이 이승뿐 아니고, ‘저승에서 계속되며, 이승에서의 삶을 심판받고 그에 따라 응분의 상벌을 받게 된다는 교훈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임박한종말을 예비하는 자세를 말씀하신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35-36)

이 교훈의 문화적 배경을 알아야 이해가 빠르다. 당시 중동지방,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옷은 위에서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통옷이었다. 먼 길을 걷거나 어떤 (힘든)일을 하려면 아랫도리를 추켜올려 허리에 띠로 묶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할 때 먼 길을 급히 떠날 준비허리에 띠를 띠고(12:11)를 명령하셨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 행동 개시를 준비하고 대기하는 자세이다.

등불을 켜고는 전기가 사용되던 시절이 아니라서 등잔에 기름을 붓고 실로 꼰 심지를 꽂아 불을 붙여 주위를 밝히는 것을 말한다. 나도 어린 시절 들기름을 등잔에 붓고 심지를 꽂아 불을 밝히던 일을 기억한다. 유대인들은 등잔에 올리브(감람)유를 사용했다. 등잔의 심지는 불에 타기 때문에 매일 재로 변한 끝부분을 잘라내고 등잔 안에 떨어진 불똥을 닦아내야 불이 밝게 탈 수 있다. 요즘에는 전등에 센서와 타이머를 붙여 켜고 끄는 것을 자동으로 조절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그런 편의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등불을 켜고 끄는 일도 쉽지 않았고 화재의 위험도 컸다. 심지를 손질하고 바꾸며 등잔에 기름이 충분한지 수시로 점검해야 했다.

마태는 비슷한 비유를 소개한다. 신랑을 기다리던 열 명의 처녀 중 등잔에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큰 낭패를 보았는데, 그들을 미련한 처녀들로 소개한다(25:1-13). 등불은 어두운 밤에만 필요하므로 등불을 켜고라는 표현은, 밤낮없이 주인을 기다리며 언제라도 맞이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는 자세를 시사한다.

주인(종말)이 언제, 어느 시각에 올지 모른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온다는데 혼인 잔치에 손님으로 갔던 건지, 그 주인 자신의 혼인 예식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두 가지 모두 가능성이 있다. 비슷한 내용을 보도하는 다른 복음서들, 특히 마태복음(25:1-13)에 비추어 볼 때, 그 주인의 혼인 예식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신약성서 원어 가모스는 혼인 예식 또는 혼인 잔치로 번역될 수 있다. 한글 번역이 혼인 잔치가 아니고 혼인 집이란 표현을 썼기 때문에 더욱 아리송하긴 하나 전후 문맥으로 보아 그 주인의 혼인 예식은 아닌 것 같다.

고대 유대인의 결혼식은 대게 밤 늦게 진행되었고, 혼인 잔치는 일주일에서 열흘간 지속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혼인 예식(잔치)에 참석한 그 주인이 어느날, 어떤 시각에 귀가할지는 예측이 거의 불가능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어 수시로 연락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 옛날, 전기도, 전화도, 컴퓨터도 없던 그 (암흑?)시절을 어떻게 살았는지, 아찔함을 느낀다. 하지만 아무리 문화가 발달하고 인공지능(AI)이 최고도에 달해도 그 날과 그 때는아무도 알 수 없다!

예수께서 분명히 밝히셨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24:36).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믿었고, 사도들 생전에 파루시아가 실현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 일이 지연되자, 종말론을 재정비하기에 이른다. 그 후 2천 년이 지나도록 아직 인류의 종말인 파루시아가 문자적으로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무수히 많은 예언자들(?)그 날을을 점치려고 안달을 했지만 모두가 허위요 거짓으로 드러났다.

전 세계적인 참사, 전쟁, 재난, 역병 등이 생길 때마다 종말의 그 날을 외쳤다. 유난히도 한국교계에서는 (자칭) 재림 주들이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COVID-19 Pandemic(코로나 대역병)때에도 종말을 선언하는 자칭 예언자들이 많았다. 심지어 코로나 백신(예방접종)인류의 종말을 알리는 짐승의 표(666, 13:16-18)를 받는 것이며, 사람의 몸속에 베리칩을 넣는 음모론으로 매도했다. 이런저런 거짓 선지자들의 허위 예언들로 인하여, 현대인들이 더욱 종말론 자체를 불신하게 되는 것 같아 유감스럽고, 이때야말로, 기독교 종말론의 바른 이해가 절실히 요구된다. 그런데 깨어 있어 주인을 기다릴 것을 교훈하시던 예수님께서 갑자기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37)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인가! 듣고 있던 사람들이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로 전혀 다른 세상을 말씀하셨다. 주인과 종의 위치가 뒤바뀐 사회, 아니 완전한 평등 세상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메시아의 향연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획기적 질서와 그 규범을 언급하신 것이다.

그의 나라의 새로운 제도와 질서를 말씀하심이 이번만이 아니다. 제자들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아직 구별하지 못하여 가끔 우리 중에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22:24) 일었다. 그때마다 주께서 책망하셨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22: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4-45, 20:27-28).

예수께서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규범을 보여주셨다.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13:12-15).

초대교회는 그분을 이렇게 찬양하였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항상 준비하고 주인을 기다리는 자세를 더욱 강조하신다.

 

"주인이 밤중에나 새벽에 오더라도,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되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집주인이 도둑이 언제 들지를 안다면, 그는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38-39, 표준)

그러므로, 인류의 종말과 파루시아(재림), 또는 개인적 종말에는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고전13:12) 상봉하게 되니, 그 날, 파라다이스가 실현되는 바로 그 복된날을 준비하며 학수고대鶴首苦待하는 것이다.

이 놀라운 약속과 선언을 들은 제자들은 극도로 격양되었던 것 같다. 제자들의 대변인 격인 베드로가 예수께 넌지시 묻는다.

 

"주님, 지금 이 비유는 저희에게만 말씀하신 것입니까? 저 사람들도 모두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까?"(41, 공동)

그 놀라운 약속을 독점하려는 제자들의 속내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주님의 나라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느냐를 놓고 다투기를 일삼던 제자들이 아니었던가(10:35-41). 그러나 주님은 즉답을 피하고 간접화법을 사용하여 그 질문의 그릇됨을 지적함과 동시에 성실하고 슬기로운 청지기가 될 것을 명하셨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42-44)

에서 청지기로 명칭이 바뀐다. 청지기란 대개 종의 신분으로 주인의 집안 살림을 책임 맡아 관리 경영하는 직책이다. 구약의 요셉이 보디발 집안의 청지기였다(39:4). 주인의 부재 시에 청지기는 주인의 대리인 직무를 한다. 그 집에 다른 종들이 있으면 그들 모두 이 청지기의 지휘, 감독을 받는다. 청지기란 자기 소유는 없고 남(주인)의 소유를 도맡아 관리 경영한다.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 근면, 성실, 그리고 슬기로움이다. 이 비유에서 지목하는 청지기는 열두 제자(사도)들이다. “인자인, 주 예수님의 부재중, 다시 오실 파루시아 때까지 예수 대리인들로서 청지기 직무가 주어진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사도직을 계승한 목회자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들은 성실하고 슬기롭게 맡겨진 종들인 양들에게 때를 따라적절한 ”(양식)을 먹이는 일,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설교)하고, 가르치고(), 성례전 이행에 충정忠貞을 바쳐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특별히, “주님의 식탁인 성만찬을 매 주일 예배 중에 실행함으로 주님의 면전에서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도록 해야 한다(6:48-51, 11:26).

청지기 사명에 대해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다. 이 비유에서의 청지기는 열두 사도(제자)와 그 계승자(목회자·사제)들을 지칭하지만, 세상 모든 인,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성도) 모두를 지목하는 포괄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간다(1:21). 그러나 그 중간에, 이승에서 사는 동안 조물주 하나님으로부터 온갖 은사(선물), 가령, 시간, 재능, 재물, 사랑, 심지어 육신()까지를 도맡은 청지기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를 보라(25:14-30). 주인과 만나는 날, 우리 모두는 청지기 직무를 결산하게 된다. 성실하고 슬기로운 청지기가 되어 주인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25:21) 라고 칭찬받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 엄벌을 받게 될 청지기들도 있다(25:26). ‘악하고 게으른 청지기의 모습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제가 맡은 남녀 종들을 때려 가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낸다면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 와서 그 종을 동강내고 불충한 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처넣을 것이다"(45-46, 공동)

이 청지기는 3가지 착각에 빠져 살았던 것 같다.

첫째, 이 종은 주인의 귀가 일정을 잘 안다는 착각 때문에 직무 유기를 범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태도를 눈가림(6:6, 3:22)만 하는 종으로 질책한다. 주인 앞에서는 충성하는 척하지만, 주인의 부재 시에는 함부로 행동하는 표리부동의 근무 태도이다.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주님의 경고를 어기고, 그 날을 예언하는 어리석은종들이 적지 않다. 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안일한 생각이나, 지금이 말세지말즉 인류 종말의 맨 끝자락이라며 순진한 성도들을 겁박하고 유린하는 행위는 모두 불충한청지기들의 술수이다.

내가 십대 중반에 나가던 시골교회 목사님이 3년 이내에 예수 재림있다고 예언하며 ‘144,000’ 반열에 끼워 준다는 약속으로 교인들을 광분시킨 일도 있었다. 나 역시 그 거짓 예언에 속아 넘어갔었다.

둘째, 불충한청지기는 자신이 종의 신분임을 잊고 주인의식에 빠졌다. 종이 주인의식에 빠지면 우월감을 갖게 되어, 나와 다른 것은 틀린 열등한 것으로 멸시하게 된다. 미국 사회의 백인 우월주의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 청지기는 제가 맡은 남녀 종들을 때려 가며인 행세를 했다. 모두 같은 종의 신분인 것을 잊은 것이다.

남녀 종들이란 원어 파이스’ ‘파이디스케(연령층)소년’‘소녀또는 (사회계층) 남자 하인·’, ‘여자 하인·으로 번역된다. 사회계층, 직장 지위, 지적 수준, 신앙 연조, 인종적 소수로서 열등하고 하급으로 취급되고, ‘주변또는 변두리인간으로 차별과 무시당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뜻하는 대명사로도 사용된다. 이 못된 청지기는 자기보다 어린, 낮은, 등한약자들을 멸시, 천대, 학대하고 때려 가며주인 행세를 했다. 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도 이런 악한청지기들이 적지 않.

셋째, 이 청지기는 주인의 재물을 호의호식사리사욕을 채우는데 허비했다.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냈다”. 이는 탕자의 허랑방탕(15:11-13)에 비할 수 있다. 주인의 부재,곧 하나님의 부재 의식 속에서 제멋대로행동한 것이다. 내면적으로는 무신론자요 불신자가 아닐 수 없다. 여기, “불충한 자로 번역된 원어 아피스톤불신자unbeliever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 불충한청지기는 불신자들의 벌 받는 곳으로 처넣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한 가지 더 주의를 요하는 대목이 있다. 주인이 돌아와 이 불충한청지기를 동강 내고(원문에 두 동강 내고가 있음, 12:46, 공동)가 너무 잔인하고 무지막지한 표현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히브리서의 표현을 보면 이해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4:12).

문자적으로보다 상징적 의미로 이해함이 좋다. 예수님께서 성실하고 슬기로운 청지기가 될 것을 교훈하신 비유의 결론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47-48)

매일 매 순간 성실하고 슬기롭게책임을 다하는 청지기에게는 주인이 언제 오던지 문제 되지 않는다. 주인이 오시는 그날이 바로 큰 상급을 받는 “Pay day”이기 때문이다. 사실, 매일 주님(성령님)과 함께 인생길을 걷는 우리 순례자들에게는 주님이 가시적으로 나타나시는 것(파루시아, 또는 종말)에 신경 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제, 15)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하신 말씀(12:22-34) 직후에 종말을 준비하는 청지기에 관한 말씀을 주신 것에 유의하자.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명언이 생각난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1. 거짓 종말론에 현혹되지 않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

2. 악하고 게으른 청지기성실하고 슬기로운 청지기를 비교할 때, (우리)는 어느 쪽에 가까운가?

3. 세상 나라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규범의 차이는 무엇인가?

 

●기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사(선물)로 당분간 내게 맡겨 청지기로 삼으신 것을 감사드리고 성실하고 슬기로운 청지기로 살아가도록 위하여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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