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따라 걷는 인생길 순례길_유근희목사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12:49-51).


 

●말씀 묵상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12:49~59)


 

오늘 주시는 예수님의 교훈(12:49-59)은 매우 이상하고 역설적이라서 듣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지금껏 주신 교훈들과는 판이한 내용들로 보인다. 성경 주석학자 중 더러는 누가가 왜 이 말씀을 여기에 삽입했는지 의아스럽다고까지 말한다.이틀 전에(15, 12:32)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내 어린 양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공동)이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는 등 무서운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예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이 찬양하기를 땅에는 평화(2:14)라며 평화의 왕(9:6)으로 선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오늘은 그와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시는 것 같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 말씀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고, 기독교 역사에 수많은 불화와 분열, 심지어 종교전쟁까지 정당화하는데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오늘 교훈의 진의를 음미해 보자.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49, 표준)

불을 던진다’ ‘불을 지른다는 표현은 얼핏 하늘에서 내리는 (소돔과 고모라의)불 심판을(19:24)연상케 한다. 성경에서 불은 대체로 진노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실 때의 정황과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길 도상에 계신다. 예루살렘에는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순례길을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의 재연으로 이해하는 것을 상기하자.

출애굽 사건을 낳게한 획기적인 불붙은 떨기나무(3:2-5) 경이가 있었다.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할 소명과 사명을 주시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떨기 불꽃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 하는고.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3:2-4).

이러한 하나님의 불이 불기둥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길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다. 이렇듯 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불은 크게 두 가지 기능을 가진다. 열과 빛을 발한다. 열은 데움으로 생명을 유지토록 하지만, 또한 태움으로 정화소멸도 시킨다. ‘불을 지른다’ ‘불을 던진다는 표현은 데움보다는 태움에 강점을 두기 때문에 소멸심판으로 두려움을 일으킨다. 그러나, ‘떨기 불꽃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불은 붙기는했는데 태우지는않는 신기한 불이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세 청년은 극렬히 타는 풀무불속에 던져지지만,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그들을 태우지는 못했다(3:23-25). 말라기 선지는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 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3:2)라고 또 다른 하나님의 불을 예언한다. 연단하고 정화하는 로 극열이지만 소멸(심판)보다 정금으로 만드는(23:10) 하나님의 불이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성령과 불을 가지신 능력자로 소개한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리라(3:16-17. cf.3:11-12).

인간들을 성령 하나님의 불로 정화해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 알곡은 곳간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실 분이다. 누가는 또 다른 하나님의 (신기한) 불꽃을 소개한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2:1-4).

이 불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교회(에클레시아)를 탄생시키기 위해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성령의 불꽃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의 은 하나님의 임재·현존을 상징하는 떨기나무에 붙은 불꽃과 같은 신기한 불이다. 예수님을 따라 순례길에 오른 새 이스라엘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그 불기둥(불빛)이며, ‘하나님의 임재로서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는 것이다. 그분의 별명, “임마누엘이 시사하듯이, 예수님께서 이땅에 강림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첫 외침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4:17)였고, 제자들을 전도파송할 때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전할 것을 지시하였다 (9:2, 10:9-11). 그러나 그 불 곧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여 성령을 보내심으로 공식적인 점화가 실현되는 것이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고 하신 다음 말씀이 그 사실을 입증해 준다. 지금 예수님께서 걸으시는 예루살렘 순례길이 십자가로 완성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니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길을 가시는 인간예수의 괴로운 심정을 솔직히 표현하셨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50)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교회에서 행하는 성례와는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또다시 받을 필요가 없었고, 물 뿌리는 약식 세례의식을 체험한 성도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이 있다. 원래 밥티조란 온몸을 물속에 잠그는dip, immerse 행위로서 침수례를 뜻하여 옛 사람을 물속에 장사지내고(그리스도와 함께)새사람으로 거듭나는예식이다(6:3-6). 그러므로, 예수께서 받을 세례는 자신의 십자가 상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상의 죽음을 받을 세례(또는 ”)로 표현하셨다.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을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10:38).

답답함또는 괴로움(공동 & 표준)으로 번역된 순에코마이를 영문에는 distress(NKJV), stress(NRSV)로 번역하였다.

십자가를 바로 면전에 놓고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22:42)라며 얼마나 고뇌로 몸부림치는 기도를 했는지 핏방울같은 땀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22:44).

마태와 마가는 더 솔직히 묘사한다. 예수께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26:38. 14:34)라고 말씀하셨다. 온 인류의 죗값을 치르기 위한 십자가였으니, 얼마나 큰 죽음의 고통이었겠는가! 그런 고통을 다 감내하신 예수께서 오늘 우리에게 분부하신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9:23. cf.16:24, 8:34).

과연 우리는 내 몫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가는가?

누가의 신앙 공동체가 처한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라. 십자가 사건 이후 약 40년이 지났는데, 예수의 재림은 지연되고, 박해는 극에 달해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은 그야말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다.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분쟁분열이 생겼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51-53)

이 말씀을 상황과 문맥을 떠나 문자적으로 읽고, “가정불화를 조장하는 사이비 이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로마 제국에서도 예수교는 가정불화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기독교를 반대하고 박해했다. 내가 십대 초반에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우리 가문에서 심한 핍박을 받았고 급기야 장자 상속권을 박탈당했다. 종가 장손이 조상 제사를 거부함으로 문중의 불화와 불효를 조장한다는 것이 가장 큰 죄목이었다. 아직도 이슬람권이나 공산국가에서는 기독교 탄압과 박해가 일고 있지만, 서양 문화권 특히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다. 그런데 가시적이고 법적인 탄압이나 박해는 없지만, 영적인 면에서는 매우 교묘히 진행되고 있다. 다시 말해 영적 전쟁은 부단히 일고 있다. 사도 바울이 잘 묘사한다.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6:12, 표준).

베드로서 기자는 사탄 마귀를 먹이감을 노리는 맹수에 비교하여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라고 경고하고 있다.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영생과 영벌, 양과 염소, 알곡과 가라지로 구별되어 갈라서며 분쟁하게 되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됨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선언한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3:18).

찬송가의 가사를 음미해보자.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움에서 어느 편에 설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찬송가 #521, 합동 1).

지금껏 제자들에게 성실하고 슬기로운 청지기가 되는 길을 교훈하신 예수께서 이제는 모여든 군중에게도말씀하신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54-56)

현대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기상위성을 띄워 기후변화를 관찰하고 일기예보를 한다. 옛날에는 오랜 경험에 근거한 기후 상식으로 일기변화를 예측하였다. 농경시대의 기후 상식은 상당히 정확해서 농부들이 철(계절)을 따라 농사 일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예수님 시절, 유대인들은 지중해가 있는 서쪽 하늘에 구름이 떠오르면 소나기 오고(왕상18:44), “남풍이 불면아라비아 사막의 열기가 올라와 무척 더운 날씨가 된다는 천지의 기상분별을 할 줄 알았다. 일상의 천기는 분간하면서 진짜 천기 곧 하늘의 기미(낌새)는 분간 못하는 것을 한탄하시는 말씀이다.

농사의 은 잘 아는데, 영혼의 은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삶을 꾸짖으신다. 예수님께서 행하는 기사·이적들을 보고 전하는 말씀들을 들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11:20)을 깨달을 수 있는데 그 진실을 왜곡하고(11:15), 부인하고, 외면하기 때문에, “외식하는 자” “위선자(표준, 공동)라는 엄한 책망을 듣게 되었다. 다음 말씀에서 더 명확해진다.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57-59)

이 말씀(비유)이야말로, 얼핏 생뚱맞게 들릴 수도 있다. 교회력에 맞게 계획된 (설교자들을 위한)성경읽기 일람표에도 이 말씀은 빠졌다. 마태는 같은 말씀을 산상수훈의 일부로서(6:25-26) 일상의 화해를 강조하는 교훈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누가는 하늘의 기미를 헤아리는 지혜를 교훈하면서 결론적으로 이 말씀을 주시는 것으로 인용한다.

이 비유는 당시 유대사회의 사법구조와 재정관리를 보여준다. 다른 모든 비유가 그렇듯 평범한 일상의 사건을 통해 영적인 교훈을 준다. 어떤 한 사람이 큰 채무를 진 것 같다. 빚을 갚지 못해 채권자가 법원에 고소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재판을 하게 되면 채무 불이행으로 법정구속 될 것이 확실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재판정에 가기 전에 채권자와 (어떤 방법으로 든)합의를 보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다. 너무 늦기 전에 합의하고 화해하는 것이 상책이다. 일단 투옥되면 빚을 갚을 길이 없기 때문에 출옥은 더 요원해진다.

이 비유는 그 채권자가 하나님이시고 채무자는 우리 모든 인간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우리는 각자의 죗값을 치러야 할 채무를 지고 있다. 사도 바울은 세상천지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3:11)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3:23) 라고 천명한다.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심판을 받기 전에 화해해야 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은 하나님께서 이미 마련해 놓으셨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죗값을 지불케 하셨으니, 그 대속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이면, 무서운 심판주 하나님이 우리 (사랑하는)아버지가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재자Reconciler이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10-11).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확인하신 약속을 기억하자.

내 어린 양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12:32, 공동).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1. 내가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신 예수님의 본 의도는 무엇일까?

2. 세상에 화평을 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고 하신 예수님의 선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3.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라는 주님의 개탄이 오늘 나에게는 어떻게 들리는가?

 

기도

 

과학 기술문명의 발달로 밝고 편리한 세상이지만, 영적으로는 점점 더 어두워져 가는 현실을 돌이켜 보며, ‘때와 시대의 분별력을 위하여 기도하자.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