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기독 변증가’ C.S. 루이스와 ‘최고의 지성’ 이어령박사의 가상만남

루이스씨, 이어령입니다이태형 소장(기록문화연구소)의 저서가 국민북스에서 출간되었다. 글의 흐름은 저자의 영적 멘토인 최고의 기독 변증가’ C.S. 루이스와 최고의 지성이어령박사의 가상만남 형식의 인텨뷰 방식이다. 또한 저자가 던지는 질문들은 오늘 한국 교회 공동체가 회복해야할 신앙의 도약에 필요한 핵심 주제들이다.

주제들은 저자가 한국교회에 던지고 싶은 것들을 거장들의 인텨뷰 형태를 빌려 쏟아낸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려왔다.

저자는 내가 왜 이 책을 써야하는지 그 이유를 밝혔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인생을 바치는 한 명의 독자라도 나온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그것이 이 박사와 루이스의 소망이라고 믿는다고 전한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전도이다. 전도는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우리가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오늘 죽어도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분명히 있는가?” 이 질문이 어떤 이 에게는 부담스럽고 불쾌하며 무례한 질문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질문에 분명한 답을 해야 한다. 그래야 영의 세계로 입장할 수 있다. 이것이 기독교의 존재 원리이다. 이어령 교수는 지성의 문턱을 넘어 영성의 자리로이동했다는 신앙적 결단을 그의 저서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 고백했다.

오늘 한국교회의 삶의 자리에서 마음에 담아야할 보석 같은 주제들로 가득차 있다. 저자는 대가들이 쏟아낸 메세지를 잘 버물려서 독자들에게  시대를 뛰어 넘을 영적 화두를 던지고 있다.

 

신앙적 경계인

(1)오늘날 한국교회를 돌아보면 신앙적 경계인들이 많다고 느끼는 것은 저자만의 생각이 아닐 듯싶다. “지성과 영성의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참 많다. 확신과 의심의 문지방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니 오히려 확신에 거한 종교인과 비종교인보다는 회색지대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고 진단하고 있다.

(2)만들어진 신살아 있는 신사이 갈등은 한국교회를 슬프게 한다. 북이스라엘 아합왕 시대와 비교하면 씽크로율이 100% 일치한다. 믿음의 확신도 열정도, 진리도 모두 잃어버리고 있다. 인공지능이 삶의 중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직 현세적인 복만 많이 빌어주면 그 신을 따라간다. 여호와 하나님이든 바알이든 복만 많이 빌어주면 여기 왔다 저기 왔다 한다.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질것이라고 진단한다.

(3)특히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없는 분들이 점점 늘어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기독교는 점점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 교회가 매력 있다는 분들보다 세상이 더 매력 있다고 말하는 분들이 더 많다. 기독교는 세상과 전혀 다른 매력을 지닌 존재이다. 그런데 매력을 세상적인 기준으로 자꾸 생각한다. 기독교는 세상의 매력과는 전혀 다른 관점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의 매력은 현세적인 매력이 아니다. 영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내면적인 것, 그 세계를 찾아가는 매력이다. 예수님이 팔복에서 현세적인 복을 누린 사람이 복 있다고 하지 않았다. 내면적인 복, 영적인 복을 찾아가는 분들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기독교의 매력은 영원과 영혼과 생명을 다루기 때문에 세상적인 매력과는 다르다.

말씀을 읽다가 깊은 은혜를 얻는다면 지성의 문턱을 넘어 영성의 세계로 쑥 들어가게 된다. 진리의 말씀을 로고스로 칭한다.. 로고스의 말씀이 나에게 새롭게 깨달아지고 다가올 때 그 말씀을 레마의 말씀이라고 한다. 로고스의 말씀이 레마의 말씀으로 들려질 때 지성의 문턱을 넘어 영성의 세계로 들어간다.

저자는 말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한번이라도 직접 들으면 지성에서 영성의 다리를 쉽게 건널 것이다.” 그 문지방을 넘으면 기독교는 매력적인 종교이다. 그러나 그 문지방을 넘지 못하면 기독교는 매력이 없는 종교이다.

 

 

●영적 세계를 넘어 하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한 팁

(1)문지방을 넘어서라.

문지방 앞에서 일생동안 서성거리다가 인생을 마감하지 말라. 독일의 영성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돌파라는 언어를 사용했다.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를 넘기 위해서는 돌파해야 한다. 문지방을 통과했을 때 영의 세계가 열린다. 그 문지방에서 가장 치열한 영적 전투가 벌어진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도약함으로써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순간 이동을 한다. 누구나 한 순간에 순간이동을 갈망한다. 그러나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말씀과 기도와 묵상의 축적 시간 없이는 영적 도약은 단순한 소망으로 끝내게 된다. 문지방을 너머서기 위해 치열한 축적의 시간을 드리라. 반드시 축적의 시간을 드리면 문지방을 돌파한다.

 

(2)기독교는 공간의 종교이면서 시간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공간에만 머무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시간 속에 계시는 분이다. 유대인 랍비 중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셜이란 분이 계신다. 헤셜은 우리는 시간을 성화하기 위해 공간을 정복해야 한다면서 하나님은 공간의 사물 속에 계신 것이 아니라 시간의 찰나 속에 계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과제는 시간을 영원으로 변화시키고 우리의 시간을 영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3)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과 만남이다. 요즘 시대에는 교회에서 종교만을 주는 것 같다. 거룩한 예배의 형식만 점점 화려해진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만남은 너무도 소홀해지고 있다. 교회에서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장 소중한 가치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만남은 곧 지성에서 영성으로 도약이다.

 

(4)믿음생활에서 절대로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

교회는 공동체이다. 교회가 진정한 공동체가 될 때 교회는 힘이 있다. 나 홀로 신앙은 사탄의 공격을 받고 넘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전략은 공동체 회복이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이 있다. 공동체를 이루는 것과 인간을 의지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믿음 생활하면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인간을 의지하면 절대로 안 된다. 인간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믿음 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의지한다면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제대로 가기 어렵다. 사람을 의지하면 머지않아 실망하게 된다.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마저 저버리게 된다. 인간의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주님만이 인간들에게 생명을 넣어주실 수있다. 생명을 넣어주시는 분을 의지해야 한다.

 

(5)기독교적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이다

진정한 사랑은 위로부터 하나님이 부어주셔야 지만 가능하다. 부어짐을 느끼기 전이라도 사랑할 방법이 있다. 바로 우리의 의지이다. 기독교적 의미에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이다. 자기를 사랑할 뿐 아니라 남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남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선과 악은 모두 복리로 증가한다. 오늘 행하는 아주 작은 선행이 몇 달 뒤에 꿈에 못 꿨던 복으로 다가올 수 있다. 반면에 오늘 나의 사소한 그릇된 행동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중에 자신에게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해악을 끼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믿음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 처음에 사랑하는 감정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행동으로 옮기라. 그러면 머지않아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든, 인간을 향한 사랑이든 기독교적인 사랑은 의지의 문제이다.

 

(6)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다

토마스 머튼이라는 영성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받는 자라고 답했다. 사랑받는 자가 우리의 정체성이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사실이 우리 인생의 중심축이 될 때 우리는 담담하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우울증이나 마음의 질병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이 마음에 병이 걸리더라도 거기서 헤쳐나 올 수 있을 것이다.

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랑받는 자에게는 그만이 들을 수 있는 내면의 음악있다고한다. 그 내면의 음악은 하나님의 휘파람 소리일수도 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살도록 창조되었다.

 

(7)홈 베이스와 헤어질 결심을 하라

이 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전투의 현장이다. 전투의 상대방은 혈과 육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다. 우리의 대적들은 어둠의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면서 365일 빛의 자녀들을 어두움에 가둬놓을까 궁리를 한다.

영적 전투에서 이기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제자의 조건은 부모형제자매와 목숨까지도 내놓을 정도의 결단을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14:26-27).

제자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홈 베이스와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한다. 바로 안전과 안락과 익숙함과의 결별이다. 성경의 사람들은 영원한 집을 찾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났다. 홈 베이스와 결별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 수반된다. 그러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형성된 가치관, 명예를 비롯한 상처와 미움까지도 결별해야 한다. 이것은 필요한 고통이다.

 

(8)제자도

본회퍼는 목사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명예와 업적, 생명을 던져야 한다고 했다. 참으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던져서 하늘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다.

십자가란 무엇인가? 저자는 돌아섬’(turning)으로 정의한다. 십자가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자기 욕망과 이기심에 비수를 꽂고 돌아서는 것을 상징한다. 돌아섬이 없는 사람은 십자가를 질 수 없다.

본회퍼는 값싼 은혜 우리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은혜이며, 참회가 없는 사죄, 교회의 치리가 없는 세례,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 개인적인 참회가 없는 사죄, 뒤따름이 없는 은혜, 십자가가 없는 은혜, 인간이 되시고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로 정의했다.

그러면 값비싼 은혜란 그리스도의 통치이고 부름이며 살아 있는 말씀이다. 값진 은혜에 살로잡힌 사람들은 가던 길에서 돌아선다.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을 과감하게 버린다. 그것이 혈육까지 포함한다. 값싼 은혜로만 살았던 세상 사람들은 그런 내려놓음의 삶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너머의 세계를 보지도 못하고 살아가지도 못한다.

제자 되기 위해 자기 찢어짐과 비움, 돌이킴이 없다, 이런 것 없이도 제자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현대 교회에는 뱀파이어 크리스천들이 너무 많다. 뱀파이어 크리스천이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그리스도의 피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리스도인으로서 순종하며 제자가 되어 합당한 삶을 사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크리스천을 지칭하는 말이다.

 

(9)거짖 자아를 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새 자아를 받자

자아는 진짜 자아와 거짖 자아가 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그리스도가 온 우주의 중심이신 예수님께 우리를 던지는 것이다. C.S, 루이스는 하나님을 향한 저의 평생의 여정은 매일 자아를 죽이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하루를 잘 지내기 위해서는 아침이 중요하다. 아침에 실패하면, 하루 종일 허우적거리게 된다. 사소한 매일의 습관 하나하나가 인생을 결정한다. 자연적 자아가 그대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 아침마다 자연적 자아를 몰아내고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한다.

낮은 자존감의 자아를 극복해야 한다. 외면 내면의 괴리가 심하면 심할수록 자존감은 낮아진다.

거짖 자아는 하나님과 연합이라는 우리 인생의 최고 수준의 단계까지 도달하지 못하도록 한다. 거짖 자아가 우리에게 끼치는 최고의 해악이다. 거짖 자아는 하나님과의 친밀함, 하나님과 친해지는 데 가장 큰 훼방꾼이다. 거짖 자아의 실체를 인정하고 벗어나서 참된 자아로의 선한 싸움을 선포하라.

 

(10)이별과 죽음, 슬픔과 고통

죽음은 슬픔과 고통의 터널이다. 그 터널에서 작가 미우라 아야코는 죽음은 내게 주어진 최후의 사명이라고 했다. 이어령씨는 딸 민아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았다. 민아는 의식이 있는 순간까지 기도했고, 이 땅의 다음 세대들의 부흥을 소망했다. 죽음의 터널에서도 사명을 잃지 않았다.

이어령씨는 딸의 회복되지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다. 딸 민아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였다. 딸 민아는 아버지 이어령씨가 하나님 자체를 만나기를 원했다.

라틴어 메멘토 모리는 메멘토(Memento)기억하다’, ‘생각하다’, 모리(Mori)죽음을 뜻한다.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생각하라는 의미이다. 이어령씨는 죽음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기저귀를 차고 나온다라고 했다. 저자는 삶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죽음의 자리에서 삶을 보라는 문장을 덧붙였다.

죽음을 지향하는 것과 죽음을 자각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죽음을 지향하는 사람은 극단적으로 자살 할 수 있지만, ‘죽음을 자각하는 사람은 온전히 살게 되는 것을 지향한다.

 

(11)인본주의를 넘어 하나님 중심주의로

하나 됨, 즉 연합을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 사회는 연합보다는 분열이 존중보다는 비방이, 포용보다는 배제가 익숙한 모습이다.

한국 사회의 익숙한 언어가 확중편향이다. 내 편과 네 편을 갈라치기 한다. 내 편과만 소통한다. 내 편이 아닌 상대방들은 철저히 배제한다. 한국정치계나 종교계나 거의 비슷하다. 종교는 세상을 이끌어갈 책임이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한 영역의 제사장으로서 사회적 책임이 있다.

인본주의자와 신본주의자는 저마다 확중편향된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 하나 됨은 불가능한가? 그 해답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십자가만이 가능하다.

실천적 답안지를 히브리서 1312절과 13절 말씀에서 찾는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성문 밖에서 인류 구원을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리셨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나만의 생각의 틀, 내 방에서 나와 영문 밖으로 나가야 세상을 하나되게 할 수 있다.

영문진영이라고 바꾸어 보면, 히브리서 구절이 진영 밖으로 나아가자가 된다. 각자의 진영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는 절대로 연합이 이뤄질 수 없다. 내편 네편 가리지 않고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해 나가는 것이 부름 받은 크리스천들의 사명이다.

저자는 마무리 문장을 이 세상에서 진짜 기적은 단 하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동행하는 삶이라고 전한다.

 


C. S. 루이스 교수는 <순전한 기독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고통의 문제>, <예기치 못한 기쁨>, <헤아려 본 슬픔>, <네 가지 사랑>, <천국과 지옥의 이혼>, <시편 사색>, <인간 폐지>, <기적> <나니아 연대기>. <침묵의 행성 밖에서>, <페렐란드라>, <그 가공할 힘> 등 기독교 우주 판타지 3부작도 있다.

이어령 교수는 회심 후 <지성에서 영성으로>,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개정 전 제목: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메멘토 모리>,  마지막 대담집인 김지수 기자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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