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18:9-10, 14b)


 

●말씀 묵상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18:9-17)


 

누가는 예수님께서 이 비유(18:9-14)를 어떤 사람에게 주셨는지 밝힌다.

예수께서는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9, 공동)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앞 장(17)에서 바리새인들에게(17:20) 또는 제자들에게(17:22) 말씀하셨던 경우를 생각할 때,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독선을 꾸짖으셨던 내용과 비슷한 주제이므로, 아마도 바리새인들을 지목하여 주신 비유라고 생각하는 주석가들이 다수 있다. 그러나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이 비단 바리새인들뿐일까? 이 비유가 전개되는 내용을 면밀히 음미해 보면 그들이 누구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독선獨善 self-righteousness이라 부른다. 한글 사전은 독선을 자기 혼자만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일로 정의한다. 성경에는 독선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지만 독선주의자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이 비유가 그중의 하나다.

성경에 기초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서 추구하는 것이 옳음이다. 어떻게 그 의를 이룰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의와 불의를 (최종)심판하는지 역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늘 음미하는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누가는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9-10, 개정)

 

여기 매우 상반되는 두 부류가 등장한다. 유대 사회에서 존경받고 의인으로 인정되는 상류계층이 바리새인들이고, 멸시와 인간 말종 취급을 받던 하층 부류가 세리들이었다. 세리는 죄인으로 불리며, 언제나 세리와 죄인들(5:29, 9:10, 2:15)또는 세리들과 창기들(21:31)로 한데 묶어 차별과 멸시를 당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압제자 로마제국에 붙어 동족을 (각종 세금 명목으로)강탈하여extort부를 축적하는 모리배들, 매국노로 취급되었다. 또한 세리들은 이방인들과 교제하며 안식일에도 을 하기 때문에 더욱 죄인취급받았다.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9am, 12 noon, 3pm) 기도하는 관습이 있었다. (가까운)마을 회당에 모여 기도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기도하는 것을 선호했다. 바리새인들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것은 의례적이고 당연시되지만 세리가 그리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 두 사람의 기도하는 자세가 소개된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

 

바리새인이란 원래 의로운 삶을 위하여’ “구별된 자separated ones”, 또는 성별된 자란 뜻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여 따로 서서기도하기를 좋아했다. 공동번역에는 보라는 듯이 서서라고 표현되었다. 표준역은 (원문에 따라)혼잣말로with·to himself기도하였다는 문구가 있다. 그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그 바리새인은 남들 보라는 듯이 성전() 맨 앞자리에 의젓이 서서 두 손을 들고 하늘을 향해 소리 높여 외친 것 같다. 그들이 으레 그랬으니까. 기도라기보다는 자기 자랑이요 자기 과시이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기의 의로움을 과시한다.

토색하는 자(세리), 불의한 자(죄인), 간음하는 자(창기)들에 비하면 자기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지를 자랑한다. 의 기준이 (바리새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행실이다. 이것이 문제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like filthy rags(64:6)라고 고백한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의란, 고사성어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가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성경은 이 세상에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3:10, 표준)고 분명히 선언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노라면, 나보다 못한 자들 앞에서는 우쭐대고 그들을 하대下待(갑질)하고 멸시하게 되지만, 나보다 우월한 자들 앞에서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그들을 시기하고 헐뜯고 불평·불만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옆 사람들의 것과 비교하다 보면, 불만이 싹트기 시작한다.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나보다 더 많이, 더 좋고, 더 큰 것을 가진 사람들이 보인다. 그 결과 감사 보다는 불평이 치솟고, 기쁨보다는 시기로 찌들게 된다. 이 비유의 바리새인은 나보다 못한 죄인들을 놓고 하나님 앞에서 우쭐대는 모습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저 멀리 한쪽 구석에 엎드려 기도하는 그 세리를 지목한다.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일까? 바리새인은 자기의 종교적·영적 의로움이 얼마나 월등한지를 구체적으로 과시한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12)

이 정도면 당시 유대교 율법으로는 의인이었고, 오늘날 교회에서도 일등 성도로 추앙받을 것이다. 율법에는 연중 단 하루, 속죄일에 금식하게 되었지만(16:29),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도 두 번(, 목요일)씩 금식했다. 농산물(곡물)의 십일조를(14:22) 바치도록 규정되었지만, 바리새인들은 채소의 십일조(23:23)까지 바쳤다. 또한, 여기 이 바리새인은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자랑한다. 하나님께서 율법에 요구하시는 이상을 실행하는 것이니, 그는 과연 자랑할 만하다. 개종 전까지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3:6)이다.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날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로 정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월요일과 목요일은 예루살렘에 장이 서는 날이었다. 장날에 모인 많은 사람에게 (금식하는 티를 내려고) 꾀죄죄한 모습을 하고, 장터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기를 즐겼다(6:5, 16).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외식과 위선을 엄히 질책하셨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23:23a, 개정).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기중심적이다. 기도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다.나는을 이 짧은 두 문장에서(원문) 무려 5번이나 사용하여 자신의 오만傲慢을 여실히 드러낸다.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은 없고, 오로지 자기 자랑뿐이다. 이것은 기도를 가장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교훈하려는 설교인 것이다. 이런 설교식 기도는 오늘날 우리 교회(예배)에서 흔히 들을 수 있지 않은가! 예배드릴 때 인도자의 기도가 그러하다. 교회 지도자들이 빠져들기 쉬운 어리석은 관행이다.

다른 한 사람, 세리의 태도를 보자. 이 세리는 단 한 번 자신을 언급할 뿐이며, 기도 역시 단 6 마디(원문)뿐이다. 바리새인의 29 마디 설교식 기도와 대조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3)

 

세리의(기도) 자세는 바리새인의 그것과 판이判異 하다. 극과 극이라 할 수 있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이 잘 보이는 성전() 맨 앞자리에 당당하게 서서, 두 손을 하늘로 향해 높이 들고 자기를 과시하는데, 이 세리는 누가 볼까 봐 멀찍이 떨어진 한쪽 구석에서 몸을 굽혀, 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며, “다만 가슴을 치며울먹인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참회懺悔의 모습이다. 다윗 왕이 밧세바를 범한 후 선지자 나단의 질책을 받고 주께서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51:16b-17a)는 참회의 시를 지었다. 하나님께서는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6:7)을 드림보다 참회하는 상한 심령을 원하시며 기뻐 받으신다. 그렇다면, 바리새인과 세리, 어느 쪽의 기도를 기뻐 받으셨을까 상상해 보라. (다음 구절에서 선포한다.)

이 세리의 특이한 간구를 주시해 보자.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에서 여기, “불쌍히 여기다be merciful로 번역된 원어 힐라스코마이는 성경에서 자주 쓰이는 불쌍히 여긴다” “자비를 베푼다는 말(엘레에오eleeo)과는 매우 다른 단어다. “힐라스코마이는 신약성경에 단 두 번 사용되었을 뿐인데, 이 세리의 간구(18:13)에서 그리고 다른 한 곳, 2:17에서는 백성의 죄를 속량(대속)하려 하심이라로 번역되었다. 단순히 불쌍히 여긴다는 뜻 보다, 죄를 대속代贖하다, “속량贖良하다, “화해和解하다는 뜻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루에 두 차례(9am & 3pm) 죄 사함을 위한 속죄 희생을 드렸는데, 그때 마침 세리가 성전에 와서 기도하게 되었고, (뜻 풀이를 하자면)그가 하나님께, “저기 드려지는 희생 제사가 나에게 적용되어 내 죄를 사하시고 주님과 화해하게 하옵소서라는 의미로 간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세리의 대속atonement의 간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심오한 진리가 암시되었다.

세리의 이 한마디 간구에 누가의 대속 신앙이 함축되어 있다. ()마다 드려야 하는 짐승(, 염소, 송아지, 9:12)의 속죄 제물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예고豫告하는 간구로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0:10). 그러므로, 이 세리의 간구는 (짐승의 피로 얻는)일시적 속죄가 아닌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는) 영원한 속죄eternal redemption(9:12)를 예시豫示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희생되기 전이므로 예시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결론이자 목적을 선포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14, 표준)

 

이건 또 뭐야!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청중이 수군거렸을 것이다. “의롭다인정함을 받을 자는 당연히 바리새인으로 생각했는데, (죄인) 세리라니, 너무나 천만 뜻밖의 결론에 아연실색했을 것이다. (모든) 비유의 목적은 상투적인 사고방식의 반전反轉 reversal을 꾀한다. 사람이 (율법을)행함으로, (바리새인처럼) 스스로 의롭게 될 수는 절대로 없고, (세리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믿음으로만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 되는(3:26-28) 진리를 예고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비유는 기도에 관한 것이 아니고 의롭게 되는justification 길을 보여주는 예화例話이다. 그 사실이 다음에 나오는 실화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15-17, 개정)

 

이 단원의 말씀이(19:13-15, 10:13-16 참조) 어린 아이들의 순결성과 결백성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유아세례infant baptism의 근거로 이용되어 왔지만, 그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성직자들의 축복기도를 받게 하려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은 부모들의 순수한 신앙심에 기인하는 바인데, 아마도 제자들은 지금 (십자가를 지기 위해)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심각하고) 바쁜 일정에 시간 낭비이며, 지장을 초래하는 일이라 생각하여 꾸짖고rebuked가로막은 것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꾸짖는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노하셨다”, 10:14.표준). (자고로, ‘제자들성직자들중에는 아이들이주께 나오는 길을 가로막는만행을 저지르는 자들도 있었다. 교회 담장 안에서 아동 성폭행등 얼마나 많은 육신적 그리고 정신적 폭행이 있었던가!) 예수께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누가는 암시할 뿐인데, 마가는 밝힌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10:16).

어린 아이의 어떤 품성을 지목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 말씀하셨는지, 누가는 밝히지 않는다. 어린이들의 순결성과 결백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전통적이지만, 그것은 어린이들의 성품을 미화했을 뿐이지 진실은 아니다. 유아幼兒들은 죄성이 없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성악설, 성선설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남녀노소 막론하여,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3:11, 표준). 다음 말씀에서 넌지시 보인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 아이들은 부모를 믿고 의존dependence한다. 전폭적 신뢰信賴. 유아의 부모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같이, 하늘 아버지를 전적으로 믿고 의존하는 자들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된다. 누가의 하나님의 나라는 지역적이거나 사후의 세상을 뜻하기보다,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reign of God이다. 앞서 음미한 세리와 같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면, 그 은혜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의인들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게 된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1. 현대판 바리새인세리는 누구일까?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 나는 바리새인에 속할까, ‘세리에 속할까?

2. 아이들이 주께 나오는 길을 가로막는 제자들의 행위가, 현재 우리 주변에서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보자.

3. 어린 아이를 품에 안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말씀하신 의도를 다시 생각해 보자.

 

●기도

 

자칭 의인바리새인과 죄인세리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성전)에서 기도를 드렸는데, 세리가 하나님께로 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것을 심각하게 받고, ·우리도 의롭게되는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함을 다시 감사하고 그 복음을 전파할 것을 다짐하는 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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