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18:21-23)


 

●말씀 묵상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18:18-30)


 

낙타와 바늘귀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진 실화이다. 어떤 부자 관리가 심각한 고민거리를 예수님께 털어놓는 것으로 일화가 시작된다.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8)

 

다른 공관복음서들(19:16-30, 10:17-31)에도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약간씩 달리 묘사한다. 마태는 부자 청년으로, 마가는 어떤 부자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예수님께 여쭙는 것으로 소개한다. 이 셋을 종합해서 부자 청년 관리a rich young ruler로 불리지만, 이는 공관복음서라는 무리한 짜맞추기식 해석에 의한 것으로, 복음서들의 각기 다른 (신학적·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이다. 어떻든, 우리는 누가복음서 특유의 신학적 서술을 따른다.

당시 관원이란 유대교 회당의 고위 관리이거나, 밤에 예수님께 찾아온 니고데모처럼(3:1) 공회(산해드린) 의원일(“의회원”, 새번역) 가능성이 높다. (마태는 청년으로서 산해드린 공회원이 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므로 단순히 부자 청년으로 소개한다.) 누가는 큰 부자 관원일 뿐, ‘청년으로 부르지 않는다(21). 그 계명들은 내가 어려서 부터from my youth(소년 시절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답한 것을 보면 그가 청년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큰 부이며 상류층 고위 인사들이 가질법한 실존적 고민거리를 다루고 있다. 이 부자 관원은 성공 가도街道를 달려 온갖 것을 다 소유했지만, 허탈감에 빠져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묻게 된것 같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8b)라고 그 부자 관리가 묻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19)

 

이 말씀은 자칫 예수님께서 자신의 하나님의 독생자신분을 부인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시 유대교 전통으로는 랍비나 어떤 사람선한(아가도스good) 분으로 부를 수 없었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 그리고 그 분을 대신하는 율법만이 선하다고 가르쳤다. (마태는 여호와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조차 없는 유대교 법에 따라, ‘선한 선생님대신 선한 일로 표현한다, 19:16)

그 부호 관리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 부른 것은 (달콤한) ‘아부 언사일 수도 있지만, 사실인즉 (니고데모처럼)진솔한 (최상의)존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확인 차원에서 하신 예수님의 반문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대가 나에게 사용한 선한 선생이란 명칭은 하나님께만 붙일 수 있는데, 그 뜻을 알고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건가?”

그런 관점에서 읽으면, 예수님의 반문은 자신의 신성神性을 부인하기보다는 도리어 확인시키는 말씀이 된다. 예수님을 찾아온 이 부자 관원은 유대교의 교리에 능통한 신자(바리새인?)임에 틀림없다. 여러 가지 정황상, 그가 아마도 사울(개종 전의 바울)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성서학자들도 더러 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를 묻는 그 부자 관리에게, 예수께서는 얼핏 동문서답 같은 말씀을 하신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20)

 

이는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중 하반부 곧 제5부터 제9계명으로서 (순서는 다르지만)도덕률을 나열한 것이다. 이런 도덕률의 배열과 종류는 다른 공관복음서들(마태, 마가)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마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로 끝을 맺는다(19:19b). 마태의 부언이, 예수께서 십계명 전체를 나열하지 않고 도덕률 부분만 말씀하신 이유를 암시한다. 사도 바울이 잘 요약한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13:9).

십계명의 제2(59/10까지)를 물으심은 그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태도를 보임으로, 그것이 이웃사랑으로 (올바른 관계=)나타나야 하니, 그 계명들을 지키고 있는지 물으신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1. 4:20).

그 부자의 당당하고 오만한 대답을 보라.

 

그가 말하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21, 표준)

 

이는 어제(36) 묵상한 바리새인의 독선적 태도와 같다. 이 얼마나 오만 방자한 대답인가! 외형적이고 문자적으로는 모든 계명들을 다 지켰을지라도, 내적이고 영적인 면, 곧 인간의 심령 골수까지 꿰뚫어보시어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4:12) 주님 앞에서, 그렇게 호언장담할 수 있느냐 말이다. 결국 그가 다그쳐 되묻는다.

내가 영생을 얻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19:20). 지금껏 성공 가도를 걸으며 모든 것을 획득한이 부자 관원은 영생까지도 인간적인 수단·방법으로 소유하겠다는 심산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생永生이란 영원무궁토록사는 시간의 양적quantity 개념이 아닌 질적quality 개념이요, 시간적 개념이라기보다 관계적 개념이다.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이 그렇듯, 그 부자 관리는 이 진리를 혼동하고 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이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22)

 

예수님을 좇는 일곧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길에 오르는 이것이 영생의 첫걸음이다. 인간이 모든 율법의 계명들을 완벽하게 지키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행함으로써 구원에 이르고 영생을 얻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이룸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아 누리게 된다.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열린다.

예수님을 따르는 조건, 곧 모든 소유를 다 팔아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 부자 관리가 재물Mammon우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 조건을 주신 것이다. 물론 이 조건을 문자적으로 따르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다음 장(19:1)에 등장하는 세리장 삭개오에게 그 조건을 적용하지 않았고, 다른 부자 관원인 니고데모(3:1)에게도 적용하지 않았다. 어떻든, 물질적 부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요, 가난이란 하나님께 외면당한 증거로 생각하던 유대 사회(현대 기복주의자들)에 폭탄적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재물이란, 실로 훌륭한 사환wonderful servant일 수도 있고, 무서운 상전terrible master이 되기도 한다.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셨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6:13b).

그 선언을 들은 이 부자 관원을 보라.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23)

 

마태와 마가는 그가 예수께 등을 돌렸다고 전한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10:22).

신앙생활에서 뿐만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돈 때문에 등 돌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께서 심히 근심하고엉거주춤 서 있는 그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24-25)

 

(순우리말 약대는 근래 들어 한문자 낙타로 바뀌었음.) 낙타와 바늘귀설화는 한국의 S재벌 총수였던 L씨가 붙들고 고민했었다는 풍문이 있다. 이 말씀은 불가능을 뜻하는 당시의 속담을 인용한 것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배운대로, “코끼리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라는 표현을 사용하다가, 유대 땅에 없는 코끼리 대신 가장 큰 짐승인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로 바뀌었다.)

이 말씀이 주는 큰 충격을 완화하려는 구구한 설명들이 나왔다.

 

1. 예루살렘 성곽에는 낮에 사용하는 크고 넓은 정문들이 있으나, 밤이 되면 정문들은 닫히고, ‘바늘귀 문이라 불리는 낮고 작은 샛문만 열리는데, 밤늦게 당도한 상인들이 끌고 온 낙타에서 짐을 다 내리고 간신히 그 바늘귀 문을 통과하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그 바늘귀 문이 존재했었다는 역사적 증거를 찾을 수 없다.

 

2. 원래는 밧줄rope인 카밀로스kamilos이었는데 후기에 필사들이 실수로 카멜로스kamelos 낙타로 잘 못 옮겼다는 그럴듯한 해석이지만, 필사들이 공관복음서(마태·마가·누가) 모두에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을 리가 없다. 예수께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꾸짖으실 때,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23:24)라고 하신 것은 그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므로 낙타와 바늘귀격언은, 익살스러우면서humourous, 그 뜻을 분명히 하려는 유대인의 과장법hyperbole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낙타와 바늘귀말씀은 듣는 이들에게 엄청나게 큰 충격이었다.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26)

 

부자들은 하나님의 특별 은총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우선권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부자들이 입성 불가라면, 그 누가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한탄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 설화의 핵심 요지를 말씀하신다.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

 

구원’, ‘영생’, ‘하나님 나라입성은 사람의 힘으로나 능으로(4:6b) 획득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오직 외 길one and only way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세상 재물을 좇을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좇을 것인가를 선택해야 할 기로에서 그 부자 관원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떠나 갔다(10:22).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좇는자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급한 베드로가 선뜻 입을 연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28)

 

우리라는 표현은 열두 사도를 대표하여 베드로가 예수께 다짐하는 것이다. 명망있는 부자 관원이 거절한 그 일을 우리는 해냈습니다. 우리에게 돌아올 보상이 무엇 입니까? 마태복음에는 부언이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19:27).

다분히 상업적인 속셈이지만, 예수님을 따라 순례길에 오른 오늘 우리들의 속내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즉답하신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29-30)

 

이 약속의 말씀은, 육신적인 보상을 넘어 정신적이고 영적인 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자적으로는 가령, “집이나형제나자녀를여러 배 받는다지만, “아내(남편)도 여러 명 받는단 말인가? 그건 좀 거시기한데! 아무튼, 예수께서 선언하신 바도 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 하시더라(12:48-50).

초대교회 신앙공동체에서 말씀대로 실행하였던 것을 누가는 기록한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 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2:44-45, 공동).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4:34, 공동).

결론적으로, 우리의 고백은 이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질적·육신적)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 때, 거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 아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1.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은 부자 관원의 질문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오늘 우리들의 영생에 대한 생각과 비교해 보자.

2. ‘낙타와 바늘귀설화를 주신 예수님의 의도를 다시 정리해 보고, 나 스스로에게는 어떻게 들리는지 생각해 보자.

3. 율법을 문자적으로 철저히 지켰음을 장담하는 부자 관원에게 부족한 것 한 가지란 무엇인가? 그 지적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가?

 

●기도

 

조용히 눈을 감고 부자 관원과 예수님이 주고받은 대화를 다시 생각해 보라. 그리고, 주님께서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자.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