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따라 걷는 인생길 순례길_유근희목사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눅18:31, 35-38).


 

●말씀 묵상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눅18:31-4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오셨다. 먼 순례길의 끝자락에 이른 것이다. 갈릴리에서 ‘이방의’ 사마리아를 지나 (요단)‘강 건너편’ 페리아를 (제21일 묵상)돌고 돌아 여리고로 들어가신다. 예루살렘까지는 이젠 겨우 하룻길(17마일·28km)남았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신다. 예루살렘에서 벌어질 일들을 또다시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31-34절)

 

갑자기 하신 말씀이 아니다. (누가에 의하면)이번이 벌써 여섯 번째 수난의 예고이다(눅9:22, 44, 12:50, 13:33, 17:25, 18:31). 왜 반복하여 강조하시는 걸까?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이것이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고전1:18, 막10:45). 십자가 사건은 결코 우연한 참사가 아니고, 만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인류 구원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를 두고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18:31b, 새번역).

 

“응하다” 또는 “이루어 지다”는 “텔레오teleo”(텔레스테세타이)로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외치신 마지막 말씀이기도 하다.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테텔레스타이, 요19:30).

거듭거듭, 수난 예고를 하시지만, (열두)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그들은 말씀하신 것을 알지 못하였다”(18:34, 표준).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경을) 자세히 풀어 설명하실 때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25-27, 32, 개정)

 

지금은 예수님의 행적, 특히 십자가 사건의 전말을 (신약성경을 통해) 다 읽어볼 수 있어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물며 그 당시 다른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이’ 십자가에 달리는 메시아를 받아들이기란 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유대교 신앙으로는 로마군을 무찌르고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여 면류관을 쓰는 메시아를 바랐지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처형되는 그런 그리스도를 기대하지 않았다. 제자들의 메시아관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등극’하고 대관식이 열리기를 기대하고, 그때 한 자리씩 차지할 것을 꿈꾸고 있었다. 동상이몽이라고나 할까? 제37일에 묵상한 일화에서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주께 물은 것도 그런 기대감을 표출한 것이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데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19:27, 개정).

마가와 마태에 의하면, 여리고 길목에서 예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자 마자, 곧장, 야고보와 요한이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청하자, 다른 제자들이 화를 버럭 내며 자리다툼을 벌린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막10:37, 41. cf.마20:21, 24).

신학(기독론)적으로 말하면, 희랍 문화권에서는 하나님이 순수 인간truly human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유대권에서는 인간 예수가 순수 하나님truly God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기독교 역사에 때때로 이단들이 나와서 예수님께서 순수 사람이며 순수 하나님truly human·truly God이심을 부인하였다. 그리스도(메시아)를 바로 목전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눈 뜬’ 소경들 앞에 진짜 소경이 나타났다.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35절)

 

누가는 여리고가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순례길’에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곳임을 암시한다. 지난 몇 주 동안 (요단)‘강 건너편’ 이방 땅, 페리아 지역을 돌며 복음을 전파하실 때는 지역 이름을 전혀 밝히지 않았는데, 유독 여기 (요단강을 다시 건너)여리고에 당도하자 갑자기 그 지명을 밝힌다.

누가복음 특유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도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눅10:30)라고 여리고 지명을 밝힌다. 비유에서 특수 지명을 언급하는 것 또한 이색적이다. (39일에 묵상할 눅19장의 삭개오 일화에서도 여리고를 밝힌다.) 왜, 무슨 연고로, 예수님의 마지막 순례길 끝자락에서 여리고가 등장해야 할까?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40년 동안 광야를 배회하다가 드디어 여호수아의 영도하에, 요단강 건너 가나안 복지에서 맨 처음 얻은 땅이 여리고성이었다(수6:16).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복지를 향한)순례길의 종료와 ‘약속의 땅’에 입성하는 관문이었다. 지금 걷고 있는, 예수님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눅9:51–19:40)의 순례길을 영적靈的으로 “제2의 출애굽 여정”으로 본다. (제1일 묵상에서 밝힌바와 같이, N.T.Wright 을 비롯한 저명 성서학자들의 고증.)

신묘神妙하게도, 제2의 출애굽 여정을 마치고 여리고에 입성하는 영도자도 예수, 곧 여호수아(Yehoshua·Joshua: 예수Jesus의 히브리어 표기, 마1:21, 눅1:31)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순례길 끝자락에 만나는 여리고 길목에서의 일화는 큰 의미가 있다. 첫 여호수아는 여리고에 함락·멸망·저주를(수6:21, 26) 가져왔지만, 제2의 여호수아인 예수는 치유·생명·구원을 가져왔다(눅18:42, 19:9).

첫 번째 출애굽 여정은, 사실상, 실격이었다. (출애굽 제1세대 성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 입성에 실패하고 광야에서 모두 “소멸”되었다. 그들의 불신과 원망에 격노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언하셨다.)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14:30).

(결국, 출애굽 1세는 모두 광야에서 죽었고, 2세, 3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 민14:23-33. 26:64-65.) 그러나, 예수께서 인도하신 제2의 출애굽 순례길은 성공적이었다. 예수님을 따라 걷는 (우리들의)순례길은, 그러므로 생명(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35-39절)

 

소경(맹인)이란 죗값으로 천벌天罰을 받은 증거라고 생각하던(요9:2)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불구자·장애인을 돕기는 고사하고 멸시·천대하여, 소경들에게는 구걸하는 일 밖에는 달리 살길이 없었다.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멸시·차별은 우리 한국 사회도 별반 나은 게 없다. (‘병신 육갑하네’, ‘장님 문고리 잡기’, ‘앉은뱅이 용쓴다’ 등 장애인을 빗대어 하는 속담들이 여실히 보여준다.)

예수님의 태도는 달랐다. 여기 이 일화에서도, ‘소경’이 예수님께 간청할 때, 동행자들이 입 닥치라고 꾸짖는 것을 보라. 교회 안에도 장애인 비하 언행이 성행한다. 하기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조차 주님에 대해 비하어를 사용한다.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지방색으로 차별하는 세상이다. 무심코 던진 말일 수도 있지만, 그 속에 멸시가 들어있다. “나사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1:46, 공동)라는 나다나엘의 표현이 잘 보여준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그분을 올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눈뜬장님들’인 것이다. 그러나 ‘거지’ 소경은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들은 여리고 길목의 거지 소경은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고쳐 부른다. ‘나사렛 예수’와 ‘다윗의 자손 예수’의 뜻은 천지 차이다. ‘다윗의 자손’이란 유대인들에게는 ‘오실 그분, 메시아’(구세주)라는 뜻이다. (유대인을 상대로 기록된 마태복음에는 자주 나오는 표현이지만, 이방인을 위해 기록된 누가복음에서는 다윗이라는 이름이 생소하기 때문에 별로 사용되지 않는다.)

아, 이 얼마나 신통방통한 일인가! 눈 뻔히 뜨고, 자기들 눈앞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의 ‘십자가 죽음’의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비롯한)많은 “무리multitude” 앞에서, 도리어 앞 못 보는 소경이 알아차린 것이다. 육안肉眼은 감겼으나 영안靈眼은 열린 상태다. “오실 그분, 다윗의 자손”이 오시면,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눅 7:22)는 소문을 듣고,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그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천재일우千載一遇 이 좋은 기회를 놓칠쏘냐!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39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바탕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11:1, 표준)는 말씀대로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그 분, ‘다윗의 자손’ 예수께서 지금 내 앞을 지나가시는데 나 어찌 잠잠할까 보냐! 믿음의 울부짖음, 믿음의 간구는 절대로 외면당하지 않는 법이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40-41절)

 

이 거지 소경의 절규를 예수님께서 들으셨다. 아니 이 사람, 누구 하나 의지할 자 없고, 남들에게 멸시천대만 받아 온 이 거지 소경을 찾아 이곳 여리고까지 오신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무겁고 바쁜 발걸음을 멈추셨다. 그런데, 이상한 질문을 하신다. 지금, 이 소경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는 걸까? (욕심껏, 수많은 것들을 요구하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신다.) 물론 이 소경 거지는 지금껏 날마다, 그 길목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적선합쇼!” 동전 한 잎 던져달라고 외쳤을 것이다. 이번에는 달랐다. ‘다윗의 자손’에게 원하는 것은, 그야말로 궁극적 요청이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41절b). “주여”라는 깊은 신앙고백까지 발한다. ‘나사렛 예수’로 소개받은 그 분을 ‘다윗의 자손’으로 인정하고, 결국에는 ‘생명의 주인’이며 ‘구원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치유의 자비를 간청하는 것이다.

기도가 응답되었다. 소원이 성취되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42-43절, 개정)

 

즉시로 소경이 눈을 떴다. 육안으로도 자기 앞에 서 계신 “다윗의 자손” 메시아를 직접 뵙게 되었다. 이 얼마나 기뻐 뛰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릴 일인가! 이것이 구원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구현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생활 모습이었다(행2:46). 마가는 그 소경의 이름이 “디매오의 아들 소경 바디매오”(막10:46)라고 밝힌다. 그 이유는, 치유받은 즉시 “예수를 따라나선” 그가 바로 초대교회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즉시로 따라나선 “주님 예수”는 지금 갈보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며 따르는 사람(제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무작정 따라다니는 무리도 있다. 그러다가, 자기들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는, 가차 없이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Crucify him! Crucify him!” 외치게 된다(눅23:21). 그런 판가름이 나게 될 날이 불과 며칠 남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1. 여섯 번씩이나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들었지만, “제자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2. ‘여리고 길목에서’ 예수께서 ‘거지 소경’을 만난 사건이 가지는 중요성을 재조명해 보자.

3.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길이 ‘제2의 출애굽’ 여정이라면, 우리가 주님을 따라 지금 걷고 있는 인생 순례길 역시 ‘출애굽’ 여정의 재연再演 re-enactment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도

 

두 눈 뻔히 뜨고도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들과 육안은 소경이지만 영안이 열려 ‘메시아’를 바로 볼 수 있었던 ‘거지 소경’의 일화를 음미함으로 나 자신의 좁은 ‘시야’를 넓힐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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