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 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 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 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 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 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 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자녀들아 너 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5:22-6:4)“


화란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국가의 최소단위>는 <가정>이 고, <가정>은 하나의 <작은 국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의 <작은 국가>인 <가정의 구성요소>는 무엇입니까?  
<가정>에는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부모>가 있고, 일심동체(一心同體) 된 <남편과 아내>가 있으며, 부부가 낳아 함께 기르는 <자녀>가 있습니다. 
그와 함께 가정이 가정으로서의 제 기능과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사랑합니다.  그러기에 이 사랑은 서로 다른 이물질(異物質)들을 하나의 단단한  <구조물(構造物)>로 고착시켜주는 <시멘트>처럼, 서로간에 <개성>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가족의 구성원>들을 하나로 결속시켜 주 는 역할을 합니다. 
가정에 이 사랑이 없으면, 가족구성원들이 하나 되지 못해 뿔뿔이 흩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갈라서고, 부모와 자식들이 갈라섭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극복이 됩니다. 어쩌다 남편이 구박을 줘도 아내는 감수합니다.  남편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때로 아내가 바가지를 긁어도 남편은 감수합니다.  아내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때로 부모가 자식을 꾸짖지만 자식은 고맙게 받아드립니다.  부모의 자식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반드시 <사랑>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創造秩序)>에 대한 순응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이후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가정>을 이룬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습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이렇게 <사랑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창세기 2:23)“
 
 이 같은  <사랑의 고백>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일심동체> 되어 한 <가정>을 이루었음을 선언해주셨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세기 2:24)“

<가정>은 <사랑>으로써 이루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에는 ‚주 안에서‘ 라는 <조건>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윤리규범>을 <충족>시키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철학적 사고(哲學的 思考)>와 <언어감각(言語感覺)>이 풍부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사랑의 개념>을 네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아가페(ἀγάπη)>와 <스토르게(στοργή)>와 <필리아(φιλία)>와 <에로스(έρως)>입니다.

(1) <아가페(ἀγάπη)>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이며, 희생적인 사랑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보여주신 그 <희생적 사랑>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 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 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5:7)“

예수님의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은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살아가는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애틋하고도 간절한 심정, 곧 <아가페(ἀγάπη)의 사랑>에서 우러난 것이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아가페의 사랑>의 <실천강령>으로서 <용서의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 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복음 6:14-15)“

예수님께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류에게 친히 보여주신  <아가페의 사랑>은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시 고, 끝까지 용서하시는 <용서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 지니라! (마태복음 18:21-22)“

(2) <스토르게(στοργή)>의 사랑은 <혈족애(血族愛)> 곧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 <스토르게(στοργή)의 사랑>은 본능적인 것으로, 자식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부모의 사랑 (familial love)>입니다. 
그리고 이 <스토르게의 사랑>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단절시킬 수 없는 강하고 끈끈한 사랑입니다.

(3) <필리아(φιλία)>의 사랑은 <친구>간의 <돈독한 우정>이나, <사제>간의 <신뢰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4) <에로스(έρως)>의 사랑은 <남녀간>의 <순수>하고도 <고결한 사랑>을 가리킵니다.

그러기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람은 <에로스(έρως)>에 의해 태어나고, <스토르게(στοργή)>에 의해 자라나며, <필리아(φιλία)>에 의해 다듬어지고, <아가페(ἀγάπη)>에 의해 완성된다고 했습니다.

<사랑>이란 말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상호존중(相互尊重)>입니다. 서로 귀(貴)히 여겨주고, 서로 중(重)하게 여겨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유대인들의 표현방식인데, 이는 우리의 <신앙과 삶>의 근거인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가리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한마디로 요약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 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그런데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 달리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무슨 뜻입니까? 사랑은 <상호존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해 드리고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해주는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그러기에 <가정생활의 윤리>는 <상호존중>이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20절에서 6장 3절의 말씀은 <가정생활의 윤리>를 이 <상호존중>의 원칙에 입각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 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에베소서 5:22-24)“

남녀는 인격적으로 동등합니다. 하지만 질서 면에 있어서는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이 가부장적인 권위는 사람이 임의로 정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규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아내 <하와> 에게 이같이 명하셨습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지니라! (창세기 3:16)“

하지만 무조건 복종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께 순종>하듯, 남편을 사랑하기에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을 받들어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남편은 아내를 제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 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 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라! (에베소서 5:25-28)“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사랑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하시고, <영생의 삶>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하나 밖 에 없는 고귀한 목숨을 버리셨듯이, 남편 역시 동일한 <주님의 사랑>으로 아내를 극진히 사랑 해야 한 다는 것 입니다.

3. 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에베소서 6:1-3)“

<부모공경>은 <약속>있는 <첫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부모공경>하는 자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의 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복이겠습니까? <장수(長壽)의 복>과 <형통(亨通)의 복>입니다.
인생을 오래 살면 살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요, 복은 하늘에서 내려주어야 비로서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사람들은 보약(補藥)이 된다면 지렁이도 갈아 삼키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듭니다. 그렇다고 <장수의 복>을 누리고, <재물의 복>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 복을 누리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바로 <부모공경> 잘하는 사람입니다.
<부모공경> 잘하면 <장수(長壽)의 복>을 누리고, <재물의 복>을 누리고, <형통의 복>을 누립니다.  이 복을 누림은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이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입니다.

그러면 <부모공경>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를 존경>하는 것입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늙고 쇠약해진 부모 성심으로 보살펴 드리는 것입 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십니다. 장수하게 하시고, 형통하게 해주시고, 잘되게 해주십니다. 이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창세기 20:12)“

4.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말아야 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6:4)“ 

무슨 뜻입니까? 철없는 자식이라 해서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어릴지라도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그 생각과 의견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성인이 된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일입니다. 학교에서 받아쓰기 시험을 봤는데 점수가 형편없었습니다.  그런데 부모 싸인 받아 오랬다고 공책을 내 밉니다.  이런 점수에는 싸인 해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울먹이면서 하는 말이, 어떻게 항상 좋은 점수만 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시험을 보면 점수가 잘 나올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 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 말이 됩니다. ‚그래 네 말 이 맞다 하고 즉시 싸인을 해주었습니다.

효도도 손발이 맞아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한 동네에 <소문난 효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 동네에는 <소문난 불효자>가 있었습니다. 이 불효자는 마냥 불효자라며 매를 맞고, 구박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자기도 <효자>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옆 동네 <소문난 효자> 집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에게서 효도하는 법을 보고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때는 몹시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이 효자는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먼저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요를 깔고는 그 속에 들어가 누워있었습니다. 요를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들어오자 즉시 자리를 비워주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이 되자 이 효자는 다시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가 윗목에 개켜놓은 아버지의 옷을 껴입고는 아버지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렸습니다. 차가운 옷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깨어났을 때 이 효자는 즉시 껴입고 있 던 아버지의 옷을 벗어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의 아버지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이 효자는 밖으로 나가 그의 아버지의 신발을 신고 기다렸습니다. 그의 발의 체온으로 아버지의 신발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아하! 이것이 효도로구나! 이런 효도라면 나도 하겠다!‘ 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도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저녁이 되자 이 불효자는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가 찬 이불을 꺼내 깔고는 그 속에 드러누워 아버지가 들어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아버지가 들어와 이 모습을 보고 는 대뜸 호령을 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또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그러려니 하고는 이 불효자는 다음날 새벽 일찍이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아버지의 차가운 옷을 껴입고 는 그의 아버지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아버지가 잠에서 깨어나 이 모습을 보고서는, 이놈이 돌아도 보통 돈 게 아니라며 따귀를 쳤습니다.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서 이 불효자는 밖으로 나와 아버지의 차가운 신발을 신고서 아버지가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아버지가 노기(怒氣)가 충천하여 세상에 이런 불효자가 어디 있느냐며 그의 아들을 사정없이 걷어차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효도도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손발이 맞아야 합니다.

구약성경 <룻기>의 기록은 이스라엘 <사사 시대(士師 時代)> 말기의 <소문난 효부>였던 <룻>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룻기를 찬찬히 읽어보면 <룻>이 그냥 효부가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어머니에 그 며느리였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6:4)“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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