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부쩍 한국은 국가적으로 지난 역사에 대한 힘써 재조명하는 것을 본다. 몇 해 전 서울 풍납동 근방에서 백제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발견된 유물들이 한반도를 넘어 산둥반도와 일본 큐슈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과 흡사하여, 고대 한반도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고대 백제의 화려함과 막강함 그리고 광대함에 대하여 연구하고 발표를 실은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연구자들은 ‘아마도 백제는 두 개 혹은 세 개의 수도를 가진 고대 왕국일지 모른다’ 라고 주장했다. 이 연구가 사실이라면 참으로 대단한 고대 제국 백제라고 하겠다. 이런 노력은 한국이 역사적으로 부강한 나라였다는 것을 만방에 과시하고 그 후손으로서의 긍지를 갖게 한다. 과연 이런 방식이 한민족의 긍지와 자존감이 세워질 수 있을까 싶다.  

북조 이스라엘에게도 역사적인 장소들이 있었다. 그들은 분단된 이후 이들 도시의 역사 속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어떻게 기념하며 생활 속에서 활용했는지 살펴보자. 


1. 북조 이스라엘의 배교 현장

북조 이스라엘은 10지파로 남조 유다와 분리되어 형성된 나라다. 이는 이미 하나님께서 아히야를 보내 솔로몬의 배교적 정치를 지적하시며 여로보암에게 예언하신 말씀대로다.  
* 왕상 11:36~38 그의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이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10지파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잡은 후,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자기 마음대로 날과 절기를 정하고, 일반인을 제사장으로 세우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길갈을 수도로 삼고, 그리고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백성에게 이 금송아지 신이 과거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낸 바로 그 신이라 공포했다(왕상 12:25~33).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화나게 했다. 왜냐하면 그에게 권력이 주어질 것을 예언하면서 주지시킨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어긴 행위였기 때문이다. 

결과, 백성은 이방 종교 문화 속에서 음란과 방종에 빠져 추잡한 나라가 되었다. 여로보암이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잊어버리고 배교한 결과였다. 여호와 하나님은 계속하여 아모스 그리고 호세아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셔서 북조 이스라엘을 질책하시며 경고하셨다. 
* 호 4:12~14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그들이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 도다. 너희 딸들이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2. 하나님의 경고

하나님은 방탕하고 음란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우 구체적인 책망과 함께 경고하셨다. 
* 호 4:15 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  
  
이 구절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세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첫째, 길갈과 벧아웨으로 가지 말라. 둘째,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 셋째, 너는 음행을 해도 유다는 죄를 짓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죄가 유다로 번지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이 명령과 지적에 대하여 살펴보자. 무슨 뜻이 담겨 있을지 살펴보자 
 
1) 길갈과 벧아웬으로 가지 말라
길갈(Gilgal)은 어떤 곳인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요단강을 건넌 후 발을 디딘 장소가 길갈이다. 길갈의 뜻은 "구르다(roll out), 벗기다(take off)"이다 이는 애급에서 430여년을 노예로 종살이한 수치를 벗고 진정으로 자유인이 된 것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수 4:20). 

이 의미가 있는 길갈은 이후 매우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로 변모하게 된다. 
a. 가나안 첫 정착 장막을 친 곳(수 10:15), b. 광야 40년 동안 이후 첫 할례 행한 곳(4:19), 
c. 사울 왕의 즉위 장소(삼상 11:15), d. 사무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곳(삼상 10:8), 
e. 사울의 폐위를 선고한 곳(삼상 13:15) f. 북조 이스라엘의 수도 등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여로보암은 길갈 지역인 세겜을 수도로 삼았다. 그곳에 왕궁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통치했다(왕상 12:25). 그리고 거대한 금송아지를 벧엘과 단에 세워 백성으로 하여금 배교하도록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곳 길갈로 가지 말 것을 명하셨다. 하나님은 같은 명령을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도 강력하게 하셨다. 아마도 브엘세바에도 같은 금송아지 우상을 세웠던 것 같다. 
* 암 5: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벧아웬(Beth Aven)은 어딘가? 벧엘 근방의 지명이긴 하지만(수 7:2; 삼상 13:5), 사실 이 명칭은 벧엘(Bethel)을 가리킨다. 벧엘이 어디인가? 야곱이 형을 두려워하여 아버지 집을 떠나 외삼촌에게 가던 중 하나님을 만난 곳이다(창 28:16~19). 벧엘의 뜻은 “하나님의 집(the house of God)"이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집’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워 ‘우상의 집’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여로보암은 정략적으로 백성이 익숙하게 알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인 길갈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웠던 것이다. 그것은 여로보암이 간교하게 구원의 하나님께 기념하고 경배했던 영광스러운 장소를 자신의 정치적인 야욕의 장소로 삼았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곳으로 가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이런 명령을 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이유일까? 당연히 그러셨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과거 영화를 이용하거나 그 영광에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은 과거의 잘남과 성공 그리고 영광스러움에 큰 자부심을 느끼며 그때를 집착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우상이 되고, 경력과 자랑이 되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그곳으로 가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를 구주로 받아드리고 새사람이 된 자는 지난날의 화려함과 영광됨을 그리워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유는 그런 것이 계속 우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새롭게 지음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 안에서 거듭난 성도는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에 사로잡혀 사는 자가 아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항상 새롭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이전 것을 지나갔음을 절감하고 과거와 단절하고,  과거를 청산하고, 예수 안에서 항상 새로운 신분에 맞게 기뻐하고 즐기며 미래 지향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시행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라고 했고, 에베소 교회에게는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10)”고 했고, 골로새 교회에게는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라(골 1:10)”고 명했다. 

2)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 
이스라엘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버리고 죽은 신을 섬겼다. 그들은 금송아지가 애급에서 구원해 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왕의 정략적인 회유에 속았다. 그들은 금송아지 우상 앞에 제사를 드릴 때 마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원도 하고 맹세도 했다. 

하나님은 이런 거짓된 행위를 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이는 어리석은 배교행위다. 무식하고 비이성적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고 간곡하게 말씀하셨다. 
*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어리석고 한심하며 무지몽매한 이스라엘은 참으로 살아계시고 변함이 없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만 했다. 우리 역시 이스라엘과 같이 무지몽매(無知蒙昧)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말씀에서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결코 종교적인 형식으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다. 주일에 나와 예배만 드리면 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속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3계명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명하셨다.
* 출 20: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3) 너는 음행을 해도 유다는 죄를 짓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죄가 유다로 번지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즉 아무리 북조 이스라엘이 화려하고 매력적인 우상 숭배 문화를 누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북조 이스라엘과 달리 남조 유다를 보호하시겠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을까? 바로 다윗과 맺으신 언약 때문이고, 예루살렘에 당신의 이름을 두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 왕상 11:35~36 내가 그의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그의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  

이렇게 하나님은 한번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언약 백성을 보호하신다. 이 진리를 믿은 시편 저자는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어 달라(시 17:8)”고 하나님께 기도드렸던 것이다. 

실로 길갈이나 벧엘 그리고 브엘세바 모두 과거에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하신 뜻 깊은 곳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 과거의 명성을 자기의 정치적 욕망을 위해 이용하지만, 이미 우상숭배의 요람이 된 곳이기에 하나님은 속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지 말 것을 명하셨다. 


3. 여호와를 떠나 우상에 빠짐에 대한 경고

* 호 4:16~19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그들을 먹이시겠느냐.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그들이 마시기를 다 하고는 이어서 음행하였으며 그들은 부끄러운 일을 좋아하느니라. 바람이 그 날개로 그를 쌌나니 그들이 그 제물로 말미암아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

무슨 경고인가? 하나님은 아무리 아모스 선지자를 보내고 호세아 선지자를 보내서 경고하여도 듣지 않는 북조 이스라엘의 완강함을 지적하셨다. 완고함이란 주인이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완강하게 거부하는 암소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상징이다. 

소는 넒은 초지에서 마음껏 풀을 뜯어 먹을 때 가장 행복할 것이다. 그래야 젖도 많이 나와 어린 송아지도 먹이고 번성할 것이다. 하나님은 완강한 암소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우상과 연합한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그들에게 넓은 들판, 풍부한 먹을 것 즉 번영을 허락하시겠는 지를 지적하신다. 그들이 우상 숭배하며 온갖 음란에 빠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태와 아름다움을 상실한 자들이기에, 어떻게 양식을 주고 복을 내려 주겠는가? 주면 타락하여 더욱 음란에 빠질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북조 이스라엘은 남조 유다보다 더 부유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자 먼저 망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다. 북한과 남한이 그런 역사를 지금 겪고 있지 않은가! 

방임과 무관심은 가장 큰 저주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관심을 표하시며 간섭하심은 그만큼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만약 관심을 끄고, 간섭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저주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 대한 관심을 끄고 그냥 내버려 두신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두렵지 않은가! 
* 시 94:1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관심을 끄고 버리신다면,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외면하심으로 처리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경고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관심을 끄시고 그대로 방치하여 내버려두시면,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종국에 가선 강력한 바람에 날려 우상을 숭배하며 제단에 드려졌던 재물로 인하여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 경고대로 역사는 이루어졌다. 

이미 그들은 이 점을 경험했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발람의 교훈을 따라 음란에 빠져서 하루에 2만 3-4천명이 죽는 참혹한 사건을 경험했었다(민 25:1~9; 호 9:10b).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강하게 경계했다. 
* 고전 10:8~9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러나 북조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배우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몰두했다. 그들은 계속되는 하나님의 경고에도 배교하여 강력 바람 같은 강한 앗수르의 공격을 받아 철저하게 짓밟혀 망했다. 세상으로부터 온갖 수치와 조롱거리가 되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강력한 바람에 산지사방에 흩어져 망해버렸다. 북조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아수르에 의하여 철저하게 망했다. 무서운 경고가 아닐 수 없다. 

결론

이런 하나님의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을 버리고 간교하게 세상을 섬기는 우리가 아닌가? 돈이 우상이고 괘락이 우상인지 오래다. 그래서 무늬만 교인인 자, 이들을 Almost Christian이라 부른다. 이중 종교자, 이들을 위선적 크리스천이라 부른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강력하게 경고하신다. “내가 널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 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그러나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 유다 자손들은 죄를 짓지 않도록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15절).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세상 유혹에 넘어가면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신다. 그것을 하나님 탓으로 원망할 수는 있겠는가! 

호세아의 경고의 말씀을 깊이 마음에 담기 바란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곳에 나와 말씀을 듣는 이에게 관심을 갖고 이렇게 지적하고 책망하며 구원의 도리를 알리신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과 인식을 통하여 빨리 하나님께 돌아오는 은혜의 역사가 있기를 소원한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간곡하게 부르신다.
* 사 55:6~8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지금도 예수께서는 초청하신다. 부르시는 주 앞에 나오시기 바란다. 그리고 모든 짐을 주 앞에 내어 놓고 주의 긍휼하심과 용서와 안식을 얻으시기 바란다. 
* 마 11: 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생각하고 꿈꾸는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시고 우리를 다루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살아계신 하나님의 깊은 생각과 뜻을 확인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연약함과 추함 그리고 가난함을 아시는 예수님, 와서 주 안에서 쉼은 얻으라고 부르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인생의 무거운 짐을 주 앞에 내어 놓고 참된 안식을 얻게 하옵소서. 주님의 짐은 가볍고 쉽기에 신속하게 주 앞에 나아가게 하옵소서. 거룩하신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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