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당시 북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왕 마음대로 이방 신상을 세워 자신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불렀다. 그리고 왕이 임의로 제사장을 세우고 온갖 이교도의 종교문화를 받아드려 백성의 기호에 맞게 종교를 이용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런 사회의 분위기를 안타깝게 여기며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을 가감없이 전했다. 호세아서에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설교 9편이 담겨있다. 각 설교의 중심 주제는 그들의 하나님인 여호와에 대한 무지를 질책하고 경고 그리고 간곡하게 회개하여 돌라올 것을 촉구하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다운 참 이스라엘로의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지난 시간에 이어 그의 두 번째 설교를 들어보자. 두 번째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께  불순종 죄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말씀이다. 


1. 경고 개요

호세아 5:1-7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에 대해 경고를 본다. 설교는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호 5:1)” 라고 시작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백성이 그 메시지를 분명하게 듣기를 원하신다. 말씀의 강조하신 바가 무엇인가? 세 동사로 요약된다. 첫째, 들으라(hear).  둘째 깨달으라(pay attention). 셋째, 귀를 기울이라(listen). 무슨 의미인가? 주의 깊게 경청하고 깨달으라는 경고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고 주의를 기우려 순종할 의지를 가져야 한다. 과연 오늘날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우려 듣고 순종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

요즈음은 대부분 핸드폰이 있다. 모두가 어디서나 헨드폰을 본다. 집이나, 카페, 어디서든지 핸드폰을 본다. 핸드폰을 보며 길 가다가 돌부리에 걸리고 나무와 전봇대에 부딪치기도 한다. 심지어 운전 중에도 핸드폰을 보고 문자를 쳐 넣기도 하다가 사고를 내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크게 듣고, 항상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들은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말씀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다(롬 10:10).”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과 구원간의 관계성에 대하여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라고 말했고, 시편기자는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먹기 위하여 갈급해 하듯이 자신은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한다(시 42:1)“ 라고 고백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시편 기자 역시 하나님 말씀이 중요하여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유용하기 때문이다. 
* 시 19:7~10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여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 사도 요한에게 종말을 사는 우리 모두를 위한 중요한 계시의 말씀을 하셨다.  
* 요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신실한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을 집중하여 듣기를 힘써야 한다. 


2. 경고 이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경고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 호 5:3~6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 대신 이방 민족의 우상과 문화를 적극 받아드려 배교하고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타락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시고 알고 계셨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한다!”고 선포했다.  

과연 사람이 어느 곳에 숨어 하나님의 낫을 피할 수 있겠는가?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다. 
* 시 139:7~10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그렇다. 아무리 숨어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시듯이, 하나님은 여기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항상 보고 계시고 알고 아신다. 마치 마치 오늘날 어디에나 감시 카메라가 있어서 행동을 조심하게 되듯이, 성도는 항상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조심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주도적인 실행했던 신실한 성도는 그들의 삶의 목표로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Before God)" 라고 정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것이 개혁주의 성도의 신앙의 원리가 되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북조 이스라엘의 배교와 우상 숭배의 정치적으로 결탁하여 그 나라의 도움을 구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시며 심판을 경고하셨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음행, 추함, 음란, 악한 죄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음란 문화는 사회 전체가 음풍에 휩싸이게 되어 윤리와 도덕이 사라지고 사회가 무질서 하게 되었다. 그런 악한 바람은 남조 유다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런 북조 이스라엘의 배교와 타락과 악행을 지적하시며 심판을 경고하셨던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까지 타락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놀랍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결핍이다. 하나님 지식이 결핍되니까, 출애급 당시 아론이 세웠던 금송아지를 밷엘과 단을 비롯한 여러 곳에 세워 “이것이 우리를 출애급시켜 준 여호와 하나님이다! 라며 무지한 백성을 호도했다. 그리고 거짓 제사장들을 세워 각종 이방 우상 종교문화를 확산시키며 타락하게 했던 것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안다(yada, to know)”는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적이고 체험적인 앎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채 거짓 시식으로 자기 마음대로 흉내만 내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런 종교적 지식과 문화는 하나님을 떠난 잘못이라고 지적하셨다. 

하나님 지식의 결핍은 우상을 섬기게 하고 타락하여 죄에 빠지게 한다. 스스로는 잘 믿고 섬긴다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이런 신앙은 전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러한 신앙은 하나님을 전혀 체험할 수 없다. 이는 신앙을 흉내만 낼 뿐, 사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쓸데없는 종교적 지식을 갖고 있을 뿐이다. 

북조 이스라엘의 이런 타락한 종교문화는 심각하고도 결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못하고 사생아를 낳았다!” 강하게 질책하며 저주했다. 
* 호 5:7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백성에게는 썩음 같을 것”(호 5:12) 이라고 경고했다. 이것은 죄의 파괴적인 힘을 예증하는 강력한 은유이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언급했듯이, 좀이 의복을 갉아먹어 아까운 옷을 못 쓰게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나프탈린을 옷 속에 넣어둔다. 좀과 같이, 죄는 우리의 삶을 갉아먹어 아무것에도 쓸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천천히 여기 저기에 퍼져 모든 것을 파괴한다. 이와같이 죄는 우리 속에 천천히 잠식하여 우리를 파괴하고 부수어서, 겉으로 볼 때, 육신만 멀쩡할 뿐 속은 썩고 병들어 아무 것도 남지 않게 할 것이다. 죄는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한다. 무서운 죄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 6:23)”라고 규정했다. 


3. 경고의 내용

이제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내용을 살펴보자 
* 호 5:5~7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서 떠나시겠다는 것이다. 더 이상 그들에게 관심과  간섭을 하지 않고 경고하며 일깨우시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싶지만 사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이 조치가 왜 무서운 일인가? 사실, 우리가 사는 것이 우리의 힘과 재간으로 사는 것 같지만, 이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북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우상숭배하며 배교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상실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서 떠났던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서 떠나겠다고 경고하셨다. 이것처럼 심각한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과연 하나님께서 떠난 백성이 안전과 평안을 누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46장 “주 음성 외에는(I need thee every hour)” 3절 가사를 보자, 
주 떠나가시면 (I need Thee eve-ry hour) 내 생명 헛되네(In joy or pain).
즐겁고 슬플 때(Come quick-ly and a-bide), 늘 계시옵소서(Or life is vain).
기쁘고기쁘도다(With Thee what joy I cap-ture!). 항상 기쁘도다(Ev-ery hour is rap-tue!).
나 주께 왔사오니(O bless me now, my Sav-iour), 복 주옵소서(I come to Thee).

그렇다! 마치 신생아에게 엄마가 꼭 필요하듯이, 성도에겐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의 생명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주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고, 주께서 함께 하지 않는 성도의 삶은 의미가 있을 수 없다. 그의 삶 어떤 부분에서도 진정한 감사와 기쁨 그리고 안전과 평화가 보장될 수 없다. 성도에겐 하나님께서 굳건한 반석이 되시기 때문이다. 

* 하박국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심판을 경고하셨다.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하여 아무리 많은 제물을 갖고 와서(참고, 사 1:11~15), 이방 신상을 섬기며 화려한 축제 즉 새달 축제 (new moon festival)를 그 축제를 즐긴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이런 제사와 축제가 오히려 그들을 삼키고 그들의 기업 즉 삶의 근거를 다 삼켜 버려 망하게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다. 

무슨 뜻인가? 이스라엘의 배교적 삶은 결국 그들을 망하게 하여 그들의 생활 터전을  다 일어버리게 하는 심판을 시행하겠다는 무서운 경고다. 아무리 우리가 노력하고 애쓴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셔서 우리가 잘 살 수있을 것이 아닌가! 

이미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선택할 것을 요구하셨다. 
* 신 11:26~28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결론

호세아의 설교는 이렇게 단호하고 무서운 경고와 심판만 선포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하나님은 이러한 경고 속에서도 희망을 주신다. 
*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그 분께 돌이킬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우리가 탕자같이 굴더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이(눅 15:20) 기다리시고 맞아주시고 품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기꺼이 맞아주시고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이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를 들으시는가? 이것이 복음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 본문의 강력한 메시지를 마음에 깊이 품길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우리는 부르시는 하나님의 경고와 초청을 외면하지 말기 바란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주 앞에 나와 참된 용서와 회복을 구하길 바란다. 
* 고후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변함없는 사랑과 관심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우리게 하옵소서. 주여 진리의 말씀으로 일 깨우셔서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채워주옵소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악한 세상에서 저희들을 주의 자녀로 온전케 하사 주를 기쁘시게 하고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드리게 하옵소서. 거룩하신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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