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반도의 정세가 심상치가 않다. 남북한이 매우 긴장하여 국가 안보에 심혈을 기우리고 있다. 두 나라 모두 국방력 증강에 혼신의 노력을 기우리며 대치하고 있다. 북한은 핵무기로, 남한 역시 핵전력을 미국에 의존하고 신무기 개발에 전력하고 있다. 참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어느 매체에서 북한이 용산을 중심으로 한 상공 800m에서 핵무기를 터트리면 어떻게 되는 지를 밝혔다. 결과는 참담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 전체가 몰살하는 결과였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때만 생존이 가능한 때가 되었다.   

호세아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보게 하시는가? 호세아의 하나님은 북조 이스라엘의 배교와 타락을 책망하시며 구체적인 메시지를 주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심각한 배교의 상황을 호세아 가정에서부터 겪게 하시고 그의 사역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적나라하게 밝히시고 심판을 경고하셨다. 
* 호 5:7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   

하나님은 공의롭기만 하신 신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이 두 성품 즉 사랑과 공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잘 나타내 준다. 두 성품이 함께 나타난 것이 “질투하시는 하나님” 이다. 사랑하기에 질투하신다. 하나님의 이 두 성품이 호세아의 두 번째 메시지에서 잘 드러난다.   


1. 질투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질투란 지나친 관심으로 나타나는 애증의 행위다.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은 뱀과 하와 그리고 아담 각각을 정죄하시며 저주하셨다. 그 저주 가운데 하와에겐 해산 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심판과 함께 한 가지 의아한 심판하셨다. 
*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와에게 내린 심판은 임신과 해산의 고통이다. 그리고 아내가 남편을 원한다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원하는 것이 당연한데 왜 이것이 심판일까? ‘원함’은 소유욕 즉 장악하려는 욕망(desire)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그녀는 남편에 대한 지나친 소유 욕망(desire)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와에게 내린 또 하나의 심판이다. 

남편에 대한 소유 욕망이 왜 심판일까? 남편을 자기 마음대로 갖고자 하기에 발생하는 결과가 저주다. 아내가 남편을 좌지우지(左之右之) 할 때, 어느 남자가 마음 편히 순종할까? 둘 사이엔 갈등이 발생하게 될 것은 당연하다.  

죄 가운데 살아가는 타락된 가정은 남편과 아내와의 갈등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성도에게 지시하는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는 사랑과 존경의 관계로 서로에 대하여 깊은 배려와 순종으로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명령했다. 
* 엡 5:22~28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하나님은 애증이 많으시다.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시는 역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지나친 관심을 나타내시고 사랑하시기에 진노도 하시는 것이다. 즉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진노 역시 사랑의 한 속성이다.  

이렇게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애증을 보여준다. “질투하는 사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다. 
* 호 6:1~2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세아는 성도에게 하나님을 감정이 풍부하여 예민하고 인격적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단순한 종교적인 형식과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온 마음과 뜻을 다하여 진정성 있게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하나님은 찢으시고 낫게 하시고, 치시고 싸매어 주시는 살아계시고 감정이 풍부한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한편, 가장 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질투는 십자가 사건에서 잘 나타난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셔서 죄에 대한 대응으로 심판하셨다. 그것이 십자가 처형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인간을 죽일 수는 없으시기에 하나님께서 취하신 최후의 방식이 바로 십자가 형벌이다. 이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설명한다.  
* 요 3:17~18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택하신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당연히 질투하신다. 질투하시는 사랑으로 어떠한 형태로든 택하신 백성을 징계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신다. 


2.  반역의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로 분단되어 서로 간에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급기야 서로 전쟁까지 치렀다. 호세아 5:8~15은 남조 유다와 북조 이스라엘 간의 전쟁 즉 남조 아사 왕과 북조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 사이에 있었던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 왕상 15:16~17 아사와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동안 전쟁이 있으니라.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와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한지라.

이 말씀에서 보듯이 북조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남조 아사 왕 사이에 평생 동안 앙숙이 되어 끝없는 갈등을 겪었다. 그런데 바아사는 전쟁에 패배하여 라마 성을 아사에게 빼앗겼다. 
* 호 5:8~9 너희가 기브아에서 뿔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나팔을 불며 벧아웬에서 외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 벌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폐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반드시 있을 일을 보였노라. 

이 말씀을 통하여 당시 양 진영 간에 벌어진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 등장하는 ‘기브아, 라마, 벤아웬(벧엘)’란 곳은 북조 이스라엘에 속한 곳으로 남조 유다와의 경계 도시였다.

첫째 북조 이스라엘의 상황
남조 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조는 자신의 권력 유지와 남조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시비를 걸었다. 둘은 도덕적인 타락과 함께 남조 유다과 전쟁을 치렀다.  

당시 북조 이스라엘의 상황은 간교하고 집요하게 동족을 괴롭혔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게 대하여 침묵하지 않으셨다.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반드시 있을 일을 보였노라(9절)”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보고 계셨고 심판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북조 이스라엘의 의도를 묵살하시고 유다를 점령하지 못하게 하시어 “벌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폐할 것이라(9a)!”고 정죄하셨다. 이 말씀은 장차 앗시리아에 의하여 북조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하여 그 땅이 황폐화 되었던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둘째, 남조 유다의 상황
한편, 하나님은 유다도 간섭하셨다. 이 역시 살아계신 하나님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다(10절).” 라고 지적하셨다. 이는 남조 유다가 북조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땅을 빼앗았음을 의미한다. 경계표란 국경을 의미하는 데. 유다가 그 국경선을 북조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르면서 임으로 옮기는 간교함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북한이 호시탐탐 남한을 위협하고 시비를 거는 가운데 전투가 벌어져 남한이 휴전선을 넘어 북한의 개성, 평양, 신의주로 올라가는 상황과 같다 하겠다. 결국 이 전쟁은 북조 이스라엘을 황폐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벌이며 또한 침략한 남조 유다에 대한 진노인 것이다. 같은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북조 이스라엘은 남조 유다를 괴롭히고, 남조 유다는 전투에서 승리하여 경계선을 옮기는 간교함으로 서로 간에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같은 유다에 대하여 “그들을 물같이 부으리라(9b)!” 경고하셨다. 엄청난 홍수와 같은 재난으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이 역시 장차 바벨론에 의하여 유다가 멸망할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현재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남북한이 서로 얼마나 갈등을 겪고 있는가! 모두 하나님께 돌아와 서로 뉘우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구현하기 위하여 힘써야 할 때다. 과연 성도와 교회가 얼마나 이 점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며 간구하고 있는가?

셋째, 하나님의 질투하시는 간섭
당시 북조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인 에브라임과 유다는 서로 싸우기만 했지, 근본적인 해결책을 갖지 못했다. 두 나라 지도자들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두 지도자 모두 자기 왕국이 병들고 상처 입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 강대국의 힘을 의지하여 그 동족간의 전쟁에서 승리하려 했다. 이들 양국은 흥미롭게도 양국 모두 당시 최강국이었던 북방 앗시리아에 사신을 통하여 조공까지 받치며 자기를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 간교하고 잔악한 앗시리아는 오히려 그 상황을 역이용하여 북조 이스라엘을 치고 유다를 괴롭혔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이다. 이러한 인간적이고 비신앙적 해결 방식을 하나님은 정죄하시며 그들을 떠나셔서 북조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주전 722년에 철저하게 망했다. 남조 유다 역시 앗시리아에게 심한 고통을 겪으며 얼마간 유지되다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앗시리아가 망하고 예언하신 대로 주전 584년 유다 역시 바벨론에게 패망했다. 

이에 대하여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했다.  
* 호 5:12~14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좀과 같이, 유다에게는 썩이는 것 즉 곰팡이와 같이 되어 두 나라를 모두 옷을 좀먹어 못쓰게 만들고 부패하여 썩게 만들 듯이 두 나라 모두를 멸하시겠다고 하셨다. 이는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이방의 군사력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정책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결과 이스라엘에게 사자 같고 유다에게는 젊은 사자같이 강력하게 모두 망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신다. 아무리 용감하고, 정책이 완벽하고, 군사력이 막강하다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이 원리는 개인이나 가정 그리고 나라와 사회 모두가 같다. 이 때, 믿는 성도는 어찌할 것인가? 본문을 근거로 생각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을 남한은 북한의 공격에 밀려 낙동강 전선 이북 전체를 내주었다. 그때 피난민은 부산 초량교회에 모여 통회 자복했다. 그들은 신사참배와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되었음에도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동족상잔의 비극까지 겪는 심판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회개했다. 그리고 간절히 구원해 주실 것을 간청했다. 결과, 하나님은 1945년 유엔이 창설된 지 처음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전쟁을 치르므로 38선 이남이라도 대한민국이 차지하게 하셨다. 그 이후 자유로운 나라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 돌아갔기에 가능했다는 점이다.  


3. 하나님의 간곡한 요청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심판의 한 도구다. 인간이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전쟁을 활용하신다. 전쟁에 관한 글을 읽거나 영상을 대할 때마다 결코 그 전쟁은 낭만적지 않고 아름답지 않다. 전쟁은 언제나 잔인하고 참혹하고 무섭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라. 역시 비열하고 잔혹하고 참혹하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형벌과 진노의 수단이 전쟁이라는 사실을 알 때,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러기 위하여 항상 유비무한의 정신으로 전쟁 억지 능력을 기르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기를 늘 추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개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실천하지 못하는 죄에 대하여 깊이 회개해야 한다. 

결론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청하신다. 
* 호 5:15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성경 전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지, 아니면 인간의 말을 따르는 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가, 아니면 인간의 말과 사상을 따르는가? 분명한 점은 인간을 믿고 따르면 실패와 패망, 그리고 억압에 빠지게 되지만, 하나님 말씀을 따르면 승리요, 성공이요,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 현재 심각한 고통과 어려움을 격고 있는가? 자신을 되돌아보길 바란다.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와 회개로 주를 찾아야 한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해야 한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간곡히 요청하신다. 나와 죄를 뉘우치라고! 바로 이 때가 사도 바울은 말한 “하나님께서 도우실 수 있는 때이고 구원의 날이다”  
* 고후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오늘날 조국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북한은 핵무기로 끊임없이 남한을 위협한다. 남한 역시 자유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첨단 무기를 만들며 군사력 증강을 꾀하고 있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정황이다. 남북이 서로 동맹국에 의지하여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위기의 상황이고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이다. 

성도 여러분, ‘지금 환란을 당하느냐. 고난을 당하느냐, 나를 찾아 나와서 간절하게 구하라” 라는 주의 간청을 외면하지 말고, 거부하지 말고 들으시라!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애증어린 사랑으로 Come Back to Me! 라고 간청하신다.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주의 사랑 가운데 부르시고 인도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상황이 호세아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번영을 얻었을지 모르나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변질되었고 타락했습니다. 주여 긍휼히 어기시사 주의 얼굴을 구하게 하시고 주께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거룩하신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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