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날씨는 예전 같지 않은 것 같다. 당연히 추울 때 춥고, 더울 때 더워야 하는 데 예년 같지 않아 종을 잡을 수 없을 정도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큰 변화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미국에 와서 사는 우리 모두는 큰 변화를 겪으며 살아간다. 사실 변화보다는 안정이 더 좋은 것이 아닌가? 변덕이 심한 사람보다는 차분한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좋다. 


1. 북조 이스라엘의 배교를 겪는 선지자

호세아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먼저 그는 개인적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 결혼이 순탄하고 안정적이어야 하는데 아내 고멜은 타락한 여인이었다. 아내 고멜은 아이를 낳고서도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갔다. 아내가 바람이 나서 가정을 떠났다고 생각해 보라. 호세아는 얼마나 힘든 결혼 생활을 했을까?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 때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타락한 네 아내 고멜을 다시 데려오라) 라고 명하셨다.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호 3:1a~3).”

이러한 호세아 선지자의 가정의 상황은 당시 북조 이스라엘의 모습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가정상황이 곧 이스라엘의 상황의 상징적 계시이다. 집나간 아내를 돈을 주고 다시 데려와야 하는 호세아는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깊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한 아내 고멜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이방 우상을 섬기는 배교한 위선적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품어 주시며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애증어린 사랑을 호세아는 자기 가정을 통하여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깊이 느끼고 그런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호세아는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소한다. 


2. 간곡한 호소: 힘써 여호와를 알자

* 호 6:1~3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북조 이스라엘이 남조 유다와 분리된 후 왕 여로보함은 백성들이 남조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도록 화려한 이방종교 문화를 채택하여 나라 곳곳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세우고 일반 백성 중에서 제사장을 세우고 년 중 화려한 바알 신을 섬기는 축제를 즐기게 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우민정책을 폈던 것이다. 그 결과 나라는 교만과 방종, 타락과 부패, 무질서한 무정부 사회가 되고 말았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런 타락과 위선적 배교 생활은 근본 이유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계시하시는 풍성하고 놀라운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을 떠나 배교한 생활을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호세아는 백성에게 여호와를 힘써 알자고 외쳤다. 

그러면, 호세아가 말하는 하나님을 알자는 무슨 의미일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 몰라서 이런 호소를 한 것일까? 아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알라”는 것은 지적인 앎, 강 건너 보듯이 단순하게 짐작하여 아는 정도가 아니다. 

당시 북조 이스라엘 백성은 남조 유다 예루살렘에 가면 그곳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형제 지파 유다 백성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유다 사람들이 섬기는 신이 여호와라는 신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호세아의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하는 것이 백성이 모르니까 가르쳐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 호 5:3~4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호세아가 판단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원인이 “음란이 마음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지적하시며 원인이 음란 즉 육신의 괘락을 추구함에 있음을 밝히셨다.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호소한 것이다. 

히브리어 '안다(yadah)'는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체험하여 얻은 지식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냉철한 이지적 지식으로 비교 분석하여 어떤 법칙을 깨닫고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마치 사람을 아는 것과 같다. 만나고 관계를 맺고, 교제하므로 알아지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교제를 하므로 얻게 되는 경험적 즉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이다. 


3.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방법 

어떻게 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

첫째, 성경 말씀을 묵상하자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밝히 담아 놓으신 성경을 읽고 묵상하여 그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는 과정을 통하여 그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생각과 의도 그리고 역사하심을 알 수 있다. 
* 시 19:7~10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참으로 복을 받은 사람이고 복된 사람이다. 
* 시 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바울은 설명한다(딤후 3:16). 이 때, 하나님의 감동이란 하나님의 숨이란 의미다. 즉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고 하나님께서 생명을 부여하셔서 주신 것이 말씀이다.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고 우리 가운데 오신 말씀이다. 즉 우리가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드리면 우리 속에서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요 1:1, 14).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신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 때 참된 지식을 얻게 되어 지혜롭고 유능한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잠언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둘째, 기도를 통하여  
읽고 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께서 나를 행하신 생각과 뜻을 안 다음에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시편 19편을 쓴 성도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했다. 
* 시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문제는 어떤 기도를 드리느냐 일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기다리는 기도를 드리는가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바를 아뢰고 들어달라고 떼를 쓰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분명 하나님은 나를 위한 뜻을 갖고 계신다. 기도할 때 주신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뜻을 체득할 수 있다. 

한편, 어떤 때는 하나님은 즉각 들어 주시지만, 어떤 때는 거절하시기도 한다. 바울은 세 번씩이나 자신의 연약함을 고쳐달라고 기도했으나 하나님은 “네게 베푼 은혜가 족한 줄 알라고 응답하셨다(고후 12:7~9).

 

셋째, 생활 속에서 순종하여 실천해 봄으로  
이는 깨달은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시편 19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 시 19:11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 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체험하는 가장 직접적인 것이 바로 깨달은 말씀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시편 저자는 말씀으로 유익을 얻고 경고를 받고 보상을 받았기에 이런 고백을 한 것이다. 

성도는 말씀을 순종하여 그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서 기쁘게 원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하므로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말씀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함으로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된다. 


4. 여호와를 맛보고 아는 경험을 하자

그래서 호세아는 이렇게 말했다. 
*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앞에서 살폈듯이,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성경 말씀을 묵상하여 깨달은 하나님의 생각과 의도 그리고 그 뜻을 실천하여 얻게 된다. 그렇게 하나님 경험하는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런 지식이 “여호와를 아는 것”이라고 두 번씩이나 강조한다. 

시편 기자도 이 점을 강조하여 권면했다. 
* 시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들이 체득한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첫째, 새벽빛 같이 일정하신 하나님. 
즉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변덕이 없으시고 한결 같으신 하나님이시다. 안정되고 신뢰감이 있고 믿음직스러운 하나님이시다. 
* 민 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은 예레미야 선지자는 나라가 망해서 파멸하는 중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고백했다. 그것은 말씀대로 이루시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 애 3:23~26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때가 있고 그 때가 되어야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일하신다. 예레미야는 그 하나님을 사모했던 것이다. 일상에서 이러한 신실한 하나님을 경험하고 고백하길 바란다.  

둘째, 때를 따라 적절하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제가 8년을 살았던 LA는 겨울이 우기다. 비가 거의 없는 그 곳에 겨울에 비가 와야 그래도 땅이 축축해 져서 보기 좋다. 그 시기가 지나면 온 들이 황량해 진다. 계절 따라 제 때에 비가 와주어야 농사를 지을 수가 있다. 그런데 올 해 겨울은 비도 있지만 눈이 무척 많이 왔단다. 일정하지가 않았다. 그리고 때를 맞추어 비와 눈이 오지도 않았다. 

이처럼 유다 땅은 지중해성 기후여서 겨울이 우기이다. 이 우기에 제때 비가 내려와야만 이스라엘 땅에서 농사를 지어 한 해를 먹을 수 있다. 때를 따라 겨울비가 제때 내려야 한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셋째, 살아계셔서 섭리하시는 하나님. 
* 호 1~3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보라, 찢은 후에 낫게 하고, 치신 후에 싸매시고, 살리시고, 일으키신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살아계셔서 역동적으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한편, “이틀 후에, 셋째 날에 살리시고 일으키신다.”는 무슨 뜻일까? 네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둘과 셋을 계속하여 사용하므로 유창한 문장을 구사하는 서술 방식이지 특별한 의미가 없다(T. K. Cheyne). 또한 영어의 some과 같이 둘 셋 정도로 숫자가 많이 않음을 의미 하기도 한다. 즉 환란에 처한 이스라엘이 얼마 지나지 않아(2~3일) 회복될 것을 예언할  것을 뜻한다. 

둘째,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3 일 부활 사건을 예언한 것이다(Pusay, 초대교회 교부 중 일부)

셋째, 장차 메시야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을 의미한다(유대주의 학자들). 그들은 첫 날 구원은 출애굽, 둘째 날 구원은 바벨론 포로의 고토 귀환, 셋째 날 구원은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Diaspora Jewish)이 고국에 귀환하여 이루어질 구원을 의미한다. 

넷째, 위의 설명들은 받아드리기 힘들다. John Calvin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 
     “여기서의 이들과 삼일은 다니엘이 말한 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단 8:25)”과 같이  시간의 장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환란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길지 않은 “인내의 때” 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비록 첫 날이 아니고, 둘째 날이 아닐지라도, 제 삼일에는 반 드시 죽음에서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라는 위로의 약속이 아닐까? “ 

칼빈의 이 해석은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은 ‘우리 인생의 거울(mirror of our life)’이기
에 이 둘째 날, 셋째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을 예언한 말씀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다. 

 

결론

예수를 찾은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가 예수님께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네가 영생을 얻고자 하거든 계명을 지키라!” 그때 젊은이가 자신 있게 “계명들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마가는 “그는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갔다(막 10:17-22).” 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청년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다. 그가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는 자심감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청년이 부자일 수 있는 길은 오직 유산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은 청년 부자들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의 신앙은 물질에 근거를 둔 신앙이었던 것이다. 주님은 그의 신앙의 허구를 보셨다. 단지 물질의 많음 때문이었을까? 몇 대째 예수 믿는 집안, 어떤 직분을 오래 동안 가진 것, 교회 내의 직분과 지위가 높다면 높은 것 이 모든 조건이 다 허구일 수 있다. 청년에게 2% 모자라는 것은 돈이 많은! 바로 그가 가장 소중하게 의지하는 것이었다. 주께서는 그 물질을 다 포기하고 주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었다.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머리로도 오랜 경륜으로도 그리고 지식으로도 되지 않는다. 말씀에 순종할 때 얻어진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 순종할 때 신 지식은 바른 믿음이 되고 그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  
* 요일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 로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칼빈 선생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 때” 진정한 구원의 지식은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다(강요 1,1,1). 오는 한 주간 말씀을 묵상하고 깨닫는 대로 무엇으로라도 실천해 보시기 바란다. 그 속에서 내 심령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실제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돌아와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길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시간 중요한 진리로 도전 받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안다고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타성과 습관적인 신앙에 불과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하나님을 알고 연약한 자신을 정확하게 일아 삶 속에서 겸손하게 순종하여 하나님을 맛보게 하시옵소서. 거룩하신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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