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_마약, 동성애, 총기사고, 무정부상태의 사회 뿌리

구약 특히 선지 서들을 볼 때 마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 이유는 항상 하나님께서 죄를 지적하고 경고하고 무서운 심판을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건강하고 돈을 많이 벌어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하고 편하고 복을 받고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저 하나님은 나의 이런 바람을 들어주는 정도로 해주시기만을 기대하며 믿어 드리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나의 이런 생각과는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처한 죽을 자리에서 예수를 믿게 하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고 신의 성품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시켜 교제하고 싶으시려는 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기 때문이다(벧후 1:3~7) 

호세아서에는 8편의 설교가 있다. 첫 번 설교(4:1~5:4)에선 하나님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의 무지에 대한 탄식과 경고, 둘째 설교(5:5~6:3)에선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과 경고를 다루었다. 이제 세 번째 설교(6:4~7:7)에선 인애가 없는 이스라엘에 대한 탄식과 경고를 다룬다. 

2012년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난사 희생자

 


1. 조급함과 잔인한 세상 

최근에 들어 미국의 환경이 어떠한가? 무섭지 않은가? 너무 총기 사고가 많이 발생한다.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 보다 총기에 죽는 사람이 더 많다는 소식도 들었다. Christian elementary school에 그 학교 출신이 자동소총으로 무차별 난사하고, 마당에 10살 남짓한 어린 아이가 놀던 농구공을 찾으러 자기 집에 들어왔다고 총을 쏘아 죽이고, 경찰의 경고를 듣지 않았다고 120발 이상을 쏴서 젊은이를 벌집 만들어 죽이기도 했다. 얼마나 무자비한 세상인가? 조절 남감의 조급증과 미래에 대한 초조함과 불안함, 그래서 서로에 대한 극도의 분노 조절이 되지 않아 벌어지는 잔인하고 잔악한 세상이 되었다. 너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조급하고 잔인하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여러 가지 원인과 배경을 설명할 수 있겠으나,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이 나라가 언제부터 이런 초조하고 조급하며 무관용과 무자비한 세상이 되었는가? 천주교도인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면서 종교다원주의를 허용하면서 부터다. 결과 미국 사회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의 가치관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극도의 개인주의, 상대주의, 물질만능주의,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영향으로 하나님 섬기는 문화가 변질되었다. 반목과 갈등, 차별과 분리로 극도의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다 반사로 벌어지는 총기사고, 마약, 동성애 등 온갖 횡행하여 관리 조절이 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악이 판을 치는 사회가 되었다. 이런 사회 풍조는 교회까지 미쳐서 돈의 권력이 판을 치고, 동성애와 마약이 흥행하고 있다. 온통  무질서, 무정부 상태의 사회와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흐름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마약 청정국 소릴 듣던 한국이 이젠 길거리에서 초등학생과 청소년까지 쉽게 마약을 접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얼마 강남 한 곳에 불법 음식점을 차리고 은밀하게 인터넷을 통하여 성매매를 알렸는데 단 2일 동안 3억 원  이상 매출을 올렸다는 소식도 들었다. 경악할 일이다. 지금 미국이나 고국이 온 세상이 음풍에 싸여 있고, 탈법과 무정부와 무지비한 세상이 되고 있다. 


2. 범죄 집단으로 전락한 이스라엘

이런 사회상은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북조 이스라엘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 호 6: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에브라임은 북조 이스라엘의 대표 부족이다. 그들에게 인애가 허울뿐이었다. 여기서 인애(헤쎄드, hessed)”의 뜻은 "선(goodness), 사랑(love), 하나님에 대한 충성(loyalty to God)"이다. 구약 학자 Keil은 “여기서 말하는 인애의 참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웃을 향하는 선한 마음(good-will) 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래서 어떤 성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devotion)으로 주께 헌신하는 삶을 의미한다고 말했다(James May, Cheyne).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이웃을 향한 인애는 조급함과 잔인함으로 외식과 위선으로 가득 차 허울뿐이었다. 호세아는 당시 북조 이스라엘의 사회상에 대하여 상세하게 진술한다.
* 호 6:8~10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첫째, 쿠데타가 끊임없는 악의 소굴 
길르앗은 르우벤과 갓 지파가 차지했던 곳인데, 실은 북조 이스라엘을 전체를 상징한다. 이곳은 악행 자들의 아지트였다. 그 속엔 각종 악한 행위들이 전혀 제재 받지 않고 무차별 벌여졌다. 마치 Mafia Town 같다. 

“길에서”란 단순히 ‘길거리(way, street)’의 의미가 아니라, 관습적이고 습관적인(behavior, custom, habit) 범죄를 저지르는 집단을 표현한 말이다. 이들은 잠복하다가 살인을 일삼는 강도떼거리들이다 이곳엔 싸움과 약탈, 음란과 살해로 피 발자국이 가득 찬 세상이었다. 

특히 “피 발자국”이란 제물의 피를 뜻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피 발자국은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 많이 산다는 의미다. 그들은 살해하여 그 피가 땅에 흥건한 상태 가 될 정도로 살해를 일삼는 자들의 소굴이 길르앗이란 말이다. 실제로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 북조 이스라엘의 정치 사회는 이러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왕하 15장의 기록을 보면, 길르앗이란 당시 라못이란 고을이었다. 이곳에서 여로보암 2 세 권력에 도전하여 피비린내 나는 정권 침탈 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 왕하 15:13~15 유다 왕 웃시야 제 삼십 구년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한 달 동안 다스리니라.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디르사에서부터 사마리아로 올라가서 야베스의 아들 살룸을 거기에서 쳐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살룸의 남은 사적과 그가 반역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 되니라. 그 때에 므나헴이 디르사에서 와서 딥사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사람과 그 사방을 쳤으니 이는 그들이 성문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그들이 그 곳을 치고 그 가운데에 아이 밴 부녀를 갈랐더라.

여로보함의 아들 스가랴가 부친을 살해하고 왕이 되어 6 개월 통치하고(왕하 15:8), 살룸이 스가랴를 죽이고 왕이 된 후 1 달 후에 그 역시 므나힘에게 죽고(왕하 15:14), 므나헴은 10년통치 후에 죽고 그 아들 브가히야가 왕이 되자 2 년 만에 베가가 길르앗 자객 50명을 동원하며 임신한 부녀의 배를 가를 정도로 잔인하게 정권을 침탈했다(왕하 15:25). 한마디로 길르앗은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찬 고을이었다. 한마디로 길르앗은 악의 소굴이었던 것이다. 호세아는 이런 잔인하고 포악스러운 나라가 북조 이스라엘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둘째, 간교하고 타락한 종교인
한편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종교인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한 술 더 떠서 어처구니없는 집단이 되어 버렸다. 호세아는 이 당시 종교인들의 행위에 대하여 이렇게 지적했다. 
* 호 6:9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무슨 말씀인가? 당시 제사장들은 세겜 길에서 사악한 일을 거리낌 없이 행했다. 여기서 말하는 “기다림”이란 표현은 고의적으로 계획을 세워 살인을 했다는 것이다. 최근, 천주교의 사제들이 교인들과 젊은 청소년에게 음란한 일을 오랫동안 저질러 체포되는 일이 발생한 것과 같다. 한국에선 “내가 신이다”란 Netflex 영화까지 나와 사이비 종교의 타락상을 여지없이 보여주며 사회적으로 지탄이 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이 당시 북조 이스라엘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세겜 길”은 어떤 의미일까? 세겜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유명한 곳이다. 여호수아의 요단강 건넌 후 첫 정착지이며(수 24:1~2), 도피성이 있던 곳(수 20:7~8), 레위 제사장 촌이었다(수 21:21). 그런데 이런 거룩한 곳이 이제 강도떼의 소굴이 된 것이다. 즉 도피성이 강도의 소굴(kedode)이 되고 말았다. 

의도적으로 제사장들이 비겁하게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자들을 덮쳐 금품을 빼앗고 살해하는 등 도적떼들로 전락한 것이다. 사회 지도자급이 타락하여 깡패 집단이 되고 조직적으로 부패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강력하게 경고하셨다. 
* 호 6: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가증한 이들이 횡행하였고 그것은 음풍에 사로잡힌 추악한 나라가 되어 모든 국민이 더러운 백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보고 알고 계셨다. 그들은 한마디로 상식과 양심 불량, 도덕과 윤리에 둔감한 잔악하고 부패한 무정부 사회가 되고 만 것이다. 온 국민이 권력과 돈의 힘을 의지하고 하고 싶은 대로 집단적 권력을 탐하고 쾌락을 일삼는 부패한 사회와 나라가 된 것이다. 오늘날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3. 하나님의 요구와 경고

이러한 상황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셨나? 
* 호 6:5~7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첫째, 공의로운 심판을 경고하심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공의롭게 죄를 지적하여 그들을 치시고 말로 죽이시겠다고 하셨다. 이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강력한 심판 경고이다.  

“치고”란 “자르다(hezeb, cut down)"는 뜻으로 도끼로 굳은 나무를 쳐서 잘게 잘라(넘어트렸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전하는 말의 능력으로 그들을 잘라 파멸했다는 것이다cut you in pieces with my prophets) . 성경엔 선지자를 통하여 전하시는 말씀의 강력한 능력에 대하여 많이 언급한다.  

뿐 만 아니라, 이 하나님의 심판은 빛처럼 신속하게 이루어 질 것이라(my punishment flashed like light)라고 강조하신다. 이사야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한 심판을 이렇게 설명했다. 
* 사 11:3~5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이 말씀은 이새의 줄기와 뿌리에서 나올 한 싹, 한 가지 즉 장차 임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사역을 예언한 것이다. 말씀으로 오신 예수께서 강력한 천국 복음을 전하셔서 그 말씀의 힘과 능력으로 악한 사탄의 궤계를 다 물리치시고 사망 권세를 타파하고 승리하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이미 하나님은 예수의 입을 통하여 전파하는 말씀을 날카로운 칼과 같이 만드셔서 온 세상을 치며 악인을 죽이실 것을 예언하셨다(사 49:2).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이 받은 말씀은 파괴의 능력(렘 1:10)과 강력한 화력으로 모든 것을 불사르는 불이고 경고했다(렘 5:12) 
* 렘 5:14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이 말을 하였은즉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을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을 나무가 되게 하여 불사르리라.

그런데 하나님의 이 무서운 심판 경고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과정의 일환이다. 이 점을 강조하면서 종교개혁자 루터(M. Luther)는 "굳은 나무를 잘라 조각을 내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깎아 만드신다.“라고 설명했다. 

말씀의 강력한 파워(Power)를 믿는가? 타락한 마음과 사회 그리고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임을 믿는가? 호세아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가능하다고 강조했다(호 6:1~3). 말씀만이 치유하여 새롭게 하실 수 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요 능력이기 때문이다(시 19:7~8).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을 들어보자
*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바울은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는(딤후 5:16~17)능력이라고 했다 

둘째, 아담의 언약의 파기를 지적하심.    
이들의 행위는 마치 아담이 저지른 행위 즉 언약 파기 행위와 같다고 지적한다. 타락 전 아담의 상태(prelapsarian)는 “죄를 지을 수도,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상태”(posse peccare et posse non peccare, to sin or not sin) 였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다(창 3:1~6). 그는 하나님께 신의와 충성(sincerity and loyalty)도 없었고, 하와에 대한 배려와 사랑도 없었다. 그는 간교하고 비겁했다.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돌렸고 변명과 회피로 일관하였다. 그는 아내를 하나님이 주셨다고 불평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도전이었다.
* 창 3:11~12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북조 이스라엘은 모든 책임을 회피와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들은 쾌락에 빠져 방종과 반역의 길로 갔다. 놀랍게도 이러한 풍조는 남조 유다까지 미쳐 하나님은 남조 유다에 대한 심판도 잊지 않고 경고하셨다. 
* 호 6:11 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넷째,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인애
사람은 형식적으로 종교 생활 증 제사와 예배만 드리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정욕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형식적인 제사(예배)보다 화해와 용서 그리고 인애를 실천하는 생활 예배(제사)이다. 

주께서 이 원리를 산상보훈에서 이미 가르쳐 주셨다. 
* 마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결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악한 세상, 온갖 죄악이 횡행하는 세상 꼴 보기 싫고 만나기 싫은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 차 있고, 사회적으로 국제 정치적으로 어수선 하고 복잡하여 생각조치 하기 싫은 이 세상에 과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주님은 원수까지 사랑하시라고 하시는 데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힘써 알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 마 5:39~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께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기가 참으로 어렵다. 참으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 같다. 어떻게 배려와 사랑 그리고 헌신까지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도덕과 윤리를 어디까지 지킬 수 있겠는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온 세상이 죄 가운데 돌아가고 있는 데, 나만 말씀대로 살면 바보가 되고 어리석은 자로 취급받을 것 같아 순간순간 내 생각대로, 습관에 따라 이익을 쫓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과연 어떻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인애를 실행에 옮길 수 있을 것인가? 

예수님은 자기에게 와서 배우라고 하신다. 이렇게 우리를 초청해 주셨다. 
*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를 닮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자기가 예수를 본받은 것처럼 자기를 본받으라며 사랑을 노래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서있는 그 자리에서 일상에 꼭 해야만 하는 것을 신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곧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 고전 13:3~7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온 세상이 죄로 가득 차 불안과 초조와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게 되고 믿음의 세계가 강력한 세속화의 물결에 무참하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말씀의 회복을 주옵소서. 말씀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께로 가게 하옵소서. 예수 안에서 신의 성품을 회복시키셔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거룩하신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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