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서에는 8편의 설교가 담겨있다. 지난 시간에 이어 5 번째 설교를 살펴본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는가? 풋풋한 청순함과 신비스러운 매력에 빠져 서로 만나면 좋고 헤어지기 싫어서 연애하며 결혼까지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아직도 그때의 느낌과 감정으로 여전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믿음직한가? 여전히 그런 감정을 유지한다면 참으로 행복한 부부일 것이다. 


1. 첫 만남의 추억과 기대 그리고 실망


* 호 9:10~11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처음 만난 때를 추억하셨다. 하나님에게 그들은 마치 광야에서 만날 수 없는 포도 열매를 만난 것과 같았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무척 좋아하셨고 기뻐하셨다. 또한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을 만나셨을 때 마치 첫 무화과 열매와 같이 여기셨다. 하나님은 풋풋한 청순함과 아름다움을 좋아 하셨고 이스라엘을 깊이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사랑의 교제를 하셨다.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매우 귀히 여기시고 기뻐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저버렸다. 마치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처녀가 뒤로 호박씨 까듯, 이스라엘은 광야에 있을 때부터 화려한 이방 우상 문화에를 동경했고, 그 문화를 접하게 되자 쉽게 우상을 섬기는 일에 빠졌다. 그들은 12 정탐꾼 사건으로 이제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배척했다. 결과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루를 일 년으로 계산하여 광야 40년을 방황하게 하셨다. 

바알브올 사건은 민수기 25장에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을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가나안 동쪽 모압 광야에 숙영하고 있을 때다. 이스라엘 백성은 미디안 족속이 섬기는 바알브올 축제에 참여하여 모압 여인과 음행에 빠졌다. 그들은 미디안 백성이 바알브올 우상의 제단을 섬기던 미디안 박수와 무당과 음행했다. 하나님은 가차 없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염병으로 2만 4천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때 음란의 현장을 목격한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는 분에 못 이겨 율법이 금하는 진중 살해임에도 불구하고 음행 현장을 급습하여 남녀를 장막에서 창으로 살해했다. 그러자 염병이 그쳤다. 진중에서 살해한 행위가 문제가 되자 하나님은 거룩함을 드러낸 비느하스의 편을 들어 그에게 평화의 언약을 주시며 그와 그의 후손이 계속하여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것을 보장하셨다(민 25:1~18). 

하나님은 현재 북조 이스라엘의 배교와 타락은 과거 바알브올을 섬긴 우상 숭배의 답습한 때문이라고 진단하시고 비느하스와 같은 철저한 회개와 단죄가 필요함을 지적하셨다. 깊이 사랑하신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배교하자 여호와 하나님은 깊은 실망으로 단호하게 처리하실 것을 호세아를 통하여 통보하신 것이다. 


2. 저주와 심판


이스라엘의 음란죄는 그들에게 주어졌던 “영광이 새 같이 떠나가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 호 9:11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에브라임의 영광'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그런데 우상 숭배로 하나님을 떠난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은 취소되었다. 이는 마치 이가봇 상황이 된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엘리 제사장의 아들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들을 낳고 죽으면서 아들에게 붙여준 이름이 이가봇이다. 
* 삼상 4:19~21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에브라임이 누구인가? 그는 야곱의 손자이다.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 중에 에브라임이다. 야곱은 애급에서 유언을 하면서 요셉을 축복했다. 그때 야곱은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창 49:25).” 라고 축복했었다. 그 결과 에브라임은 이스라엘 12 지파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부족이 되었고 북조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가 되었다. 이제 호세아 선지자는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야곱이 내린 복은 취소되어 그들의 태가 마르고 젖이 말라 더 이상 후손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저주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우상 숭배의 죄에 대하여 이제까지 허락하셨던 야곱의 축복을 거두시고 이방에서 유리방황하는 심판을 하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을 떠나 음란한 우상을 섬긴 까닭이다. 그들은 복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이키지도 않았고 그 말씀을 신뢰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기대했던 물질적인 풍요와 번영은 사실 이제까지 그들에게 주셨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지난 광야 40년 생활 속에서 철저하게 경험했으면서도 눈앞에 벌어진 매력적인 이교문화에 빠져 포기했고 또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에 대하여 호세아 선지자는 강력하게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 
* 호 9:12 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에게서 번영과 다산을 바랬다. 그들은 이제까지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공급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엉뚱한 곳에서 얻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면 어떤 것도 얻지 못하고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에도 말이다. 전했던 것이다. 

사무엘의 모친 한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결혼 후 자녀가 없었다. 남편이 극진히 사랑해도 그녀는 항상 우울했다. 하나님께서 태를 열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첩인 브닌나가 아들을 낳고 본부인을 한껏 위세를 떨며 그녀를 조롱하며 핍박했다. 그녀는 실로 성전에 나가 하나님께 간절히 서원 기도했다. “아들을 주시면 평생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그녀는 간절히 기도했다. 이 모습을 본 당시 엘리제사장은 이 여인의 간절함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는 영안이 어두운 제사장이었다. 한나가 믿고 의지하며 섬긴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녀는 철저하게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기도 후 한나는 하나님을 확신헸다.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사무엘을 허락하셨다. 사무엘을 얻는 한나는 서원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받쳤다. 그 당시 한나의 기도를 들어보자.
* 삼상 2:6~8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 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 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상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순간순간 세상의 욕망에 빠진 적이 얼마나 많은가! 온전히 하나님만을 믿겠다고 한 신앙을 세상의 유혹에 빠져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되어버린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찮은 것에 유혹을 받아 기도할 때 마다 다짐한 결심과 신앙을 쉽게 포기하며 정욕과 욕망 그리고 욕심에 굴복하고 타협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북조 이스라엘의 범죄가 별것 아니다. 세상적인 쾌락과 물질적인 번영과 부요함을 추구하여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하며 적당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했을 뿐이다. 이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언약 관계애 있던 이스라엘에게는 결정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호세아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했다.  
* 호 9:16~17 에브라임은 매를 맞아 그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이스라엘! 어떻게 되었나? 철저하게 망했다. 그들은 온 세상에 흩어져 방랑하는 가련한 민족이 되어버렸다. 이 모든 것이 호세아가 지적하고 메시지 대로다. 


3. 길갈과 실로가 문제 


* 호 9:15 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에서 그들을 미워하였노라 그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의 지도자들은 다 반역한 자니라.

하나님은 타락하여 망하게 된 이스라엘의 결정적인 원인이 길갈이라고 지적하셨다. 길갈이 어떤 곳인가? 길갈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널 때 지파 수대로 큰 돌을 하나씩 갖고 와서 기념탑을 쌓은 곳이 길갈이다(수 4장). 길갈의 뜻은 "애급의 수치를 굴려 버렸다(rolling over her shame in Egypt)"이다. 애급에서 430년을 의 종살이 한 수치, 광야 40년 동안 지은 죄의 수치를 버려 완전히 정상으로 되돌아간 것을 선언한 곳이 길갈이다. 또한 길갈은 여호수아가 민족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할례를 시행한 곳이고(수 5:2~7), 그가 임시 수도로 정하고 이스라엘을 통치한 곳이 길갈이었다. 여호수아는 이곳에서 가나안 다섯 부족을 무찌르고 승리한 곳이었다(수 10:7, 15, 43). 길갈은 이렇게 이스라엘의 정체성의 장소이며 정결과 승리의 장소였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곳이었다. 

또한 실로는 어떤 곳인가? 가나안 중요 정복이 끝난 후에(주전 1400년 경) 여호수아는 길갈에 있던 하나님의 장막 성전을 실로로 옮겨 이스라엘의 수도가 된 곳이다. 호세아는 이런 기념비 적인 곳 하나님의 장막 성전이 있던 실로 역시 우상숭배의 중심이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저주를 선언하였다. 길갈, 실로 그리고 벧엘(벧아웬)은 하나님께서 거하신 장소이며 거룩의 상징이다. 그곳은 거룩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장소들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거쳐 요단강을 건너서 애급과 죄의 수치를 벗긴 것을 선언한 곳이며 구원의 기념비를 세웠던 곳이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확인하면서 시행한 할례장소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거룩한 곳에 이방 신상이 세우고 이방 산당을 세워 우상을 섬기며 온갖 추악한 욕망을 발산하며 음란한 행위를 저질렀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떠나셨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뻐하시며 극진히 사랑하신 이스라엘! 이 세상 어느 민족에게도 주시지 않았던 복을 주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셨던 이스라엘에게서 더는 함께 하지 않고 떠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얼마나 실망하셨으면 이렇게 까지 분노하시고 결벌을 선언하셨을까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다.  


결론


이스라엘이 완전히 하나님을 저 버렸는가?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적당한 선에서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겼던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듣기 바란다. 
*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적당하게 신앙생활하면서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며 양다리 걸치기 신앙을 하나님께서 모르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다 보고 계시며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눈동자 같이 두루 살피시며 섭리하시고 통치하신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은 스스로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되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깊이 알아야 한다. 
* 사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얼마나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기에 이 사실을 인지하고 한 순간이라도, 하루라도 빨리 주께 나오길 바란다. 이스라엘의 죄는 무엇인가? 그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을 섬기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얻으며 즐기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 외면하고 부인하는 행위다. 일부러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는 습관적으로 신앙을 유지하는 정도에 만족하는 반쪽짜리 신앙인 것이다 .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라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지 기억할 것을 강조했다. 

모든 성도는 이 하나님의 사랑 사건 즉 십자가 사건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속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초심으로 돌아가 마음을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재차 강조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를 힘써 주와 화합할 것을 강력하게 전했다.
* 호 6:1~3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성도는 바로 이 진리를 마음에 담고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분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이 말씀 깊이 마음에 담기를 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깊이 알고 살펴 의식적으로 주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유혹과 시험이 많은 삶 속에서 더욱 자신을 살펴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여 구원을 누리게 하시옵고 온전케 하옵소서. 거룩하신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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