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LA에서 유치원 보모가 아이들 목에 목줄을 매고 끌고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이의 목에 줄을 매어 개를 끌 듯 끌고 가다니!! 고국에서는 본 적이 없기에 충격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똑 같은 일을 디즈니랜드에서도 목격했다. 아무래도 보기가 편하지 않았다.

11장과 12장은 선지자 호세아가 전하는 7번째 설교다. 북조 이스라엘의 배교와 패역함에 대한 하나님의 실망과 안타까움 그리고 심판을 경고하는 말씀이 절절히 담겨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애증으로 가득 찬 하나님은 그러나 아주 포기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무조건 용서하여 품지도 않으셨다. 자식 버리는 부모 없듯 하나님은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다. 호세아를 통하여 끝까지 안고 가시려 한다는 것을 전달하셨다. 끈질긴 하나님의 치열한 사랑을 살펴본다.

 

1. 사랑의 동기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는 출애굽 사건으로 시작된다. 물론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바를 이행하는 차원에서 이루신 구속 역사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구원 동기를 설명한다.

* 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란 민족으로 형성되지 못할 때를 말한다. 족장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시대를 말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여 애굽에서 민족을 형성하기 까지 기다리셨다가 불러내셨다. 모세를 부르실 때 즉 야곱의 12 아들들이 애급에 내려간 지 430여년이 지났을 때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 부르시며 깊은 사랑으로 그들을 불러내셨던 것이다. (4:22~23). 출애굽 사건을 말한다.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이란 아들을 진정 사랑하셨음 나타내 보이셨다. 출애굽 사건이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다는 증표인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아들을 애급에서 불러낸 사건에 대한 신약에서의 설명이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이 사건을 헤롯의 살해 위협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헤롯이 죽은 후에 어린 예수를 출애급 시키셔서 나사렛에서 살도록 하셨다고 해석한 점이다. 마태는 이 사건을 호세아 예언 성취라고 풀고 있다.

* 2:14~15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하나님은 각종 이적과 기사로 황량한 광야에서 아사하지 않고 추위에 얼어 죽고거나 더위 먹어 쓰러지지 않도록 각별하게 보호하시며 인도하셨다. 10재앙, 구름 기둥,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등 놀라운 이적과 기사로 신생아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양육하시며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 타민족과 달리 유독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런 일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다름 아닌 그들을 행한 하나님의 사랑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유월절 사건을 통하여 그들의 수치와 죄를 사해 주셨고 이를 경험하여 고백하도록 홍해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다. 이 두 사건을 사도 바울은 유월절 어린양 예수의 십자가 희생 제물이 되심(5:2), 홍해 사건은 세례(고전 10:2; 벧전 3:21)로 풀어 설명한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출애굽 사건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을 예표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셔서 이들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시행된 구속 사건이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감격적으로 표현했다.

* 요일 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한 깊은 사랑으로 여전히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행사하신다. 지난날을 되돌아보시라. 지나온 인생 여정에 이적과 기사가 아닌 적이 있었는가? 반추하면 모든 것이 이적이요 가사의 연속으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갖 난관 속에 처해 있을 때도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여전히 보고 계셨고, 듣고 계셨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셨고 보호하시며 인도해 주셨다. 왜일까? 우리의 그 무슨 잘나고 잘 한 것이 있어서 일까? 아니다. 우리네 인생 여정 배경에는 하나님의 독점적인 사랑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본문 2절 말씀과 같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네 인생 여정 속에서 양육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전하면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 점을 설교했다.

* 11:3~4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출애굽의 하나님은 광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유아기 이스라엘을 다양한 훈련과 연단시키시며 성장시키셨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동물의 목에 매는 줄이 아니라, 사람의 줄 즉 사랑의 줄로 목을 매시고 인도하셨다. 걸음마를 가르치시고 품에 앉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셨다. 이스라엘에게 매여진 그 목줄은 결코 멍에의 줄이 아니고 타락한 아담에게 부여된 인생 멍에를 피하게 하고 벗겨 주시기 위한 사랑의 목줄이다. 그런 줄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은 굶지 않았고 목마르지 않았고 더위와 추위에도 살아남았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긍휼하심 덕분이었다.

 

사랑의 목줄로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모세는 출애굽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고 대하셨는 지를 설명했다.

* 32:11~13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모세와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왕정 국가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교훈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지난날 험난한 세월 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분과 저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단련시켜오셨다. 이제 훈련받은 자로써 어떤 수준과 능력을 드러내야 할 것인가? 깊이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2. 사랑의 배신

이스라엘은 어떠했는가?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양육된 이스라엘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 11: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출애굽, 광야 40, 가나안정착, 왕정 시대를 거치며, 이스라엘은 어떤 상황이 되어 있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리 떠났다. 하나님을 버리고 배교한 것이다. 도리어 그들은 여호와 대신에 부요와 번영의 신 바알, 다산의 신 아세라와 같은 이방 신을 섬겼다. 그들에게 제사하고 분향했다. 그런 행위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한 것이다. 배교와 방종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구원자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심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선지자가 전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거부하고 그들을 배척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장자라 아들이라 부르셨으나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서 이교문화를 흠모하고 동화되려고 했다.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 말씀 정책에서 다양한 외교 정책으로 정치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떠나는 계책을 세워 시행했다.

* 11:5~7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이스라엘의 계책이란 어떤 것일까? 이제까지 시행해 왔던 하나님 중심에서 떠나 세속적인 번영과 안전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호세아는 이것을 그들이 탐심을 가졌다고 표현한다(5:4). 그들은 화려한 우상을 섬기며 즐기는 쾌락 추구의 이교문화를 흠모했다. 그들의 자유분방한 방종 문화를 사모하고 탐욕적으로 그것을 추구했다. 그들은 이방 신을 섬기면서 한편으로는 나라의 안녕와 질서를 위하여 양다리 외교정책을 취했다. 그들은 앗시리아와 애굽 사이에서 조공을 바치고(왕하 15:19), 줄다리기식의 현란한 외교술을 발휘하며 국가의 안위와 부위를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에는 어느 나라에서도 보호받지 못하고 BC 722년에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었다

* 10:15 너희의 큰 악으로 말미암아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

사도 바울은 탐심을 우상 숭배라고 규정했고 C. S. Lewis탐심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라고 규정하고 탐심을 갖지 말 것을 명했다.

*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리도 지난 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보호와 인도하심으로 이제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자, 하나님을 등한히 하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며 세상을 추구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다루실 지를 짐작할 수 있는 말씀이다. 어떤 것이든지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가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여 진실과 정직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 것이다.

하나님 사랑을 배신한

자들의 결말

3. 사랑의 호소

이스라엘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돌아올 것을 기다리시다가 마침내 그들에게 안타깝게 호소하셨다. 자식을 포기 할 수 없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 11:8~9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네 번씩이나 어찌잊거나 버리거나 완전하게 진멸하겠느냐?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기억하라고 강력하게 설득하셨다. 이는 이스라엘의 회개와 복귀를 간절히 바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애달픈 호소다. 그들을 향한 긍휼이 불타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강렬한 긍휼로 이제까지 그들을 다루어 오신 것들이 그들을 행한 사랑의 시도였음을 강조하시면서 이스라엘을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도, 버리지도 않고, 또한 더는 진노를 퍼붓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지명으로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무서운 유황불 심판을 받아 멸망한 곳이다

* 29:23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에는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격분으로 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물을 것이요

하나님은 비록 이스라엘과 유다를 심판하시기는 하지만, 이들을 아드마와 스보임과 같이 완전하게 파멸하지는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자식을 때려죽이겠는가? 택한 백성 아들이라고 부르시며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결코 포기하거나 버리거나 저주하여 멸하지는 않으신다.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알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속 깊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철없는 자식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를 힘써 알자고 호소했던 것이다.

*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자식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자 너 그러려면 집을 나가!” 라고 화를 냈다. 그때 철없는 자식은 부모가 자기를 미워하는구나 생각하고 집을 나가 버렸다. 부모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그 자식이 언제 철이 들어 부모의 속 깊은 마음을 알고 돌아오겠는가?

하나님은 이런 부모의 심정과 같다. 믿음직한 성숙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하여 단련시키는데 자식은 부모의 그런 간절한 바람을 모르고 가출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이 그랬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리고 탐욕을 꿈꾸며 살았던 것이다. 이에 심은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의 자연 섭리에 따라 심한 고난이 예상되자 그들을 향한 긍휼과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다시는 혼을 내지 않을 테니 똑 돌아오라고 간곡하게 호소하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애끓는 사랑과 긍휼하심을 아는가?

자료를 찾아보다가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다.진노함으로 네가 임하지 아니하리라(9b)”나는 그 성에 들어가지 않으리라(I will not enter the city)"라로 번역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 진영에 쳐 들어가셔서 아드마, 스보임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유황불로 진멸 하신 것과 같이 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울부짖는 사자의 포호와 같지만, 이를 들은 자들은 새와 비둘기 같아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흩어져 살던 곳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이 있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집에 들어오셔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무서운 심판 속에서도 긍휼로 대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속내를 펼쳐 내 보이셨다.

* 11:10~11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그들은 애굽에서 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서쪽은 원문에서 바다로부터(from the sea)”이다. “서쪽에서 올 자는 지중해 연안 섬들에 흩어져 살던 지중해 디아스포라, “애굽에서 새 같은 자는 애굽 디아스포라, 그리고 앗수르의 비둘기는 앗시리아에 포로로 끌려가 살면서 여호와 신앙을 지키려 했던 앗시리아 디아스포라를 말한다. 이 말씀은 장차 이들의 귀환이 이루어 질 것 예언이다. 이들이 앞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무서운 심판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같은 메시지는 이사야 선지자에게서도 발견된다.

* 60:5~8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저 구름 같이, 비둘기들이 그 보금자리로 날아가는 것 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냐.

특히 하박국 선지자 선지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하나님의 심판 즉 택한 백성을 불신 이방인을 들어 자기 백성을 치시는 하나님의 속뜻을 깨닫고 그는 하나님께 간청했음을 본다.

*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선지자 호세아의 이 말씀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본 말씀이다. 온 세상에 흩어졌던 다이스포라들이 구원의 소식을 듣고 돌아올 때가 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호세아 선지자와 같이 이미 이사야 선지자 역시 전했다.

* 60:9~11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먼 곳에서 네 자손과 그들의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라. 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불쌍히 여겼은즉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들의 왕들이 너를 섬길 것이며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들의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

이 말씀은 장차 세계인들이 차별 없이 하나님께 나와 경배할 것을 예언이다. 그렇다. 지금이 그러하다.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고 있으며 이를 완성하실 때가 가까지 온 것이다.

 

결론

사실 우리 인간은 모두 본문이 말하는 것과 같이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11:12). 거짓과 속임수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화뇌동하며 살아간다. 바람에 물결이 이리저리 흩어지듯이 모두 정함이 없이 시류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간다. 호세아는 이런 모습을 물위의 거품 같다고 했다(10:7). 에브라임이 그랬고 이스라엘이 그랬고 유다 역시 정함이 없이 흔들렸다.

주의 말씀을 보자. 이 주의 초청을 받아 주께로 나아오라. 참된 평안과 안식을 얻게 된다.

*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렇게 사랑을 받았음에도 저희들은 여전히 갈팡질팡하여 정함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 귀한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속 깊은 생각과 뜻을 파악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신중하게 살피게 하시고 그 뜻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안에서 참된 평안과 위로 그리고 안식을 누리며 이 험난한 세상을 믿음으로 담대하게 헤쳐 나가게 하옵소서. 거룩하신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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