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태 소장, 일제에 적극 협력한 김길창 목사와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삶을 재조명

일제청산연구소(소장 양진우 박사)는 지난 25(주일) 초이화평교회(하남, 담임 양진우 목사)에서 C헤럴드와 불금시사 공동주관으로 제 1차 월례포럼을 가졌다. 이번 월례포럼은 김승태 소장(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두 갈래 길 순교와 부일협력란 제목의 특강을 맡았다.

포럼에 앞선 인사말에서 양진우 목사(일제청산연구소 소장)우리는 일제치하에서 독립 후 청산되지 못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다. 오늘 포럼을 위해서 사회로 수고할 오마이뉴스 역사 전문기자인 김종성 연구위원님께 감사드리며, 참석한 진보적 기자님들께도 감사를 드린다라고 전했다.

김종성 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의 사회로 진행 된 포럼에서 김승태 (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은 일제강점기 때 주기철 목사와 김길창 목사가 보인 생애를 대조하면서 한국교회는 이들의 삶을 재조명했다.

김승태 (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김승태 (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김 전 소장은 일제 강점이 길어지자 한국교회에서 노골적 친일행각에 앞장 선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중 <친일인명사전> 에서도 언급된 김길창 목사는 19389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으로서 각 노회 총대들을 이끌고 평양신사에 참배했다"라고 전했다. ”당시 신사참배는 하나님 대신 일왕과 그 조상신을 참배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으나, 교회가 적극적으로 신사참배에 나설 것을 강조했고 심지어 1938년에는 '신사참배 투어'를 위한 일본 여행까지 조직했다.“라고 말했다.

김승태 전 소장은 "김길창 목사는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주창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 경찰과 결탁하여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목사와 교인들을 밀고하고 탄압하기까지 했다라고 말했다. 해방 후 김길창은 일본인들의 적산을 맡아 교육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등 막대한 재산을 거둬들였다.”라고 전했다. “김길창은 이러한 재산과 사회적 영향력을 배경으로 교계에서도 수차의 경남노회장, 부산기독교연합회 회장, 한국기독연합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김승태 소장은 이에 대조적으로 주기철 목사의 삶은 매우 험난했다.”라고 전하면서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수차례 구속되고 가족들이 목사 관사에서 쫓겨나는 등 많은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주기철 목사는 끝내 믿음을 지키며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주기철 목사는 일제 경찰의 심한 고문에도 당당히 맞섰다. 한번은 매질하러 들어온 일제 경찰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며 "그때 당신은 이런 것들과 다른 죄들에 대해서 대답해야 할 것"이라고 의연하게 경고해 상대방이 고문을 중단하도록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결국 주기철 목사는 만 47세 된 그의 육체는 가혹행위를 버텨내지 못하다가 19444월 해방을 1년 앞두고 숨을 거뒀다” “안타까운 것은 해방 후 일제강점기에 부역한 목사들 중 상당수가 군정세력과 결탁해 부와 명예를 이은 반면, 주기철 목사와 같이 신앙인들은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했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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