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도_금산교회(기독교대한성결교회)

조경수목사. 금산교회(기성), 2023.7.28 주님의 부르심을 받다본푸른교회에서. 2023.6..1. 목.
조경수목사. 금산교회(기성), 2023.7.28 주님의 부르심을 받다본푸른교회에서. 2023.6..1. 목.

 


6월 초, 친구 조경수 목사가 늦은 저녁 시간에 교회에 왔다(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 대표).  금산교회 26년, 목회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록을 남겼다. 신문사를 운영하는 사람이라 늘 메모하는 것이 습관이다  기사로 올려 놓은 내용은 그 당시 노트북에 담았던 내용이다. 이것이 친구의 마지막 유고 메세지가 될 줄 미쳐 몰랐다. 


고인이 된 조경수 목사는  나와 고향(춘천)이 같다.   친구 목사의 소천 소식을 문자로 받았다. 동명이인이겠지 하고 전화를 했더니 딸이 받았다. 아버지 소천하셨니..예, 오늘 오전에요.이렇게 소박하고 가난한 목사가 주님 앞으로 갔다.

금산교회 조경수 목사(60)는 신학교를 졸업한 그 해, 199732, 젊은 전도사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영종도 어촌 마을에서 첫 담임 목회를 시작했다. 교회는 너무 열악하여 목회자 사례비를 줄 만한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26,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지켜냈다. 영종도 인천공항이 생기면서 눈부신 발전을 했는데, 금산교회가 자리 잡은 작은 어촌 마을은 열악한 환경이었다.

금년 6월 조목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유선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참 힘들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교회의 어려운 형편을 잠시 듣고, 시간 내서 영종도 조만간 갈게. 그리고 짧은 인사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3일 후 저녁 8시쯤 친구는 내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 왔다. 친구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연실색했다. 정상적인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금방 쓰러져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몸이 안 좋은데 병원에 입원하지 이 먼 거리를 왜왔느냐고 했다. 친구는 죽기 전에 친구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왔다는 것이다.

친구는 26년간 금산교회에서 살아왔던 이야기와 종교 부지를 받고 건축하고 은행이자로 고생하고 있는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조목사(1)_열악한 교회, 사명의 장이기에 떠날 수 없었다.

(1)담담하게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이야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사례비 한 번도 받아 본적이 없다. 한번이라도 사례비를 받아서 사모에게 영화나 외식이라도 한번이라도 했으면 소원이 없다. 공항에서 일용직하며 교회운영과 생활비를 마련했고, 코로나 이후에는 공항에 일거리가 없어, 부천 인력회사에 나가서 잡부일을 했다.

(2)5남매 아이들 분유 값도 제대로 감당하기 어려웠던 개척생활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마음이 절여왔다. 영종도에 가서 3째를 낳았다. 교회 근처 마을에는 8년째 아기가 없었다. 영종도 어르신들이 아이들을 보면서 매우 기뻐했고,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던 토속신앙인들이 아이울음 소리라도 보고 싶어서 교회 마당에 오셨다. 다섯째 막둥이(2005년생)는 고등학교 3학년이다.

(3)적당히 있다가 도심으로 나오거나 다른 목회지를 찾지 왜 이렇게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냐? 라고 묻자.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외면할 수 없었다. 사명이기에 열악한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고 한다.


조 목사(2)_섬김 사역_20여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차량 봉사

(1)조 목사는 동네 어르신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섬김 사역을 실천했다. 금산교회는 영종도 외각이라, 대중교통은 하루 4번 정도만 운행되었던 아주 낙후된 농촌이었다. 무엇보다 교통이 불편한 상황이었기에,  승합차를 지역교회 어르신들의 공동 차량으로 사용하였고,  어르신들이 부르시면 10분 내에 달려가서 동네 분들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다.

(2)성도들이 교회에 헌금이 없는데 자동차 기름 값을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라고 물을 때 마다, 교회는 선교, 봉사, 구제하라고 세워진 것입니다. 조 목사는 "제가 개인적으로 하겠습니다." 20여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봉사했다.

금산교회
금산교회

 


조목사(3)_종교부지를 받기까지의 고단한 세월

하나님, 교회만 세워질 수 있다면 어떤 고난도 참아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전부였다.

(1)금산교회는 무허가 건물(포도창고)이고, 국유지이다. 금산교회는 종교 부지를 받을만한 조건이 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기도로 종교 부지를 불하받았다.

(2)처음에는 종교 부지 대상 교회가 아니기에 도시개발공사에서 종교 부지를 주지 않았다. 교회 철거를 위해, 토지 정비 업체는 교회 진입을 할 수 없도록 교회주변 사방 4미터 높이를 절벽처럼 깍았다. 교회 진입 도로가 사라졌다. 전기와 물이 끊어진 상태에서 46개월을 버텼다. 사모와 성도들이 물과 음식을 도르래로 올려주는 것으로 생활했다. 목사가 교회를 출타하면 교회를 헐려고 교회 밑에는 중장비를 세워놓고 있었다.

포크레인 바가지에 두 사람이 타고, 교회 높이까지 세워놓고 술을 마시고, 소주병을 교회 마당에 던졌다. 너 종교 부지를 받아서 얼마에 팔아 넘기려고 하느냐. 목사를 분노하게 해서 마당을 빠져나오면 그 순간 교회를 철거하려는 계획이었다.

하나님이 순간순간 지혜를 주셨다. 저 친구들이 나에게 모욕을 주는 것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지만, 주님의 이름과 명예를 훼손할 때마다 마음이 많이 쓰렸다. 나는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마음뿐이었기에 나는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말을 들어도 자리를 지킬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4미터 높이에 있는 쓰러져가는 교회를 홀로 지키는 것뿐이었다. 나는 개인의 안락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그 자리를 지키며, 하루하루 버텼다. 그 세월이 46개월이었다.

어느날 토지 처장을 만났다, 목사님이 없을 때, 교회를 부수지 않겠다. 토지처장의 말이 신실하게 다가왔다. 목사님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저는 그 말을 믿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토지처장이 교회를 방문했다. 토지처장이 4미터를 뽀쪽하게 깍아내린 교회를 밭 줄을 잡고 올라왔다. 저는 도시개발 공사를 20여 년 동안 해왔다. 목사님 보면 너무 안타깝다. 종교 부지를 받은 10교회 가운데서 10교회가 돈을 받고 교회 부지를 팔았다. 지금까지 교회를 세운 목회자가 없었다. 종교 부지를 받기 위해 건강을 잃어버린 경우도 보았다. 교회성도도 뿔뿔이 흩어지고, 결국 목사님도 보상을 받고 떠났다. 교회를 세우는 경우를 본적이 없다. 목사님처럼 종교 부지를 받기 위해 46개월 동안 버틴 사람도 없었다. 조건이 갖추어졌다면 당연히 종교 부지를 주는데, 국유지, 무허가 건물에 종교용지를 준적이 없다. 촛불 켜고 46개월 동안 버틴 사람도 없고, 사모님이 하루에 한번 물과 식량을 갖다 주며, 사모님과 애들은 컨테이너에 생활하면서 견뎌낸 사람도 없었다. 나는 목사님을 살리고 싶다. 미단 신도시 내에 합법적인 분양권을 드릴 수 있는지 연구해보겠다.” 조 목사는 토지 처장의 말을 듣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순간 쓰러졌다고 한다. "곧 깨어나서 감사합니다. 저는 150, 200평이 필요한 곳이 아니라 단 한 평이라도 돗자리를 깔고 무릎 끊고 예배할 수 있는 처소가 필요"합니다.

(3)토지 처장은 보일러도 없고, 실내 공기도 너무 차갑다. 다시 바깥에 나가서 햇빛을 쬐자. 너무도 춥다. 토지처장은 목사님은 진실해 보인다. 나도 안수집사이다. 어떤 상황에서 지금까지 버텨왔는지 직접 보고 싶어서 왔다. 봄가을도 이렇게 추운데, 전기도 끊어진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버텨왔는지 직접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한다. 기름 난방기구는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러왔다. 와보니 방석 열장과 군인 담요 3장으로 5년을 버틴 모습을 보고, 건강 잃지 말라, 꼭 이겨내라. 5, 10년 후 지켜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조 목사는 바로 그 다음날 교회를 비워주었다. 200711월에 만나고 나서, 미단 신도시 인구 급증으로 인해 만 8년 만에 종교 부지가 하나 늘어나면서 계약했다(2015523).

(4)금산교회는 경상비 5,6백만원 정도이다. 종교부지를 불하받았다. 중교부지는 평당 37만원 총 765백원이다. 계약금, 중도금을 6개월 단위로 5번을 지불해야하고, 잔금도 내야 한다. 열악한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였다. 그리고 건축비용 75천이 들어갔다. 교회 건축에 155천의 경비가 들었다. 934백만원은 은행부채, 마이너스 신용대출 5천으로 유지하고 있다. 이제 신용대출이 거의 바닥이 나고 있는 상태라 지금 심리적 영적 어려움에 빠져 있다.

(5)2022년 12월부터 스트레스 급성 신장염으로 인해 3달 정도 식사를 전혀 못하고 있다. 밥을 전혀 못 먹었다. 이자가 3백만원 정도까지는 일용직을 하며 버텨왔다. 산업재해로 인해 잔업이 중단되었고, 2022년 년 말부터 이자가 폭등하면서 감당할 범위를 벗어났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과중하여 급성 신장염이 생겼다고 한다.

(6)교회 주변은 이제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 금년 9월에 1800세대가 입주하고 교회 건너편에는 빌라 465세대가 건축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버틸 총알이 전혀 없다.

(7)금산교회는 아이들과 사모의 생명을 짜서 세워진 교회였다. 1층 벽돌과 벽돌 사이 메지를 메꾸는 일과 나무문들을 사모님과 아이들이 사포질을 하며 교회를 건축했다.

(8)1년만 더 견디면 교회를 세울 수 있는데, 27년 금산교회에서 목사로 살아왔지만 제대로 목회를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이제 할 수 있는 여건이 생겼는데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 두세 교단이 교회를 구입하겠다고 타진해왔다. 내 신앙관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사고파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사람들이 나를 바보목사라고 한다. 내 목회가 편하고자 타 교단으로 넘긴다. 내 신앙이나 목회자 양심상 이것도 납득이 안 된다. 내 생각에는 내 능력이 안 되면 내가 속한 교단에 내놓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교단(기성)에서는 인수할 교회가 아직 없다. 이제 마이너스 통장에 있는 잔고도 두 달이면 사라진다. 더 이상 이자를 낼 능력이 없다. 조만간 결단을 해야 한다.


■마지막 길을 위로하신 하나님

친구의 목회일지를 들으며 함께 울었다.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아주 힘들어 하며 내뱉었다. 그의 언어에는 원망이나 불평이 없었다.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궁지로 몰아넣었습니까? 하나님은 계십니까? 원망이나 후회가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다 버리겠다는 십자가의 정신으로 채워져 있었다.

죽기전에 친구 얼굴이라도 한 번 봐야겠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영종도에서 구리까지 달려왔다고 한다. 우리는 함께 울며 기도했다. 너무도 안쓰러웠다. 21세기 4만불 시대에 살고 있다. 너무 많이 먹어서 성인병에 걸려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고, 비만으로 인해 건강이 화두가 된 세상 한복판에 살고 있다. 목회자의 삶의 자리가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수중에 있는 돈이 50만원 밖에 없었다. 그리고 본죽 티켓과 밥을 전혀 먹지 못하는 분들의 대용물로 먹는 메디웰 한 박스를 주었다. 당장 내일 병원에 입원해라.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교회를 위해서, 사모님과 자녀를 위해서 해야 할 첫 번째 일이다. 그리고 눈물로 기도하며 늦은 밤 헤어졌다. 혹시나 중간에 운전하고 가다가 사고가 날까봐 걱정하며 보냈다.

그리고 1주일이 지나서 성도가 2백만원을 선교비로 주셔서 친구에게 전해주었다. 작지만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장례식장에 다녀오고 나서 이런 마음이 들었다. 친구의 마지막 길을 준비하신 하나님께서 한 달여간 이 땅에서의 위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 너무도 고마워하던 친구의 얼굴이 잊혀 지지 않는다. 고맙다. 큰 힘이 된다. 마음에 위로가 된다는 말. 그것이 얼마나 된다고... 하나님이 친구에게 준 아주 작은 위로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친구는 낡은 선풍기를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내 기억에는 이미 사라진 이야기이다. 해외 신학교 강의를 갈 때마다 금산교회에 가끔 차를 주차했다. 한 여름에 가보니 양철지붕에 선풍기도 없이 살고 있었다. 열기로 인해 실내는 살인적인 공기를 내뿜었다. 에어컨을 사줄게 했더니, 친구는 전기세 감당 안 된다고 해서 선풍기를 보내주었다. 그 선풍기가 뭐라고 버리지도 않고 오랜시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친구가 사준 것이라고...

지난 주 전화를 했다. 건강은 어떠냐. 건강이 좋아지고 있다고 한다. 처음으로 밥을 먹어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교회 문제를 결정하기 전, 의논하겠다고 하고 마무리했다. 그리고 갑자기 문자 한통이 왔다. 친구가 하나님의 품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아 이럴 수가 있는가?

그리고 그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목회란 무엇인가? 목사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혹시나 자녀들이 아버지의 목회 인생을 보고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너무도 고된 인생이었다.

조목사처럼 그렇게 살 목회자도 드물다. 목사는 바보처럼 살아야 하는가? 그 질문에 목사는 바보처럼 살아야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맞다고 본다. 목사는 삶의 자리를 말씀과 믿음으로 지켜내야 할 영적 최후의 저지선이다.

조 목사를 버티게 했던 힘은 오직 하나였다. '교회만 세워질 수 있다면 어떤 고난도 참아낼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신앙이고 신학이고 삶이었다. 오직 그 한가지로 고단한 인생길을 버텨왔다.

잘 가라. 친구야. 주님의 품에서 안식하라. 너의 죽음이 많은 열매로 다시 세상에 빛을 환하게 비출 것이다. 어린 자녀들이 아버지의 황당한 죽음앞에, 아버지가 살아왔던 삶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이 떠지고, 주님과 관계가 더 깊어지면 목사의 삶은 움켜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것을 내려놓는 삶이란 것을 이해할 때가 있을 것이다.

친구는 가난한 시골어촌 목회자로 삶을 마감했다. 백세 시대를 준비하는 세상 한 복판에 60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에는 너무 짧았다. 그러나 거꾸로 주의 나라에서 영원한 부요함을 누릴 것이다.


배우자 : 사모 김희정 

자녀 : 조한나 조한빈 조한선 조한주 조한결(2남 3녀)

사위 : 박현석목사

외손자 :  박필립 박필승 박필찬

 

금산교회, 또는 조경수목사를 위해  선교비를 드리고 싶은 분들은 아래 계좌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김희정_ 농협_216036-52-10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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