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 대한 고사성어와 이야기가 많이 있다. 오성(이항복, 1556~1618)과 한음(이덕형, 1561~1613)의 관계는 조선시대의 가장 친밀한 친구 관계로 유명하다. 구약성경에서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우리의 모범이 되는 친구관계다. 
주님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 13)’고 말씀하셨다. 모세에 대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출 33:11)’라고 말씀한다. 친구는 친밀함을 나타내는 대표적 관계다. 

   친구의 관계에 대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자성어는 죽마고우(竹馬故友)다. 이 말은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란 친한 벗’을 이르는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했던 친구, 즉 오랫동안 관계를 맺고 있는 친구다. 흉허물을 아는 관계, 숨길 것이 없는 친구를 말한다. 
이 외에도 친구에 대한 사자성어가 많다. 관포지교(管鮑之交)는 우정이 아주 돈독한 관계를, 수어지교(水魚之交)는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관계라는 뜻으로 아주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사이를 비유적하는 말이다. 금란지계(金蘭之契)는 친구 사이의 매우 두터운 정을, 단금지교(斷琴之交)는 매우 친밀한 우정이나 교제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말들을 뛰어넘는 말이 있다. 장자가 말했던 막역지우(莫逆之友)다. 한자어는 이렇다. 莫:없을 막, 逆:거스릴 역, 之:어조사 지, 友:벗 우로, ‘거리낌 없이 편하고 가까운 사이’를 뜻한다. 원래는 천지의 참된 도를 깨달아 사물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 간의 교류를 뜻하였으나, 지금은 서로 허물없는 친구, 서로 뜻이 잘 맞는 아주 친밀한 벗을 의미한다. 
죽마지우는 어렸을 때부터 맺은 관계를 말한다면, 막역지우는 그것을 뛰어넘어 사상과 삶과 이해관계를 초월한 절대관계의 친구를 이르는 말이다. 한 평생 살면서 막역지우가 세 명은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성도는 가정과 교회와 사회생활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기에 가족 중에서, 교회 내에서, 사회에서 각각 한 명씩의 막역지우는 있어야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데 힘을 얻을 수 있다. 
언제든지 내 편에 서서 나를 지지해주고, 진심으로 직언을 해줄 수 있는 친구가 막역지우다. 가릴 것 다 가리고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친구는 막역지우가 아니다. 지금 나에게 막역지우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에게 막역지우인가?

임동헌 목사(광주첨단교회)
임동헌 목사(광주첨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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