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成三問, 1418년 ~ 1456년 6월 8일)과 신숙주(申叔舟, 1417년 8월 2일(음력 6월 20일) ~ 1475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는 동문수학한 막역지우이지만, 우리나라 국민 의식의 양상에서 두 축을 형성하고 있다.​

필자는 이덕일 선생을 좋아하는데, 그 중 하나는 계유정란을 주도한 수양대군의 사건에 대해서, 우리나라 역사는 일방적 암기 교육을 시킨다는 것이었다. 역사는 암기 과목이 아니라 응용 과목이라는 것이다. 역사 이해가 암기가 되면 사람은 획일적 사유 체계가 된다. 유연한 사유를 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암기 사건이 사육신의 성삼문과 배신, 변절의 아이콘 숙주나물 신숙주이다.​

사육신이 6명이지만 성상문의 이름이 알려졌듯이, 집현전 학자들 중에서 신숙주만 수양대군의 편에 선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숙주가 아이콘이 된 것은 가장 탁월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얼마전 강성률 박사의 <고집불통 철학자들>(글로벌컨텐츠, 2023)이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고집불통 철학자는 세계를 변화시켰고, 자기 사유를 변화시킨 철학자들은 세상을 융성하게 한 능력자"라고 제시했다. 우리는 고집불퉁, 강직한 사람을 양성하는 교육 체계인 것 같다. 그러나 고집불통이 반드시 가야할 지향점은 아니다. 우리 생활의 모습에는 다양한 모습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것에 대한 이해와 배려 그리고 존중이 필요하다. 참고로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까지 양해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는 1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45년부터 한글이 표준문자가 되었고, 1962년에 단기​(檀紀)에서 서기(西紀)로 전환시켰다(+2333년). 우리나라 사람은 사유가 급하고 비례해서 행도도 빠르다. 이제 경제 강국이고 군사 강국에 맞게 합당한 사유 체계를 구축해야 할 시점이다. 국가경영도 거시적 계획과 미시적 계획이 모두 적합하게 운용되어야 한다. 모든 계획은 합리적 사유 체계에서 수립되어야 한다. 개인의 영달을 위한 계획은 이제 중지되어야 한다. 플라톤은 정치인에게 철학 덕목을 요구한 이유이다. 플라톤의 실수는 정치인의 열정과 탐욕(니체의 권력의지)에 대해서 제시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권력의지가 없는 지도자를 따르거나 추앙하지 않는다. 순수한 철인을 정치지도자로 옹립시키지도 않는다. 어떤 권력에서도 '선'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정의'를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키워드를 놓고 있다. 이승만을 존경해야 할까? 존경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한 행위를 은폐, 조작, 과대해석하는 방식으로 존경하는 것은 부당한다. 객관적인 정보들을 놓고서 판단해서 행동하면 양심적이고 합리적이다.​

필자는 대한민국의 여러 특징이 있는데, 화폐에 독립 운동가의 초상이 없다는 것이다. 이덕일 박사는 독립한 나라에서 독립운동가 초상이 없는 나라는 대한민국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필자는 오만원 권 혹은 십만원 권에 김구 선생과 이승만 선생의 두 초상을 한 지폐(앞편과 뒤면)에 넣어서 제작하는 것을 제언한다. 그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정서인 것 같다. 우리나라는 김구 선생도 존경하고, 이승만 선생도 존경한다. 그렇다면 두 초상을 넣어서 지폐를 제작한다면 우리를 대변하는 행동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신숙주는 싫어하고, 성삼문만 좋아한다. 이것은 좋지 않다.

 

백범(白凡) 김구(1876-1949)와 우남​(雩南) 이승만(1875-1960)을 성삼문과 신숙주로 비교한다면, 신숙주로 비교하는 것에 불편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을 성삼문에 비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은 구도일 것이다. 또 김구를 신숙주에 비교한다면 말이 안 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신숙주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편향성에서 벗어난다면 사유는 좀 더 유연해 질 것 같다.​

일제강점기에서 친일파의 유연성과 수양대군의 편에서 선 유연성은 비교할 수 없다. 단종과 수양대군은 같은 민족의 권력 다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삼문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이제 신숙주에게 여유로운 마음을 베푸는 훈련을 해보자. 그래도 성삼문처럼 고집불통의 철학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숙주의 탁월함을 가볍게 여기는 말아야 한다. 죽은 자의 명예로움과 함께 산 자에게 고민과 곤고가 있다. 잎새 우는 밤에 고독과 한숨짓는 회한이 있다면 인간으로 족하지 않을까? 비록 나타난 모습은 변절자이고 폭군일지라도.... 그러나 그 모습이 그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평가하는 것은 먼저는 법이고 둘째는 업적이다. 가끔 법을 능가하는 업적을 가진 초인이 있다(소크라테스, 성삼문).​

이제 자기 생에 최선을 다하는 인간을 존중해 보자. 성삼문은 훌륭한 사육신 중 한 위인이다. 그러나 신숙주도 탁월성에서는 부족하지 않다. 우리는 반드시 성삼문이 되어야 할 당위성을 갖고 있지 않다. 자기 양심과 자기 이익의 소리를 따라서 최선의 결정을 해 보자. 우리는 삶에서 끊임없는 판단에서 갈등을 겪는다. 이 둘의 기로에서 한 쪽을 택해야 할 것인데, 택하지 않은 다른 쪽에 대해서 불편함이나 적대감을 갖지 않아야 한다. 한 쪽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 땅에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또 죽은 뒤에 나의 이름을 사람이 기억하는 것에 대해서 의식할 필요도 없다. 자기 생은 자기 생으로 최선이고 만족이다. 자기 생에 대한 평가는 전능자께서 하실 것이다.​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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