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칠현도’. 앞줄 왼쪽에서 거문고를 타는 혜강.
‘죽림칠현도’. 앞줄 왼쪽에서 거문고를 타는 혜강.

천부적 재능과 뛰어난 용모의 소유자였던 혜강(223년~262년,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사상가)은 죽림칠현(竹林七賢)과 함께 대나무 숲에서 술을 마시고 청담(淸談, 맑고 고상한 이야기)을 나누는가 하면, 종종 약초를 캐고 단약(丹藥, 장생불사의 영약)을 먹어 수명을 늘리는 일에 힘썼다. 그는 또 문학을 잘하고 그림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거문고를 좋아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밤새워 거문고를 켜고 막 일어서려다가 꼿꼿한 자세로 거문고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한 노인을 발견하였다. 혜강의 간청을 받은 노인은 이윽고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사람의 가슴을 찌르는 듯한 슬픈 곡조에서 즐거운 멜로디로, 다시 여인의 흐느낌으로 변하곤 하였다. 연주가 멈춘 뒤에야 정신이 든 혜강은 연주의 비법을 가르쳐 주십사고 애원하였다. 이에 노인은 전국(戰國)시대의 이야기부터 꺼냈다.

중국 천하를 통일하기 위한 야망으로 진나라는 맨 먼저 한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한나라의 대신(大臣, 큰 신하)인 협루는 진나라와 내통하여 조국인 한나라를 팔아 넘기려 하였다. 그러자 또 다른 대신 엄중자는 협루의 의견에 반대하다가 결국 제나라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는 제나라에서 의협심이 강한 백정(白丁) 섭정을 만나 사귀었고, 엄중자의 간청을 받아들인 섭정은 한나라로 가서 협루를 찔러 죽였다. 임무를 마친 섭정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스스로의 눈꺼풀과 코, 귀를 자르고 얼굴을 으깬 다음, 스스로 목을 찔러 죽고 말았다. 한나라에서는 그의 시체를 길에다 효수(참형이나 능지처참을 한 뒤 그 머리를 장대에 매달아 놓는 형벌)하고 현상금을 내걸어 그의 신원을 밝히려고 하였다. 

이때 섭정의 손위 누이 섭보는 ‘그 자객은 분명히 내 동생이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던 바, ‘얼굴을 으깨고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동생은 내가 연루될까봐 그랬구나!”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가 ‘나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동생의 명예로운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동생의 시체 곁에 다가가 통곡하며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 다음, 동생의 이름을 관중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형리(刑吏)에게 체포되기 직전, 시체 곁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혜강은 감격하여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러나 노인은 말을 다시 이어나갔다. “거문고를 다룰 때는 손가락으로 연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곡이 생겨난 내용, 하소연하고자 하는 핵심을 파악하고 곡 가운데 스스로를 몰입시켜야 합니다.” 설명을 듣던 혜강이 다시 한 번 노인의 모습을 보려고 하였으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혜강은 유교의 인위적이며 복잡한 갖가지 예절을 혐오하였다. 옛 성현들도 공공연히 비난하였으며, 당시 정권을 잡은 사마씨 일가에도 불만이 많았다. 고통을 달래기 위해 그는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그래도 울분이 풀리지 않으면 거문고를 타거나 쇠붙이를 힘껏 두들겨댔다. 

결국 혜강은 사마씨의 심복인 종회의 모략에 의해 형장으로 끌려간다. 그가 쓴 편지 가운데 사마소를 비방하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이 사형 선고의 이유였다. 그는 형장에서 거문고로 「광릉산」한 곡조를 타며 한나라의 간신을 척살한 섭정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무력함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해서 혜강이 죽으니, 그의 나이 겨우 서른아홉이었다. 

같은 시대에 태어나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어떤 사람(완적, 재미있는 철학이야기 제 24화 ‘술은 나의 보호색’ 참고)은 술로써 죽음을 면하고 어떤 사람(혜강)은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여 죽음을 당하니, 바로 이것이 당시 지식인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강성률 박사(광주교대 명예교수, 광주기윤실 대표)
강성률 박사(광주교대 명예교수, 광주기윤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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