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목사_수안보파크텔에서,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서울신학대학신학박사 등
최원영목사_수안보파크텔에서,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서울신학대학신학박사 등

 


살전2:1-13 요약

1)복음에는 희생의 따른다


(1)복음을 전하면서 사도바울은 39대를 5번이나 맞고, 3번 태장을 맞았다.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단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이런 고난을 당했다. 빌립보에서도, 데살로니가에서도 복음을 전하다고 고난을 당했다. 바울사도는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을 당했지만 오히려 낙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교회를 향해 염려를 했다.(고후11:28).

(2)복음 전도는 영적 생명을 낳는 일이다. 아이를 출산할 때 산모의 고통이 매우 크다. 영적 생명을 낳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한 영혼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육의 사람으로 무장되었던 분이 하늘의 사람으로 영의 사람으로 바뀌는 일이다. 고통 없이는 불가능하다. 복음을 전하는 자나 받는 자는 고통이 따른다. 이 고통은 힘들고 고된 사역이지만 결과는 항상 기쁨과 감사로 마무리한다. 영적 진통의 결과는 큰 기쁨이 회복된다.

(3)복음 전도를 포기하지 말라. 우리가 포기해야할 것은 세상적인 것들이다. 세상적인 것들은 포기하면 할수록 인생이 맑아지고 선명해지고 간결해지고 행복해진다. 그러나 영적인 것은 포기하면 인생에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다. 진짜 후회하는 인생으로 마무리 된다.


2)복음전도자는 복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았다.


(1)복음은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이다. 위임받은 것이다. 위탁받은 복음을 복음전도자는 어떤 마음과 자세와 태도로 임해야 하는가? 바로 청지기 정신이다. 청지기 정신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 맡겨준 것이기에 지혜와 성실과 명철함으로 관리할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내 것이 아니고 주인의 것을 맡았기 때문이다.

(2)복음을 위탁받은 복음 전도자는 기본적으로 깨끗해야 한다. 속임수나 간사함, 아첨, 탐심, 이중성이 없어야 한다. 거짓이 많은 사람, 양파껍질처럼 흑막이 있는 분들은 복음전도자로서는 합당하지 않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임받은 청지기 기준에 아주 먼 분들이다. 복음전도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교회와의 관계에서도 정직해야 한다.

쇼 아노는 한국 어머니과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 가정 자녀이다. 쇼 아노는 9살 대학 입학, 12살 로욜라대 최우등 졸업, 21살 시카고대 최연소 의학박사, 생물학박사이다.  공부천재가 이런 문장을 남겼다. 꿈이 있는 공부는 배신하지 않는다.” 맞는 말이다. 나는  정직한 인생은 배신하지 않는다.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3)정직한 복음전도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은 것처럼 그가 하는 모든 일에 형통할 것이다”(1:3). 정직한 복음전도자는 하나님이 인정해주신다. 그러나 정직하지 않은 인생은 결국에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으로 마무리된다(1:4). 복음전도자는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주인을 빛나게 하는 조연이 되어야 한다. 사도바울은 복음 전도자로서 자비량 선교사로서 밤낮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던 사도라는 권위를 포기했다. 특권의식을 내려놓았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복음만 전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1.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세_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1)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남달랐다. 그들은 사도바울의 전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살전2:13).

2)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바울의 외모를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

(1)사도바울의 외모는 평균 이하였다. 사도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 복음전도자로서 안질은 대중사역자로서는 불편한 외모였다. 3번이나 간절히 치료해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고후12:7-10)다는 말로 위로와 힘을 얻었다. 또한 말보다는 글이 더 낫다고 평가받았다.

(2)사도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오히려 더 크게 기뻐하며 자랑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더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다(고후12:7-10).

(3)모든 것이 완벽하면 하나님을 의지하기가 쉽지 않다. 자칫 교만이나 자만이나 자기 자랑의 늪에 빠지기 쉽다. 모든 것이 완벽하면 하나님 없이도 사는데 별 불편함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 너무 편하고 안락하고 가진 것이 많고, 배운 것이 많고, 주변 여건이 불편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에 의존한다. 이런 분들에게 특징이 있다. 하나님의 일은 또 하나의 악세사리에 불과하다. 인생의 이력서 한줄 올리는 것으로 만족한다. 사역에 생명을 걸지 않는다. 천국에 소망을 두지 않는다. 어쩌면 양들을 옳은 곳으로 인도하기 보다는 함께 즐기는 수준의 정신적 마음의 위로 정도에서 관계를 맺는다. 정작 양들이 위험에 처해 있으면 그 자리를 피한다. 양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눠주지 않는다.

(4)완벽한 것을 추구하지 말라. 세상의 것은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 복음을 자랑하라. 나의 강함이 어쩌면 복음을 잃어버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너무 완벽하면 하나님이 일하시고 개입할 영역이 너무도 줄어든다. 때로는 살면서 부족함으로 인해서 상처도 받고 마음도 아프고 그것으로 인해서 자신감이 떨어져도 좋다. 그것으로 인해 주님을 다시 붙드는 계기가 된다면 약함이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만드는 강함이 된다.

(5)사도바울의 외모는 흠모할만한 것들이 없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바울의 외모를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에 그 말씀에서 영적인 힘을 얻은 것이다.

(6)오실 예수님의 외모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사53장에 예언했다. 이 땅에 왕으로 오실 예수님의 모습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의 모습이 아니다.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아름다움도 없다. 매력적인 요소가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이런 모습으로 왔다고 하면, 친구도 없고, 따돌림 당했을 것이다. 또한 철저하게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예수님은 멸시를 받고,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간고(고통과 근심)를 많이 겪고, 질고(괴로운 질병, 슬픔)를 당했다. 사람들도 예수님을 멀리했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 이런 모습으로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을까?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의 겉모습은 흠모할만한 매력은 없었지만 그 내면에서는 인류를 구원할 위대한 영적 진리를 담고 있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괴로운 질병)으로 인해 슬픔을 당하였다._그런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이 받은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징벌이 아니다. 우리로 인해 받은 고난이다.

●우리의 허물로 인해 찔림의 고난을 당했다_가시관에 찔리는 고통, 두 손과 두발과 옆구리에 찔림을 당하는 고통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다. 인류의 허물 때문이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함을 받는 고난을 당했다_에수님이 받은 모든 고통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율법의 죄 용서는 제물이 필요하다. 인간이 죄를 짓고 동물이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했다. 속죄의 양이 된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속죄양이었다. “모든 물건은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도 없느니라” (9:22)

●우리의 평화를 위해 징계를 받았다_예수님이 왜 징계를 받았느나?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했을까?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혀 있던 모든 장벽을 헐기 위해서이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징계를 받으셨다. 예수님은 화해자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막혀있던 모든 담들이 허물어진다. 불안과 염려와 공포는 예수님 믿으면 다 사라진다. 마음에 하늘의 평화로 가득 채워진다.

●우리의 건강을 위해 채찍에 맞으셨다._건강을 잃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건강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건강을 위해 채찍에 맞는 고난을 당하셨다. 39차례 매를 맞았다, 가죽 끈 끝에는 쇠갈코리가 달려있다. 로마병사가 채찍을 휘두를 때 마다 가죽이 몸을 휘감으면서 살을 파고든다. 잡아당기면 살점이 뚝뚝 떨어져나갔다. 죄가 없는 분이 채찍에 맞으셨다. 우리를 치료하기 위해서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나음을 입는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은 권세가 있다.

(7)사도바울의 외모는 흠모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전한 말씀은 능력이 있었다. 사람들의 영혼을 소생시켰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사도바울이 전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8)예수님은 인간이 흠모할 만한 외모를 가진 분이 아니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이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고난과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당당하게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면 놀라운 은혜가 흘러내린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권세가 있다. 모든 어둠을 물리친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치료의 능력이 있다. 육이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거듭난다. 삶의 고난을 넉넉하게 이기고 승리한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권세이다.


2.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 고난을 이겨 낸다


(1)데살로니가 교회가 많은 환난을 이겨낸 비결은 무엇인가?(살전1:6,7), 말씀을 받을 때에 성령의 기쁨으로 받았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동족으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았다.

(2)우리들의 삶의 자리가 다양하다. 고난도 다양할 것이다. 여러분들은 고난을 어떻게 견디고 이겨내고 극복하고 있는가? 경제적 어려움에 쳐한 분들, 시험으로 인해 영적 갈등에 있는 분들, 질병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분들, 가정의 우환으로 인해 근심 걱정이 많은 분들, 자녀들의 입시, 비전이 보이지 않는 일터와 인생, 예수님을 전하다가 핍박당한 분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도를 잘 안하기 때문이다. 전도되어 오는 분들이 거의 없다. 전도를 안 하는데 거룩한 핍박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을 듯하다. 여러분들이 당하는 현실적인 고난은 먹고 사는 문제, 의식주에 한정될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 재정의 어려움, 가정생활, 신앙생활을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자녀들과 영적전투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 등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 고난을 감당하며 이겨낼 수 있는가? 바로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시나니”(4:12).

(3)오늘날 목회자들은 교회의 부흥의 불길이 꺼져 갈까봐 노심초사한다. 교회에 다가오는 사회문화적인 파도는 충격을 넘어 교회의 존립을 걱정해야할 정도이다, 인구 소멸, 무엇보다 다음세대 소멸은 재앙수준이다. 우리 문화속에 깊이 파고드는 성문화는 도를 넘어 재앙수준이다.이것은 가정해체를 가속화하고 있다. 삶의 자리가 그리 호락하지 않다. 고단한 인생살이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생길까? 바로 말씀이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들의 껄껄한 마음을 달래주는 예배정도의 생각만의로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이겨내지 못한다. 예배를 하나님앞에 드린다는 자세와 태도가 있을 때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공급받고 삶에서 일어난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어려움을 극복할 뿐 아니라 이것을 뛰어넘어 복음의 사명자로 세워져야 한다.

(4)인생을 제대로 배우려면 바다로 가라고 말하는 프랑스 최고의 철학과 교수 로망스 드빌레르는 /모든 삶은 흐른다/는 철학서가 번역되었다.

쉬지 않고 늘 움직이는 바다를 통해 우리는 매일의 인생 여행을 떠올려 본다. 바다는 같은 모습인적이 없다. 그런 바다를 통해 우리는 굴곡 있는 인생이 무조건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라는 걸 다시금 떠올린다. 바다에게 거친 파도와 잔잔한 물결이 일상이고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철학을 한다는 건 삶의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삶이란 이미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바다가 존재만으로 완벽한 것처럼 말이다. 때때로 고난과 역경이 삶의 전체를 휘감아도. 들뜨고 환희로 가득한 순간들도. 그 모든 순간이 인생이다.

"잠시 눈 감고 싶을 만큼 힘들다고 해도 그것이 삶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잠시도 쉬지 않고 물결치는 바다처럼 삶도 물결치며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5)바다에 밀물과 썰물이 있듯이, 잔잔한 물결과 사나운 파도가 불 때도 있다. 인생에 고난이 찾아올 때 너무 외로워하거나 슬퍼하거나 낙심하거나 불평하거나 포기하지 말라. 인생이란 좋은 날도 있고 파도치는 날도 있다. 파도치는 날에는 주님을 꽉 붙들고 씨름하면 되고, 잔잔한 날에는 주님의 뜰 안에서 찬송하며 거닐면 된다. 너무 완벽한 인생을 추구하지 말라. 불완전한 모습도 아름답다. 불완전한 모습을 보면서 나의 연약함 앞에서 주님을 더욱 붙들면 나의 약점이 강점이 되고 인생의 길을 열어가는 축복의 인자가 된다. 부모로부터 좋은 것을 많이 물려받았다면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더욱 주님을 붙들라. 인생은 주님을 붙들 때 지켜지고 지켜낼 수 있고, 더욱 유익한 삶이 된다.

인생이 파도치는 한 가운데 힘겹게 버티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잔잔하고 평온한 바다와 같이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라. 그러면 고난를 뛰어넘어 사명자로 우뚝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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