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와 비평

“계몽의 변증법“의 핵심을 간추리며 필자의 비평을 함께 넣었다. 본문 자체가 매우 어렵고 복잡하게 얽혀 있어 부쉴링어의 비판적 논문에 기대어 정리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관점으로 본서를 이해한다.

I. 계몽과 아우쉬비츠

본서는 아우쉬비츠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즉, 사회가 계몽되면 아우쉬비츠 참사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 대량 학살은 계몽이 거둔 열매이다. 일단 간단하게 이 관점으로 본서를 정리해 본다. 저자들이 서문에서 본서의 핵심으로 내세운 두 가지 명제는 다음과 같다:

1) 신화는 이미 계몽이다.

2)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계몽된 현대에 사는 우리가 신화라고 해서 무시하는 것이 사실은 계몽 자체이다. 왜냐하면 신화란 인간을 계몽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계몽)하고자 만들어진 커다란 빈틈없는 체계였다. 이는 원시적 주술신앙과 전혀 다르다. 누구나 그 신화적 세계관 속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행복과 불행을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았다. 그러므로 저자들은 신화가 이미 계몽이라고 한다. 이 명제는 언어유희로 들리지 않는가?[1] 일단 계속 이들의 논리를 따라간다.

“계몽이 신화로 돌아갔다(zurückschlagen)“는 말은 계몽이 엎어져 다시 신화로 돌아갔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신화와 계몽의 본질적인 공통은 무엇인가? 양자가 이성을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 사실은 신화 오디세우스에 잘 드러난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의 이성을 도구로 사용하여 결국 자연의 폭력을 이기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분리이다. 실재가 주체와 객체로 분리되었다. 주관과 객관, 자연과 인간, 인간 자신도 분리되었다. 저자들은 이것을 폴리페무스, 사이렌의 이야기에서 그 근거를 찾아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 이야기에서 나타난 것과 똑같은 현상이 계몽된 현 세상에 일어나며, 오히려 이것이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다. 오디세우스에게서 시작된 이성을 도구로 사용한 인류의 자기 파괴의 과정으로의 계몽의 결과가 현대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세상은 유대인 600만을 학살한 것의 상징인 아우쉬비츠 집단수용소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 아우쉬비츠는 계몽의 열매로서 필연적이다. 계몽이 진행되다 나타난 우연도 돌출된 사건도 아니다. 계몽의 내적 성향에 따른 것이다. 계몽에는 아우쉬비츠라는 야만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내적 필연성이 있다.

그러면 계몽은 어떠한 방식으로 인간을 그렇게 잔인하고 무감각하게 만들었는가? 계몽이 자연으로부터 영혼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물과 흙, 식물, 동물과 같은 자연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류 문화 초기 단계에 있었던 애니미즘적 사고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이성이 자연에 권력을 행사하여 인간과 자연의 분리가 가속화되고 자연은 인간의 노예가 되어 비인간화는 지속되었다. 그 결과 영혼은 물질이 되었다.

드 사드(1740-1814)는 이 모든 것을 미리 내다본 예언자와 같다. 그가 “쥘리에트, 악덕의 번영“에서 철저하게 계몽된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아우쉬비츠 현상과 흡사하다. 계몽은 이성을 도구로만 사용하게 하고 인간으로부터 인간성을 앗아가기에 인간을 비인간적이고 비정하고 잔인하게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잔인무도하고 아무런 이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타인을, 심지어 부모와 친구까지도 죽이는, 죽이기 위해 죽이는 인간성이 쥘리에트에 잘 드러난다. 심지어 사람의 살을 도려내어 먹기까지 한다. 이곳에 등장하는 모든 끔찍한 일이 아우쉬비츠에서 재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계몽이 엎어져 신화로 돌아갔다고 말할 수 있다.

 

비판:

“신화는 이미 계몽이며, 계몽은 신화로 돌아갔다“는 두 명제는 쉽게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계몽이 신화를 벗어났다고? 무슨 소리! 계몽과 신화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어!“ 무슨 이유로 그렇게 주장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이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1. 신화와 계몽은 모두 현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재를 이해하는 방식이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몽주의 이후 모든 현상을 자연법칙에 따라 이해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는 고대 그리스인이 봄과 겨울을 페넬로페의 납치를 설명하는 방식과 같다.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2. 신화와 계몽은 모두 도구적 이성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을 도구로 사용하여 자연을 이기고자 하며, 인간의 삶도 목적 지향성에 맞추어 컨트롤한다.

문제는, 저자들이 계몽적인 사고를 인간이 이성을 도구로 사용하여 본능에 기초한 인간성의 자연적인 발전과 사회의 발전 과정을 컨트롤하고 영향을 준다는 것에만 국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의 다른 기능과 계몽적 사고의 긍정적인 면을 차치하고서라도, 계몽과 이성이 본능의 발산을 억제하고 사회의 발전 과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이들이 침묵한다. 그러므로 계몽이 아우쉬비츠로 귀결할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결론은 맞지 않는다. 신화와 계몽이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결국은 같다고 하는 것은, 곤충과 인간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인간이 곤충과 같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II. 계몽의 약속은 성취되지 않았다

본서를 다른 관점에서도 읽을 수 있는데, 이것은 계몽이 한 위대한 약속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릭 프롬도 <존재와 소유>에서 이 점을 강조했다.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에서 이 점을 상론하고 그 해결책까지 제시했다. 이 약속은 독립, 복지, 고상한 인격이라는 세 가지이다.

1. 인간이 독립한다는 약속

칸트는 계몽이란 인간이 자기가 초래한 미성숙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미성숙이란 자아가 외부 권위의 도움을 받아서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몽된 인간은 외부 권위와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난 자율적 인간이다. 이것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면 인간은 신이 된다. 칸트로부터 비롯한 독일 관념론은 이러한 철학의 발전을 보여준다. 헤겔에 의하면 절대정신은 결국 인간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곧 신이다. 그러나 호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 따르면, 실제로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매스컴, 영화, 유흥 산업으로 조정된다. 인간은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인형과 같이 조정되는 존재이다. 인간은 거대한 기계의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락했다. 계몽이 제시한 찬란한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신이 되지 않았다.

2. 인간이 복지에 이른다는 약속

인간이 이성을 도구로 사용하여 과학을 발전시키고, 자연을 파악하여 자연 지식을 사용하며, 이것을 이용하고 정복함으로써 인간의 복지는 증진된다는 약속이다. 그러면 인간 복지는 대폭 증진되었는가? 저자들은 결코 아니라고 한다.

3. 고상한 인격의 인간으로 발전된다는 약속

현대인이 계몽이 약속한 대로 고매한 품성을 갖추었는가? 칸트의 기대대로, 계몽된 인간이 자기 도덕적 원칙을 스스로 정하여 지키는 성숙하고 자율적 인간이 되었는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은 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940년대 현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아우쉬비츠의 야만은 인간이 고상하게 된다는 약속이 완전히 망상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저자들은, 계몽주의 완성자로 알려진 칸트의 이러한 기대 혹은 약속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체계적인 이론 비판을 사용하지 않고 신화적 설명을 통해서 한다. 이러한 시도는 당연히 학자들의 비판을 거둔다. 저자들의 설명을 다시 한 번 살펴본다. 독자들은 이들의 논리가 과연 합리적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그들은 첫 인간들을 상정한다. 그들이 말하는 첫 인간들은 애니미즘적(animism) 인간으로서 주술을 사용한다. 이들은 모든 존재가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믿었다. 돌, 풀, 나무, 짐승, 그리고 물론 인간도 그렇다. 이곳에서는 각 존재는 자신과 분리되지 않고 완전한 상태로 존재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이름이 주어지면서 존재가 분리된다. 원래의 존재와 이름으로 대표되는 존재이다. 이 양자는 서로 다르다. 존재는 개별적, 구체적인 반면에 이름은 추상적 집합적이다. 이름은 그 존재에 속한 모든 종(種)에 붙여졌으므로 이것은 개별적 존재와는 다르다. 예를 들면 하나의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는 그 나무 자체로 존재한다. 그러나 나무라는 언어가 만들어지면서 모든 나무가 나무로 불리웠다. 그러므로 한 그루 나무는 그 존재 자체의 의미보다는 그것은 나무라는 종의 이름으로 집합적인 정체성(identity)를 가진다. 이것은 존재가 추상화되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것이 계몽을 통해 일어난다. 이러한 방식으로 계몽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존재론에 혁신을 일으켰다.

이로써 모든 것이 그 자체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재료와 견본이 되었다. 만약 한 나무가 땔감이나 목재로 사용된다면, 그 나무가 어디에서 왔고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 묻지 않는다. 그는 단지 소모품에 불과하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개인으로 인식되지 않고 인간 종(種)의 범주 안에서 인식됨으로써 개인성은 고려되지 않는다. 특히 공장에서는 기계적으로 일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가 없어지면 다른 사람으로 교환하면 된다. 그의 존재는 하나의 부속품과 같다. 이와 같이 모든 인간은 교환가치 외에는 없다. 이렇게 기술문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기능성으로 측정되므로, 인간은 목적이 아니라 단지 수단이 된다. 인간은 더는 개인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이곳에서 저자들은 개념적인 사고를 극단적으로 비판했는데, 그 이유는 이것은 인간이 자신을 자연과 분리(소외)하고, 이로써 자연을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념화에는 소외가 따르지 않을 수 없지만, 이것은 구분하며 정돈하는 것이므로 분리를 낳지 않는다. 즉, 각 사람마다 조금씩 달라 모든 사람을 사람이라고 부른다면, 이로써 인간이 소외(Entfremdung)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동물이나 다른 사물과 구분된다. 개념을 정확하게 할수록 사고의 세계는 확장된다. 물론 모든 개념화에는 약간의 소외가 생기지 않을 수 없지만, 모든 사물, 모든 활동이 개념으로 구분된다면 사고가 확장될 뿐만 아니라 정확한 인식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호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개념화를 통해 통전적으로(wholistic) 존재하는 존재양식이 깨어졌다고 한다. 모든 사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던 애니미즘 세상에서는 무생물에도 생명이 있으며, 무생물, 짐승, 인간은 합일해서 살았고, 욕망을 그대로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것들이 각자 개념으로 파악되고 이름을 갖게 됨으로써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소외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러한 계몽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이러한 세상에 사는 인간은 두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 인간이 항상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천둥이 쳐도, 홍수가 나도 신의 노여움이 두려워하며, 항해를 하거나 초행 길을 갈지라도 신의 가호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두려움을 없애려고 했다.

2) 그러한 세상에서는 인간이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 그러므로 계몽의 프로그램은 인간이 두려움을 없애고 자기가 주인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으로부터 신화와 마법을 없애는 것이다. “계몽은 신화를 파악하여 지식을 통해 환상을 넘어트리려고 했다.“

이제 인간이 계몽되고자 애쓴 이유가 분명해졌다. 애니미즘 세상에서는 인간과 자연이 완전히 일치가 되며 인간 소외도 없다. 문제는 삶에 신에 대한 두려움이 동반하므로 인간은 신의 영향 아래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의 주인이 되려면 신들로부터 해방해야 한다. 이것이 계몽의 목적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은, 계몽은 원래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계몽주의에는 무신론의 전통도 있다. 계몽주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휴머니즘(humanism)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속박을 벗어나 “신에게 대부분, 인간에게는 약간“(인간의 자유의지 강조)으로 출발해서 서서히 “신과 인간이 절반씩“으로 진전되었다가 이것이 “오직 인간“의 이신론으로 발전했다. 계몽, 혹은 계몽주의는 신의 간섭을 받지 않는 새로운 신관, 즉 이신론(deism, 칸트를 비롯한 대부분 계몽주의자), 범신론(pantheism, 스피노자), 범재신론(panentheism, 헤겔)을 포함한다. 칸트에게는 신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기 이성과 양심에 따라 자율적으로 사는 존재이지만, 사후에 그의 삶을 판단하여 상벌을 주는 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악행을 할 것이다. 이것이 이신론자들의 신관이다. 이들에게 신은 세상을 마치 정교한 시계처럼 만들어 자동으로 잘 돌아가도록 한 장인과 같다. 이곳에서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자기 삶을 잘 운영해야 한다. 그가 죽으면 그의 삶에 대해 신이 판단한다.

그러므로 계몽은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보다는 신으로부터, 정확하게 말하면 신의 간섭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인간은 자기가 주체가 된다. 저자들은 오디세우스가 그의 지혜(꾀)를 사용해서 이것을 해냈다고 한다. 꾀를 사용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와 사물 사이에 무엇인가를 끼워 넣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기가 각 사물과의 직접적인 관계성을 떠나고 그것과 거리를 둠으로써 가능하다. 인간은 이제 언어를 통해, 혹은 언어를 발견함으로써 그 대상과 거리를 둘 수 있다. 왜냐하면 언어의 기호가, 언어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분리된다는 점을 안다는 사실은, 직접 이름을 부르는 개별적인 독특한 사물의 직접성으로부터, 단지 표기만 된 종에 속한 사물로 이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하는 것과 인식된 자 사이에 이러한 언어적 층이 있음을 의식한다는 것은, 인식된 사물의 존재론을 변화시킨다: 중간층으로서의 언어는 영혼을 물화하는 도구가 되는데, 그 이유는 언어가 추상적인 물성(物性)을 선택했으므로 (사물의) 실제적인 직접성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문제, 언어를 통한 본질과의 소외 문제를 저자들은 본서의 제1장 “계몽이란 말의 의미“에서 다룬다. 그리고 마지막 장까지 연결해서 “계몽의 약속은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본서를 다시 한 번 개관하면서 필자의 비판을 곁들인다.

[1] 계몽으로 번역된 독일어 Aufklärung은, 계몽이라는 의미와 함께 "원인이나 이유를 설명한다"는 의미가 있다. 신화는 사건이 발생한 이유를 신화적 세계관 안에서 설명한 것뿐이지 계몽이 아니다. 계몽이란 사실, 진리로서 밝혀주는 것을 의미한다. 신화는 계몽과는 반대로 인간을 오류가 많은 사고에 묶어 둔다. 그러나 저자들은 계몽의 의미를 매우 축소하고 왜곡함으로써 계몽이 신화와 근본적으로 유사한 기능이 있다고 주장한다.

송다니엘 목사(유럽개혁신학연구소)
송다니엘 목사(유럽개혁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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