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낙범 박사(총신 교수, 새순교회)

오늘날 한국교회는 구원의 확신이 중요한 줄 알고 이를 가르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에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꼭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구속사역에 근거하기보다는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이나 감정에 근거한 확신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에 교회들마다 어려움이 많은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신앙생활도 많이 흔들리고 있다. 이 말은 잘못된 구원의 확신이 개인의 정체성은 물론이거니와 교회의 정체성마저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또 흔들리는 정체성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삶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고, 교회 역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언약공동체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는 그동안 한국교회가 성장에만 집중했지, 교회의 존립과 관계된 칭의의 문제를 바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칭의는 기독교를 떠받치는 주축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인데, 이것을 구원사적으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자유의지가 원죄로 인해 약해지기는 했어도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과 협력하여 의인이 된다는 잘못된 구원론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의 존립과 관련된 이신칭의의 문제를 시대에 뒤떨어진 교리로 생각하거나 도덕적 해이를 초래할 잘못된 교리로 간주하면 안 된다. 또 이신칭의가 그 이후 삶을 담보하지 못한다고 보고 유보적 칭의론을 강조하는 것도 중단되어야 한다. 오히려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이 말하는 칭의 문제를 칭의 이전과 칭의 당시, 그리고 칭의 이후라는 구조아래 고찰하고자한다.

 

1. 칭의 이전의 상태

1) 죄의 지배아래 있는 인간

기독교의 존립과 관련된 칭의 문제를 놓고 칼빈은 먼저 기독교강요 1권에서 인간이 어떻게 출발하고 어떤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는 기독교강요 1권 13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1권13장20절)이 영원한 경륜가운데 천지를 창조(1권14장1절)하실 뿐 아니라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1권15장3절)하셨다고 한다. 이어 그는 하나님이 부성적인 사랑(Paternus Deiamor)으로 피조 세계를 인간 아담에게 맡기고 대신 관리하며 대신 다스리는 복을 주셨다고 한다.

칼빈은 인간이 대리통치의 일을 할 때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려고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에덴동산에 두시고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고 한다. 또 하나님은 그것을 먹는 날에는 죽는다고 했으나 아담이 사탄의 말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는 불순종하므로 타락했다고 한다. 또 칼빈은 이런 아담의 타락을 가리켜 하나님께 대한 배신이요(2권1장4절). 또 최초의 죄인 ‘원죄의 성격’을 지닌다(2권1장5절)고 정의할 뿐 아니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죄를 아담의 죄를 모방한 것이라고 하면서 인간의 죽음도 처음 창조 때 죽을 형질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칼빈은 펠라기우스의 이런 주장을 무시하고 인간의 죄란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inobedintia, infidelitas)한 그 죄를 전가 받았다고 진술한다. 또한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죄의 전가는 모든 인간이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 안에 속해 있기에, 성격상 모태에 잉태하는 시점부터 이미 갖고 태어난다(2권1장6, 7절)고 가르친다.

또 칼빈은 죄에 의해 인간 전체가 전복(2권1장9절), 즉 전적타락(전인격적 타락)하므로 신형상이 파괴(특별은총의 관점에서의 형상)되었다고 한다. 이어 그는 사도바울의 말을 인용하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진술한다(2권1장9절). 그 결과, 인간은 죽음의 지배하에 있다고 한다. 결국 이런 진술은 기독교강요에서 아주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런 인간 이해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진지하게 갈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1권1장1절).

 

2) 율법 아래 있는 인간

(1) 율법의 필요성과 한계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죄를 전가 받고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처음 창조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고 실현하기 위해 인간에게 일반은총을 베푸시므로 죄를 억제시키고 죄로부터 인간을 보존하며 생을 유지시켜 주셨다. 하지만 일반은총을 통해 죄의 억제만으로 근본해결이 되지 않음을 아신 하나님은 특별은총을 베푸셨다.

그것이 곧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창3:15)고 약속하신 것이시다. 또 그의 후손인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믿을 때 의롭게 된 아브라함을 통해 보여 주신 것이다(롬4:3). 또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지만 선제적으로 준수해야 할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율법을 지키므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밝혀 주고 동시에 인간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깨달게(롬3:20)하므로 인간을 정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2권6,7,9절).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수여하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준수하면 할수록 지키지 못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절망케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리스도를 갈망케 한다는 것이다(2권6장1절). 이런 점에서 율법수여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한 은혜의 선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칼빈은 인간에게 율법이 이렇게 필요하지만 한계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율법이 인간을 결코 의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인간이 죄를 범하므로(롬3:23) 타락하였기 때문에 율법을 결코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롬3:20). 만약 율법을 지키므로 의롭게 된다고 하면 그 의는 타락한 인간의 행위에 불가하기에 죄를 사할 수 없고 의롭게 할 수 없다고 한다. 결국 율법준수로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헛되게 만들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출현할 때까지 율법은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를 갈망케 하는 일에 그 소임을 다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갈 3:24-26). 이런 점에서 율법은 인간을 구원시키고 의롭게 할 수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 율법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임을 알 수 있다.

(2) 그리스도의 필요성

구약시대에도 율법이 몽학선생임을 이미 예시되어 있다. 모세를 통해 율법을 수여하신 하나님은 구약성도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아셨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회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그들이 성전에 나와 준비한 제물에 안수하고 제사장으로 하여금 제사하게 하였다. 비록 제물이 반복적으로 드려지는 제사였으나 이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이 내신 죄용서의 방법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방법을 믿고 끊임없이 하나님이 정한 제물로 제사를 드렸다. 여기서 구약의 제물들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율법하의 유대인들에게도 그리스도가 계시되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물론 인간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어 영원한 구원을 보상받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에게는 그것을 지킬만한 자유의지와 능력이 없기에(자연의지는 있음)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이에 칼빈은 율법이 인간을 정죄하므로 절망상태에 빠뜨린다고 한다(2권7장3절). 결국 누군가가 율법의 정죄를 받고 죽음으로 죄 값을 갚아야 한다. 또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을 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이미 영원세계에서 구속협약을 통해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구속중보자로 정하셨다. 이의 실현은 하나님이 시간 세계에서 죄의 유입 후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고 약속하므로 그리스도를 예시하셨고, 아브라함은 거룩한 씨를 주신다고 했을 때 그 약속을 믿으므로 의롭다함을 얻었고, 그를 민족의 조상으로 삼고 그 민족(이스라엘)의 혈통을 통해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를 보내신다고 약속하셨다. 때가 되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의 혈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성육신하게 하셨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특별 은혜이다.

이렇게 성령으로 인성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인의 대표자가 되어 율법의 요구인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율법을 완성하셨고, 이로 인해 인간과 창조세계의 죄를 구속(제거)하셨다. 여기에 구원의 길이 있고, 영생의 길이 있다. 다시 말해 율법의 지배 아래 짐승을 제물로 드린 반복 제사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자기의 몸을 단번에 영원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고, 또 완전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따라서 구속 경륜가운데 죄를 구속하신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게 되는 것이 바른 이해이다. 이를 놓고 칼빈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 처음부터 택하신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를 세우셨고, 그를 보게 하시며, 그를 믿게 하셨다고 진술하고 있다(2권6장2절). 이런 점에서 인간에게 율법의 행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죄를 제거하신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알 수 있다.

 

2. 칭의의 상태

1)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인간

칼빈에 의하면 인류의 첫 대표인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가 그에게 연합된 모든 사람에게 전가되어 사망 가운데 있었지만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구속경륜 가운데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구속중보자(새 대표자)로 보내셨다고 한다(2권12장1절). 칼빈은 그리스도가 구속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기 위해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으로서 이 땅에 오셔야 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함이고,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죄를 정복하고 죽음을 삼켜버리며 세상과 공중의 권세를 파멸시키기 위함이라고 한다(2권12장2절).

그는 그리스도가 구속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해서는 멸망의 원인이었던 불복종을 해결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주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인류의 대표였던 아담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고, 또 죄에 대한 벌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육신을 제물로 드려야만 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가 인성과 신성을 결합한 것은 인성으로는 죽음을 느끼고, 신성으로는 죽음을 정복하기 위함이라고 한다(2권12장3절).

이때 칼빈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우리와 같은 이유를 설명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과의 교제에 대한 보증이고, 다른 하나는 죄와 죽음을 정복하고 얻으신 참 생명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는데 있다고 한다. 결국 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받은 죄와 육신을 제물로 바쳐 대속했는데, 그러한 행위로 우리의 죄를 말소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를 진정시키셨다고 한다(2권12장3절). 또 매일의 미사(the daily Mass)에서 그리스도를 다시 제물로 바치는 로마 카톨릭의 행위는 가증스러운 일임이 틀림없다고 진술하고 있다(2권15장6절). 따라서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할 수 있다.

 

2) 하나님으로부터 칭의 받은 인간

(1) 하나님의 칭의란 무엇인가? -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

칼빈은 칭의 개념을 기독교강요 3권에서 진술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의에 근거하여 은혜가운데 단독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에게 행하는 것이 칭의인데, 그는 여기서 칭의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므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목전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칭의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권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the forgiveness of sins)해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the imput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를 통하여 그러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한다(3권11장2절). 그런데 이러한 개념이해는 두 가지로 구분하여 살필 때 용이하다.

① 칼빈은 우선 칭의의 개념을 은혜로우면서 법정적(forensic)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칭의를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므로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의인으로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법적행위(3권12장1절)라고 한다. 즉 죄인들을 위한 칭의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의로우신 제판장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죄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신다는 것이다(3권12장1절). 여기서 하나님의 의의 선언을 통해서 인간이 받는 칭의는 본성의 완전함이 아니라 법적인 의의 신분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로마 카톡릭 교회는 칭의를 법적인 것이 아니라 죄인의 본성을 실제로 의롭게 만든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칭의와 성화를 혼돈하고 있다.

② 칼빈은 칭의의 또 다른 개념을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본다. 이 말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의가 없는 죄인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으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죄 용서를 받고 그의 의가 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대(인간법정이 아닌 하늘 법정임)앞에 담대히 설 수 있기 때문이다(3권12장1절).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속에 우리를 위한 의와 생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의로워져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칭의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에게 의롭다고 하늘 법정에서 선언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양도되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며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입적시키고, 또 우리에게 영생할 권리를 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하나님의 칭의의 근거-그리스도의 구속, 그리스도와의 연합

① 그리스도의 구속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는 첫째 근거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둔다. 무엇을 위한 구속이냐면 그것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와 죄인인 우리의 관계를 진술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죄를 알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의 내면에는 우리가 본성적으로 죄인임을 전제하고 있다. 또 바울은 그리스도를 ‘죄로 삼았다’고 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죄인이 되어 우리 대신 죽으셨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로 전가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은 것처럼 동일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의와 교환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의 전가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구속에 둔다. 결국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죽으므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기에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다.

②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는 둘째 근거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둔다. 이를 바울은 고후5:21에서 ‘그 안에서’라는 단어를 통해 진술하고 있다. 여기서 ‘그 안에서’란 우리가 자신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은 정확히 말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칼빈도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해 주는 근거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찾고, 이것 때문에 의의 전가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는 비할 데 없는 선, 혹은 머리와 지체들과의 연합, 즉 그리스도를 멀리 바라볼 때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옷 입으며 그의 몸에 접붙여지기 때문에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한다(3권11장10절).

또한 바울은 하나님이 아담의 죄가 아담 안에 있는 자들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정죄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공로가 그 안에 있는 자들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연합)에 있는 자들을 의롭게 하였다고 한다(롬5:16, 18~19). 결국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개인에게 체험되고 적용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즉 연합은 객관적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연결시키는 것이다.

칼빈은 이런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룰 때 고리가 있다고 한다. 칼빈은 그 고리를 성령의 은밀한 역사라고 강조한다(3권1장1절). 그 이유는 이 성령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고, 또 이 성령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일으키고, 이 성령이 복음의 광명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3권1장4절). 또 그는 이 성령이 우리 죽을 몸도 살리고(3권1장2절), 이 성령의 작용에 의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가 가진 모든 유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3권1장1절). 결국 그는 하나님께서 구속중보자 그리스도와 우리가 한 몸을 이루게 하는 띠(고리)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성령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3권1장1절).

(3) 하나님의 칭의의 수단-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믿음

칼빈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수단이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속행위를 믿는 믿음이라고 한다. 즉 그리스도의 공로를 내 것이 되게 하는 수단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라는 것이다(3권11장7절, 3권2장24절, 4권17장8-12절). 이런 진술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롬3:28)에 근거한다고 본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우리의 ‘믿음으로 인해서’이냐 아니면 ‘믿음으로 말미암아’이냐는 것이다. 이때 ‘믿음으로 인해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라는 행위를 보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이라는 행위를 믿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에 있어서 믿음이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아드리도록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엡2:8, 빌1:29)이라고 봐야 바른 이해이다.

오시안더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의 의를 우리에게 불어 넣어주시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과 함께 의로운 자들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이해는 그가 성경을 왜곡하여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할 것은 믿음 자체는 의롭다함을 얻게 할 고유의 능력이 없고, 단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만이 우리 죄인을 의롭게 한다는 것이다. 즉 믿음은 주관적 차원에서 의를 누리도록 일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이 되게 하는 수단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믿음이라고 강조한다(3권11장17절, 18절, 3권2장24절, 4권17장8-12절).

(4) 하나님의 칭의의 결과-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만세 전에 선택을 받은 자가 하나님 앞에 나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을 때 죄인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인간에게 전가되는데, 그것을 보신 하나님이 하늘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므로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때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 그것은 의인(칭의)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중생이나 회심, 그리고 성화와 같은 갱신의 행위나 혹은 과정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하시는 선언일 뿐 아니라 법적 행동이다. 또 의인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신자들에게 한 번 선언하므로 이루어지는 즉각적이고, 완전하며, 최종적인 일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 의인됨이 미치는 영향은 죄인의 상태가 아니라 그의 신분에 대하여 근본적인 변화(의인)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의인이 누릴 축복이 있다.

첫째, 화평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에서 알 수 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진노를 받으므로 원수 관계에서 화목관계로 전환되었기에 우리가 평화를 누린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롬5:2)에서 알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과거에는 하나님과 원수 관계였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구속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이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5:2~3)에서 알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동안 주님의 영광을 보길 고대하면서 그것을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환난을 당해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3. 칭의 이후의 상태

칼빈은 칭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하나 된 결과들 중의 하나이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면 칭의 이후의 상태는 성화의 과정(물론 이것이 칭의와 함께 출발하지만), 즉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을 통하여 우리가 당신의 형상을 점차적으로 닮아가도록 만드시는 이 일이 우리에게 있다고 한다. 이에 칼빈은 칭의와 성화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칼빈은 이런 관계 때문에 칭의 문제에 인간의 행위를 철저하게 배격하면서도 신자의 선행을 배제하지 않았다(3권16장1절). 오히려 그는 이신칭의 교리가 선행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현혹하여 죄를 짓게 만든다고 공격하는 자들에게 이 교리야말로 선행을 장려하고 죄를 억제한다고 하면서 대응하고 있다(3권16장2절), 그는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이 없이 성립되는 칭의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3권16장1절).

칼빈은 칭의와 성화가 이렇게 영원하고 불변하는 띠로 연결되어 있어서 결코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3권3장1절). 또 칼빈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칭의와 성화의 은혜를 동시에 받는다고 하였다. 또 그는 그리스도가 자신이 의롭다 하신 사람을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 하신다고 한다. 또 그는 칭의와 성화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분리할 수는 없는 이중의 은혜라고 한다.

이에 칼빈은 칭의 없는 성화도, 성화 없는 칭의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칭의는 확실한데 성화가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칭의와 성화 중 어느 하나를 배제하는 것은 개혁주의가 아니라 반(反)율법주의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신자에게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반드시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이 역사하시므로 신자의 내면에 온전함과 거룩함을 향한 열정이 생기기 마련이라고 한다. 결국 거룩한 행실과 선행이 칭의의 필연적인 증거로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칼빈은 우리가 마지막 날 영화되기까지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그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부정해야한다고 한다. 그래야 내적인 육욕을 죽이고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3권7장1-9절). 또 그는 자기 십자가를 날마다 져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3권8장1-8절). 또 그는 내세를 끊임없이 묵상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내세에 도달하기까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3권9장1-6절).

그런데 칼빈은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 하나님 앞에서는 전적으로 완전한 의인이지만, 한편 우리 스스로의 입장에서는 전적으로 불완전한 죄인으로서 구속중보자인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을 섬길 자이기에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 모두는 우리의 적은 능력에만 사로잡히지 말고 성령의 큰 능력에 의지하며. 우리가 시작한 거룩한 여행을 힘써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또 우리는 자기만족에 빠지지 말고 자신의 악행에 빠지지 말며 종점을 향해서 계속 거룩한 여행을 힘써 해야 한다고 한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과 완전한 친교에 들어갈 것이고, 또 그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화로운 모습에 도달하게 된다고 한다”(3권 6장 4절).

우리는 지금까지 칼빈의 칭의론을 칭의 이전과 칭의 당시, 그리고 칭의 이후라는 구조를 따라 고찰하였다. 이것은 구속사의 관점에서 고찰했다는 뜻이다. 이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칭의 이전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첫 대표인 아담이 그 언약을 파기함으로 우리가 아담 안에서 비참한 죄인의 모습으로 전락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속 사역을 이루기 전이기에 인간이 율법을 통해 죄로 인한 처참한 모습을 뼈저리게 인식했다고 하더라도 율법을 지키므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율법을 통해 절망하고 그리스도를 더 갈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칭의 당시의 상태에서는 인류의 둘째 대표인 그리스도가 오셔서 율법의 요구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율법을 완성하시고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통해 구속을 이루었기에 우리가 구속중보자인 그리스도의 구속을 성령의 감동을 따라 믿을 때 우리의 죄가 씻음을 받고 동시에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시고 자녀삼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을 보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칭의 이후에는 칭의로 끝나지 않고 성화(거룩한 삶)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의 칭의론을 통해 이해한 하나님의 놀라운 칭의를 그냥 아는데 그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에게 순종하면서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성화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가야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이 영원한 구속경륜가운데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시며, 우리를 그의 생명으로 사는 백성이 되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최낙범 박사(총신교수, 새순교회), 중앙대학교 철학과 졸업(B.A), 총신대신학대학원 및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졸업(Th.M), 숭실대학교 대학원졸업(Th.M), 미,Kernel University 대학원 졸업(Th.D),총신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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