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혼란과 갈등 가운데 몰아넣는 것들이 교회 안과 밖에 많이 있다. 교회를 흔들어 놓는 요소 중에서 교회 안에 있는 가장 심각한 것은 성령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이해라고 본다. 그것은 오순절 은사운동, 빈야드 운동(토론토 축복), 펜사콜라 웃음부흥운동, 신사도운동, 뜨레디아스, 프라미스키퍼, 알파코스 등 잘못된 각종 신비주의와 은사 운동들이 성경적인 성령운동이라는 슬로건 아래 지금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운동들은 교회를 교회되지 않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을 사역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간주하고 교회 안에 무분별하게 수용하면서 교인들로 하여금 이것들을 경험하도록 교회의 시스템을 가동하며 교회의 부흥을 도모하는데 열정을 쏟는데 있다. 이는 누가 뭐라 해도 성령에 대한 기본적인 신학지식의 결핍에서 나온 결과요, 또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에서 나온 결과로서 올바른 성령 운동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해 성령이 누구인지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성령에 대한 바른 지식을 정립해야 한다.

성령에 대한 바른 지식이란 무엇일까? 이는 성령의 존재와 사역에 대한 질문으로서 성령의 감동과 인도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면 먼저 성령이 어떤 존재인지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논의를 네 가지 명제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이 명제는 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한다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전제하고 있다. 이때 성령은 하나님이 영원세계에서 내신적 계시를 통해 본성적으로 성자가 발생될 때 발출되었다. 그래도 성령이 하나님이라는 본체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성부와 성자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이에 성령은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한 하나님이 처음에는 성부로, 그다음에 성자로, 그다음에 성령으로 변하는 것(양태론)이 아니다. 처음부터 성령은 하나님으로 존재하는 분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이라는 본체로부터 나오는 어떤 힘과 세력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다.

하지만 이 명제는 하루 아침에 확정된 것이 아니다. 이 명제는 오랜 세월동안 여러 학자들(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아타나시우스,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인 바실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오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츠빙글리, 칼빈 등)에 의해 개진되고, 여러 공회의(니케아 공회의, 콘스탄티노플 공회의, 에베소 공회의, 칼케톤 공회의 등)에서 많은 논의를 통해 확정되었다.

그런데 이 명제의 공론화는 니케아 공회의(A.D. 325년)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니케아 공회의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이다. 그것은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많은 고난을 받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자유를 얻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냐? 아니면 사람이냐?”는 논쟁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회의는 너무나 중요한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에서 하나님과 유사본체(ὁμοιούσιος)이지만 결국 사람이다.”고 주장한 아리우스파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에서 하나님과 동일본체(ὁμοούσιος)이고, 인성에서 완전한 사람이다.”고 주장한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하므로 논의의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문제가 확정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다. 이는 이 공회의에서 채택된 니케아 신조의 말미에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믿노라.”는 내용이 짧게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니케아 공회의 때 성령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 후 콘스탄티노플 공회의(381년 제 2차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했고, 니케아 공회의 때 다루지 못한 성령의 신성문제를 결의하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채택되었다. “··· 또한 성령을 믿노니, 이는 주이시며(το κυρσογ), 생명을 주시는 분(ζωοποιογ)이시고,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자(εκπορευσις)로, 성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라.”

물론 이 신조는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들, 곧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등이 강조한 “본질은 하나이고, 실체는 셋”이라는 신학공식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공회의 이후 또 다시 제기된 성령의 신성문제가 제기됐으나 성령이 하나님이라는 명제를 확고히 한 것은 루터, 츠빙글리, 칼빈 등이다. 아무튼 성령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확정되었다.

또 이 명제는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지지하고 있다. 이는 성령을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불렀고(행5:3,4), 성령을 성부, 성자하나님과 더불어 나란히 언급할 뿐 아니라, 성령에게도 영광을 돌렸으며(마28:19), 전지, 전능, 편재, 영원 등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을 가지신 분으로 말씀하였다(욥26:13,시139:7,8,사40:13,고전2:10)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성령이 힘이나 세력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둘째, 성령은 인격자이시다.

이 명제는 성자 아들에게 적용된 동일본체(ὁμοούσιος)가 성령에게도 적용되면서 논의(콘스탄티노플 공회의;381년)된 것으로서 성령 하나님이 지성, 감정, 의지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힘과 에너지가 아니고, 또 어떤 세력도 아니라는 것이다. 또 인간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그런 존재도 아니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논의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초대교회 때 단일신론자들과 성령파들이, 종교개혁시대에는 소신안주의자들이, 현대에서는 슐라이어마허와 리출, 유니테리안파, 오늘 날에는 시벨리우스주의자들이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성령이라는 말에 거룩한 “바람 또는 호흡”이란 의미가 있기 때문에 성령을 힘과 에너지로 보거나,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보면서 주고받는 귀한 물건처럼 취급하고, 성령을 무당들이 애써 노력해서 획득하거나 희한한 일들을 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보면서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적인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이에 성경의 진술을 보자. 먼저 성령이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할 수 있는 지식이 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또 성경은 성령이 탄식하고 근심할 수 있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4:30)에서 알 수 있다. 또 성경은 성령이 우리 안에 거룩한 뜻을 두고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기 위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에서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령이 하나님으로서 특별한 물건이나 에너지가 아니고 지, 정, 의를 가지고 활동하시는 인격자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셋째, 성령은 내주하신다.(요14:17, 롬8:9).

이 명제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대가로 떠나지 않고 임재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자연신론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후 세계를 떠나 있다고 주장하고(하나님의 초월성만 강조), 범신론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후 세계 안에 내재한다고 주장한다(하나님의 내재성만 강조). 하지만 개혁신학은 하나님이 초월하여 존재하시면서 동시에 그를 믿는 자의 마음속에 내주하신다고 한다(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모두 강조), 따라서 성령 하나님은 초월하여 계시지만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를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내주하신다. 이를 일반은혜와 특별은혜로 나누어 볼 때 성령의 내주에 대한 이해가 더욱 명확해진다.

일반은혜의 관점에서 성령은 창조 때부터 주님 오실 때까지 피조세계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질서와 생명력을 모든 피조물들과 모든 인간들에게 은혜로 베풀어진다. 또 특별은혜의 관점에서 성령은 구약시대에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지만, 죄를 지으면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떠나가셨다(삿 15:14; 대상 12:18; 시 51:11; 겔 11:5). 그 후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예수님의 사역에 집중하여 활동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신 후 오순절 성령강림부터는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대가로 오셨기에, 그리스도의 영이 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킬 뿐 아니라, 모든 성도의 마음에 떠나지 않고 내주하며, 지속적으로 활동하신다(요7:39, 14:16-17).

이를 그리스도인 한 개인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이 때 성령은 죄로 인해 죽은 인간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입(딛 3:5; 벧후 1:4)하므로 거듭나게 하시고, 죄를 회개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마7:20, 갈5:22-23)) 말씀을 통해 감동하신다. 또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섬길 뿐 아니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삶을 살게 하신다(갈 5:22-23). 또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끝까지 인도하시며, 그리스도처럼 영광스럽고 거룩한 몸이 되게 하신다.

또 이를 창조경륜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성령이 그리스도인 한 개인에게 국한되지 않고 창조물 전체에 포인트를 둔다는 것이다. 죄가 피조세계에 들어오기 전에는 에덴동산에 그가 하나님으로 온전히 임재 하셨다. 그런 점에서 에덴동산은 성전이다. 하지만 죄가 피조세계에 들어 온 후에는 자신의 거소를 제단과 성막, 그리고 성전(지성소)에 제한적으로 임재하며 일하셨다(왕상8:11, 9:2-3). 그 후 성령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담지하므로 그리스도 그분이 성전이 되게 하셨다(사 7:14, 마1:23, 요2:21),

이어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사역을 이루시고 부활승천한 후 오순절강림부터는(요19:30) 성령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의 마음을 성전(지성소) 삼고(히8:10-13) 그 안에 오셨다(요14:17).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 각자가 성령의 전이고 하나님의 성전이다(롬8:9, 고전3:16, 6:19), 즉 인간의 몸을 성전 되게 하신다(롬8:9, 고전3:16, 6:19,마7:20, 갈5:22-23), 이렇게 성전 된 인간들을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시키므로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엡 1:22-23, 골1:18)를 이룬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가 역사를 완성하려 오시는 종말에는 성령이 피조세계까지 깨끗이 정화하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거룩한 성도들이 거하는 거소가 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영원한 성전) 되게 하신다. 결국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통하여 영광과 찬송을 온전히 받으신다.

튀르키예-콘스탄티노플
튀르키예-콘스탄티노플

넷째,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분이시다.

이 명제는 성령의 출래문제로서 갑바도기아 세 교부들의 가르침아래 이루어진 콘스탄티노플공회의(381년)때 시작되었다. 이 공회의에서 감독들이 논의한 것은 성자가 영원세계에서 성부 하나님의 본성에 의해 출생한 것처럼 성령도 영원세계에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출래하였다고 보았다. 그 결과, 성령의 위격적 존재방식이 아버지로부터 출래(εκπορευσις)한다고 결의하였다. 이 때 성경적 근거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라는 말씀이다.

이런 결의는 그 당시 동방주교들만의 결의였기에,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오랫동안 논쟁하는 씨를 제공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콘스탄티노플공회의에서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로 본 것이다. 이때 서방교회는 성령의 출래문제에 불만을 품고 이를 바로 교정하기 위해 보편적 공회의의 소집을 로마황제 데오도시오스(Theodosios)에게 요청하였으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회의는 다시 동방교회만의 회의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서방교회는 A.D 382년 로마교황 다마수스(Damasus)의 주체 아래 로마에 공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공회의가 바로 로마 공회의(A.D.382)이다. 그 결과, 이 공회의에서 콘스탄티노플 공회의(381년)의 교리 결정을 수납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출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암브로시우스, 빅토리누스, 루피누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개진되었다. 특히 서방 최대의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 때 놀라운 진전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성령이 영원세계에서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출래하였다고 확정한 것이다. 이것의 성경적 근거는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라는 말씀이다.

이로써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의 결정이 수정되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공회의에서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증이 중요한 것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출래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나중에 아타나시우스 신경에 표현되므로 서방교회 신학의 기본자산이 되었다.

그 후 마침내 톨레도 종교회의(589년)에서 필리오케(“그리고 성자로부터”)을 삽입하므로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출래한다는 명제가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동방교회는 성령이 성부로부터 발출한다(τό εκ τού Πατρός εκπορευόμενον)는 단일 출래설을 굳게 믿었고, 서방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qui ex Patre Filióque procédit)는 이중 출래설을 믿었다. 여기서 우리는 서방교회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그 이유는 서방교회의 입장인 이중출래설이 성경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누가 뭐라고 해도 성령은 성부와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이해 속에 성령은 성부·성자와 구별되면서도 성부·성자와 더불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함께 존재하고 함께 사역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성령, 과연 그는 누구인가?」라는 논지를 가지고 성령이 어떤 존재인지를 네 가지 명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또 성령은 인격자라는 것이다. 또 성령은  내주하시는 분이다. 또 성령은 성부·성자로부터 출래한 분이라는 것이다. 이를 놓고 성령의 존재를 너무 제한된 범주에서 논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명제 속에는 성령이라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잘 묘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명제는 성령이 누구인지를 놓고 성령을 오해한 자들처럼 주관적으로, 체험적으로 논하지 않고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에 대한 바른 지식을 알고 깨달은 자답게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교회 안에서 잘못된 신비주의와 은사 운동들을 성경적인 성령 운동이라고 하면서 교회를 혼란케 하는 자들이 있다면 성령에 대한 바른 지식을 그들과 공유하므로 성령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해야 하겠다. 그때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것이다.

최낙범 박사(총신교수, 새순교회): 중앙대학교 철학과 졸업(B.A), 총신대신학대학원 및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졸업(Th.M), 숭실대학교 대학원 졸업(Th.M), 미,Kernel University 대학원 졸업(Th.D), 총신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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